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빈들 <동주...그 사나이>

글_김충일(연극 평론가)

 

왜 우린 무대를 찾을까? 무대는 일상을 살아가다가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도록 예술인들이 관객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기구이다. 이 때 관객은 무대와 마주하는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고유한 관객이 된다. 실제로 만난 무대는 무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뜻이다. 무대는 ‘나’를 들여다보도록 돕는 광학기구일 뿐이고, 그 광학기구가 있어서 나는 ‘나’를 읽을 수 있게 된다. ‘나’를 읽을 때, 나는 ‘나’를 통해 타인과 세상에 흩어져 있는 것을 한데 모아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면서 무대 속에 스며든다. 자기에 대한 의심과 돌아봄이 없는 이해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우리는 나를, 사람을 세상을 정말 잘 읽어야 한다.

꾸준히, 오래, 지치지 않고 계속되는 한 낮의 폭염과 풀벌레도 더위에 지쳐 노래를 멈춘 노염(老炎)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저녁(2024.08.13.19:30). 제 15회 대전국제소극장연극제 (The 15th DAEJEON INTERNATIONAL PLAY FESTIVAL)의 지역 참가작으로, 극단 빈들의 초연작 <동주…그 사나이>(김미정 작, 유치벽 연출)를 찬 공기가 적절히 배여 있는 소극장 드림아트홀에서 만났다. 왜 시대가 만든 ‘윤동주’가 아니라, 자신을 의심하고 돌아보며 그 스스로가 그렇게 살도록 결정하고, 내가 걸어가야 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간 ‘그 사나이’일까?

우린 지금까지 ‘동주’를 일제의 전쟁 찬미, 신사참배, 창씨개명, 우리말 박탈, 기독교 탄압에 대한 이웃과 동포, 피를 나눈 민족에 대한 죄의식, 저항하지 못하는 좌절감 등을 의식의 갈등 및 내적 독백(시)을 통해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려 했던 외연적 모습에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일련의 이와 같은 테제와 정서는 ‘팩션(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더한 단어)으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더해 새롭게 창조한 작품과 기본적인 드라마와 몸짓언어 중심의 미학적 가치와 관계성을 확장시키는 작품(음악극, 무용극, 낭송극,영화 등)으로 확장 변모해 오고 있다.

 

사진 제공: 극단 빈들

 

이 극은 일제 강점기하에 시인 윤동주가 감옥에 갇히고 난 후부터 죽기까지 자신의 시와 인생을 되돌아보는 이야기다. (이)춘호라는 허구의 인물이 윤동주의 옆방에 갇혀있는 수인으로 등장한다. 두 사람은 감옥에 오기 전까지 다른 삶의 궤적을 보인다. 한 사람은 징용 노동자로서 비천하게 시대를 살아온 인간으로 또 한 사람은 지식인이자 시인으로서 삶의 고뇌를 짊어지고 있는 인간으로. 한 사람은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며 삶을 이어가고자 하고 또 한 사람은 실험용 주사의 부작용으로 인한 환영 속에서도 부끄러움으로 대변되는 그의 시에 대해 생각하고 지나간 추억(기억)들과 사람들( 정병욱, 송몽규)을 만난다. 두 사람은 작은 감방 안에서도 삶의 궤적을 이어나간다.

이 때 연출은 지금까지 ‘우리는 누구인가?’보다는 ‘무엇을 가졌는가?’에 빠져있는 사람들로부터 고착된 닫힘의 울타리를 넘어갈 ‘새의 시각(bird’s eye)’을 장착하고 ’동주‘를 지시 대명사 ’그‘를 접합한 ’그 사나이’로 만들어 ‘천명(天命)의 세계’로 날려 보낸다. 그 세계는 삶이란 실수 없는 당당한 천국 여행이 아니라 ‘자아이상의 표상화(representation: 삶의 설계에 위한 자기 소망에 대한 자기 검열과 반성 그리고 다짐)’ 즉 자신의 부끄러움을 바로 볼 수 있는 용기를 몸에 체화시키는 가시밭길로의 고난 여행의 표상이란 메신저로 변모한다. 다른 말로 바꾸면 ‘내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몸부림으로 다가온다.

 

사진 제공: 극단 빈들

 

치욕과 절망의 시대를 이겨내려 발버둥치는 투사적인 모습에서 현실속의 자아의식을 만나 발현되는 자기반성적 반향을 갖춘 ‘자아이상(자기 인격의 심역(마음속)에 존재하는 주체적인 모델’을 꿈꾸는 ‘그 사나이’로의 변신을 위해, 배우들은 ‘벌레의 시각(worm’s eye)’을 마련하고 무대 위로 나선다. 그들에게 닥친 상황을 탄력적으로 헤쳐 나가려는 몸부림은 ‘염쟁이’만도 못하다는 자기모멸, 시를 일어로 베껴야만 하는 자기기만, 시가 무슨 위로가 되냐고 되새기면서도 <아리랑>을 부르는 자기연민, 우물에 비친 내 모습에 돌을 던지는 자기반성, 급기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꽃처럼 피를 조용히 흘리’는 구도적 순교자로서의 자기현현으로 나아간다. 특히 춘호는 땅을 차고 벽을 긁어내는 ‘삶의 소리’를 반복하면서 죽음으로 다시 세상을 기르며 사는 ‘발버둥치는 삶’을 실현해 낸다.

이런 점에서 작품 속에 드러난 배우들은 ‘자아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주변 세계에 적응해 사는 거짓 자기(false-self)가 아니라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그대로 묵묵히 걸어간 건강한 자기(true-self)의 모습을 보여준다. 대체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자기를 아는 사람인데, 자기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이다. 무대 속 인물들은 자신의 한계, 곧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신 앞에 서서 인간의 겸손한 마음으로 부끄러움을 무대 위에 쏟아낸 것은 아니었을까.

 

사진 제공: 극단 빈들

 

무더운 날씨 속에 땀으로 숙성된 연기는 무대 예술과의 절제력 있는 매듭으로 이어진다. 특히 지나친 단순화로 인한 거부감이란 우려를 씻어낸 무대 디자인, 흑과 백, 그 사이의 색인 회색으로 주조된 감옥과 황토색 수인복(囚人服)을 통해, 마치 윤동주의 부끄러움의 미학을 보여주는 듯한 단정하고 간결한 색채분위기, 선지자적 프로메테우스와 아픈 현실의 의지적 발현을 현시하는 이육사를 드러내기 위해 등장한 실루엣 작업(그림자놀이), 막과 막사이의 틈새와 연기와 연기사이의 폭과 깊이를 조절하기 위한 음악과 음향의 절제된 역할, 특히 동주의 연대기적인 흔적과 추적의 모습을 무리 없는 동선으로, 때론 다역 배우들의 당돌한 낯설음의 등장으로 자칫 느슨해 질 수 있는 무대를 살아있게 만든 연출 등은 희망과 희생을 통해 ‘삶의 강(江)을 풍성하게 만드는 <극단> 빈들’ 식구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연극에 함께 하는 관객은 배우의 이야기를 듣고, 때론 배우의 상대역이 되기도 하며 공연을 완성하는, 능동적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되기도 한다. 무대 위에 연출가는 작가의 ‘떠오르기 전의 생각들’을 ‘떠오르는 생각들’로 재해석하여 배우들에게 ‘떠오르려고 하지 않는 생각들까지’ 끄집어내는 치열한 수고로움을 담당한다. 이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시선은 관객의 ‘다시 떠오르려는 생각들’ 즉 ‘Bee’s Compound Eyes’이다. 오늘 만난 작품에서 ‘동주’…그 사나이’로 변신이 가능했던 것은 ‘환영(幻影)’ 속 ‘동주’의 삶이 현실 속 ‘그 사나이’의 삶으로 거듭 태어나 언제든지 ‘현재화’될 수 있다는 ‘다시 떠오르려는 생각’ 대한 또 다른 증명이다. ‘영원한 불멸, 동주’는 다시 태어나 이렇게 말하는 듯싶다. 연극인과 관객 여러분! ‘벌의 겹눈’이 가진 ‘겸손과 용기’의 지혜를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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