[리뷰] 얄라리얄라

글_홍혜련

 

어린 시절 <초록 사과>라는 멜로 영화를 보고서 영화인의 꿈을 꾸었던 조혜나는 “유명 영화감독이 되거나, 유명 영화감독의 동기가 되거나 둘 중 하나”라는 그 ‘유명한’ 영화학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영화를 찍다 보니 어느새 졸업. 실력 있는 동기 스텝들과 지원금을 가지고 첫 독립장편영화 <원찬스>를 찍지만 결과는 폭망이다. 어찌어찌 ‘감독’이라는 호칭을 걸게는 되었지만 <원찬스>의 실패로 다시 영화 일을 하기란 요원하기만 하고 주머니는 점점 가벼워져만 간다. 그토록 사랑했던 영화였건만 영화만을 바라보았던 그 시간들이 이제는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핸드폰에 ‘내 사랑’으로 저장되어 있던 종현에게 오랜만에 연락이 온다. 이제는 서먹해져 버린 종현은 혜나에게 자기가 출연한 독립영화들을 모아 배우전을 하는데 GV 게스트로 와 줄 수 있냐고 묻는다. ‘주머니가 궁해서’라는 진심 같은 핑계를 스스로에게 대고 종현 옆에 선 혜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그 자리에서 ‘GV 빌런’을 만나고 만다. 분명 여기는 ‘박종현전’인데, 다짜고짜 혜나에게 <원찬스>에 대한 질문인 척하는 지적 세례를 퍼붓는 GV 빌런. 바로 고태경이다.

 

사진 ⓒ이지수

 

그런데 혜나가 고태경에게 ‘참교육’을 당하는 장면이 누군가에 의해 유튜브에 올라가고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리자, 혜나는 자신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대박의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보고서 GV 빌런 고태경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결심한다. 남의 영화에 지적질이나 해 대는 그의 민낯을 낱낱이 까발려 주고야 말겠다는 은밀한 야심을 품고서!

고태경에게 촬영 허가를 받으려던 조혜나는 그가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영화 <초록 사과>의 조감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게 다큐멘터리 촬영 허가를 받으러 간 자리, 고태경은 조혜나에게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그 조건이란, <초록 사과>의 주연 배우였던 채화영과의 인터뷰 자리에 자신을 데려가 달라는 것. 채화영에게 주어야 할 대본이 있다는 것이었다. 조혜나는 고태경의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천신만고 끝에 겨우 그의 허락을 받아 낸다.

고태경이 채화영에게 그토록 건네고 싶어 하는 그 대본은 그가 수십 년 동안 고치고 또 고쳐 무려 100번을 넘게 고쳐 쓴 대본이다. 콘티도 이미 다 완성이 되어 있다. 그의 머릿속에선 이미 영화가 완성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사진 ⓒ이지수

 

그런데 무엇이 그를 망설이게 하는 것일까. 그는 이 영화 말고 단편이나 다른 영화를 찍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듯하다. 성공의 코앞까지 갔다가 놓쳐 버린 것이 도리어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일까. 고태경은 이 단 한 편의 ‘걸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벼려 나가고 있다. 조혜나는 이런 고태경의 하루하루를 카메라에 담으며 영화에 대한 그의 간절한 마음에 점점 감화되어 간다. 혜나는 자신도 모르게 언제부터인가 그를 ‘선생님’이라 부른다.

 

“연기는 배우가 하고, 촬영은 촬영감독이 하고, 감독은 선택만 잘하면 된다잖아.

그런데 내가 선택을 잘못한 거면 어떡하지?”

 

사진 ⓒ이지수

 

차라리 아예 없었으면 좋았을 ‘작은’ 재능 때문에 영화를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토록 사랑했던 영화가 이렇게 미워질 줄 처음부터 미리 알았더라면 아예 시작하지 않았을까. 아니,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도 분명 시작했을 것이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조혜나는 고태경을 통해 영화에 대한 자신의 진심을 새삼스레 발견해 간다.

고태경은 대학졸업영화제까지 빠짐없이 챙겨 보며 남의 영화에 시시콜콜 지적하기를 서슴지 않는 빌런이지만, 그런 한편 그 대학졸업영화제가 열린 영화관의 마스킹 상태까지 살피며, 영화에 대한 사랑과 예의를 이야기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택시를 몰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가운데서도 노인들에게 영화를 가르치며 언젠가 꼭 찍으려는 그 영화의 대본을 고치고 또 고치며 20년째 입봉을 준비하는 감독지망생이기도 하다. 50대의 고태경도 30대의 조혜나도 아직은 버티고 버텨야 하는 준비생, 청춘인 것이다. 그 꿈을 향한 한 걸음, 한 걸음이 세상의 잣대를 놓고 보기엔 비루하기 그지없을지라도, 우리 인생이 가 OK아니라 NG의 연속일지라도 그 NG의 조각보는 어쩌면 매끈한 하나의 OK보다 더 찬란할지도 모른다. 마음속에 꿈을 품고 오랜 시간 바라고 또 바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혜나와 고태경의 이야기에 눈시울을 적셨을 것이다.

원작 소설의 무대화를 성공적으로 해낸 이번 공연은 두산아트센터에서의 트라이아웃을 거쳐 대학로예술극장 무대에 올랐다. 담백한 무대가 요즘 자주 보이는 화려한 무대에 비해 다소 단조로워 보였을 수도 있겠으나 장편소설 원작을 110분 분량으로 줄이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무대에 옮기며 서사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데에는 손색이 없었다. 공연 중 스크린으로 쓰인 배경막이 마지막 장면에서 잘려 나간 필름의 조각보로서의 진면모를 드러낼 때는 공연의 핵심 메시지가 그대로 시각적으로 구현되어 무척 아름다웠다. 사견을 더하자면, 빛을 보기 위해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는 인물의 대사처럼 조각보 너머 어둠으로 걸어 들어가며 마무리하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해 본다. 조혜나 역의 김소정 배우, 고태경 역의 백현주 배우뿐 아니라 일인다역을 넘나든 강해리, 송석근, 안수정 배우의 호연에도 박수를 보낸다. 이번 공연의 아쉬운 점이라면 짧은 공연 기간뿐이다. 다시 한번 무대에 올라 더 많은 관객을 만나게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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