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그린피그 역사시비 9월 프로젝트 <라이어 게임>

글_김정숙(공연문화비평가)

 

사진 제공: 그린피그

 

라이어 게임이라는 메타형식

그린피그 역사시비 9월 프로젝트, 김지은 연출의 <라이어 게임>(공연기간: 2024년 9월 6일~25일. 공연장소: 예술공간 혜화)은 ‘교제 폭력’을 소재로 한 연극이다. 교제 폭력은 흔히 말하는 데이트 폭력이라는 용어의 대체용어인데, 전/현 연인 간에 일어난 폭력 및 상해를 뜻한다. 이 연극은 이러한 현상에 노출된 여성들의 서사이자, 이러한 현상을 언어화하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연극이라 할 수 있다. 일 년 전의 9월의 어느 역사적 사건을 출발점으로 연극적 시비를 가려보는 이 프로젝트의 원래의 과제와는 다르게, <라이어 게임>은 동시대에 이루어지는 친밀한 사이의 폭력을 고발하고, 그러한 동시대 현상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밝히는 연극이다.

제목인 라이어 게임 Liar Game은 일상적인 카드놀이나 스마트앱을 통해 소규모 모임에서 흔히 즐기는 콘텐츠이다. 제시어를 두고 플레이어들이 그것을 표현하며, 그 제시어를 맞히는 게임이다.

관객이 극장에 들어서면 무대 중앙에 놓여 있는 큰 TV에 게임의 규칙이 적혀 있고, 장면 구분도 ‘1라운드’, ‘1라운드 종료’, ‘2라운드: 언어’라고 스크린에 나타난다. 대본에 보면 인물의 역할도 “플레이어 수빈”처럼 플레이어로 인식된다. 이러한 면에서 연극 <라이어 게임>이 게임이라는 틀을 메타형식으로 이용한다.

여성 인물 4명이 결국 전/현 연인에 의해 살해를 당하는 이야기로 귀결되기에, 주로 폭력적 내용이려니 생각했는데, 실제 연극을 보면 의외로 폭력이 전면화되지 않아 놀란다. 왜 그럴까?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고, 이 연극의 역사적 사유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것은 극을 풀어가는 유희적 방식과 전/현 연인 사이의 폭력이라는 주제 자체가 지닌 사회적 무의식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 듯하다.

TV에서 흘러나오는 로맨스로 가장된 폭력적 장면을 보며, 여성 4명이 소파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다를 떠는 것으로 극은 시작된다. “손목 탁 잡는데, 내 여자다 건들지 마, 이런 느낌“, ”손잡았어! 손잡았어, 몰래 저렇게 하니까 더 좋네“, ”복도식 아파트가 무서워“ 등 여성들은 환호와 두려움이 섞인 채 말한다.

이때 여성 인물 1이 친구들로부터 빠져나와 현 남자친구의 전 여자친구와 대화하는 장면이 재현된다. 같은 여자로서 그냥 넘기지를 못하겠다며, 그 남자의 심각한 폭력성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이와 동시에 여성 인물 1, 즉 플레이어 수빈은 그녀를 통제하는 남자친구의 문자 폭격을 받는다. 이렇게 시작하여, 1라운드가 끝나면 여기 모인 여성 인물 4명 모두가 교제폭력에 노출되어 살해되는 여성들임을 마침내 알게 된다.

한 남성과 친밀한 관계를 지닌 여성이 남자 측의 폭력에 의해 하루 2.6명 살해당하는 통계를 알고, 폭력에 노출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징후, 가령 몸에 멍 같은 것을 그냥 보고 무심히 넘기면 안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장면도 있어, 인상 깊었다. 물론 당사자는 남자친구가 자신을 ‘침대’에 던졌다고 로맨틱화 하지만, 친구들은 그녀에게 몸에 있는 상처와 멍을 찾아낸다. 한 명의 낭만적으로 미화된 말이 발견되는 것이다.

 

사진 제공: 그린피그

 

유희적 문제 해결 – 낭만적 미화와 자본주의의 결합

<라이어 게임>은 말로만 진행되는 연극은 아니다. 소파에서 드라마를 보며 수다를 떨던 인물들이 강력한 퍼포먼스를 하며 거실 공간이 한 번 왈칵 뒤집히는 유희적 장면이 있는데, 어디서 모두 본 듯한 익숙한 장면들이며,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잠옷에 거실이라는 안정되고 폐쇄된 공간이 어찌 보면 의뭉스럽게 사회적 공간 그리고 마지막에는 살인 범죄의 공간으로, 그것도 발 빠른 속도로 장면전환 하는 것을 보며, 연출가의 솜씨와 연기자들의 역량에 그리고 그 유희적 연극성에 감탄할 수도 있다. 가령, 잠옷을 입은 여성 2가 방송중계 중인 변호사에게 상담을 받는 장면에는 그녀의 손에 마이크를 주고, 연출이 시작된다. 잠옷 위에 낭만적 프렌치코트를 입히고, 하이힐을 신기며, 환호인지 비명인지 모를 효과음이 뒤에서 계속 터진다. 여성 2는 파트너의 폭력을 고발하지만 결국 증거 부족으로 합의로 끝나고 피해자의 말은 효과음에 묻히고 마는 꼴이 된다. 이 장면에서는 피해자에게 마이크를 주어 발언하게 하고 싶었으나, 미디어라는 연출적 맥락이 진실을 가리고, 결국 진실은 밝혀지지 못함이 재현된다.

이어지는 ‘안전한 이별대행소’ 장면들은 유희적 절정을 이룬다. 여성 인물들은 입고 있던 잠옷 위에 분홍, 초록 등의 반짝이 조끼를 덧입고 나와 가해자 남자의 말을 ‘트로트’로 대행해준다. 돌아오라는 협박적 사과가 담긴 노래다. “내가 진짜 미안해. 어제 너 때린 거 진짜 미안해. 한 번만 용서해줘. (…) 내가 미친놈이야. (…) 애기야 오빠가 미안하다. 이건 널 위한 선물이야!”그리고 “니 눈엔 내가 X 같냐, 사랑한다…. 핸드폰 내놔”와 같은 필자가 인용하기에 민망한 강도 높은 욕설과 협박적 말이 노래로 작곡되어 불린다. 그런데 그 폭력성이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연극적이고 유니크 하게 느껴지는 게 정말 이상했다. 이별 대행은 여러 형식으로 이어진다. 창작자들의 조사 결과인 듯한데, 표현 방식이 기발하다. 비트를 넣어 법 규정과 처벌 규정을 노래하고 춤춘다. 혹은 무당에게 사주를 보거나, 유령이나 강시와 같은 모티브가 나와 안전한 이별을 하게 해주겠다고 한다, 여름날 납량극에서 볼 수 있는 키치화되고 낭만적 성격을 지닌 모든 문화적 생산물들이 이별대행소에서 매개된다. 이것은 자본과 제도로 만들어진 현실 안의 이데올로기가 형식화된 것이다. 마지막에 플레이어 지현이 이별 대행을 주문하지 않자, 이 상품을 팔려고 했던 대행사들이 오히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협박하기까지 한다. 무대 위에 분위기는 어느덧, 극의 가장 깊은 곳에 닿는다.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놀이에 심취된 분위기가 만연하다. 빠져나갈 틈 없이 무대는 유희성으로 팽창해 있다.

 

사진 제공: 그린피그

 

은닉된 이데올로기의 전략 ‘낭만적 미화’

<라이어 게임>의 장면들은 서로 대조를 이루며 짜져 있다. 앞 장면들이 흥분되고 격앙되었다면, 다음 장면은 4명의 여성 인물이 방송 설명에 맞추어 차분하게 명상한다. 호흡하며, 한 발을 들고 ‘버티며’ 서 있다. 흔히 보는 요가 장면이 명상적 설명과 함께 실질적으로 수행된다. 배우들은 땀을 송골송골 흘리며 무너지지 않기 위해 균형을 잡는다. 여러 요가 자세가 이루어지는 동안 사이 사이에 마치 옆에서 누군가 소곤거리는 것처럼, 혹은 은근히 주입 당하는 말처럼 점쟁이의 사주, 목사의 설교, 정신과 의사의 조언 등의 종교적이고 의학적인 말이 들린다. 대부분 남성 목소리 혹은 권위자의 목소리다. 가령, 목사는 ‘시련 이후에 하나님은 더 풍성한 복을 주십니다.’라고 말하며 그녀에게 ‘사랑하라’ 한다. 종교, 의학 혹은 다양한 문화적 담화의 권위 있는 목소리가 ‘기다리라, 맞추라, 그래도 사랑하지 않느냐’ 설득한다. 결혼할 시기가 되었다고 권유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제도적 담화들은 은밀히 숨겨져 있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하는 것처럼, 요가를 하는 몸속으로, 전체 무대로 그리고 관객석으로 흘러들어온다.

<라이어 게임> 1라운드까지는 교제폭력을 제도화된 시선으로 은닉하는 여러 현상이 폭로되거나 풍자된다. <라이어 게임>은 현실에서 비극을 만들지 않고자 하는 관객이라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매끄럽게 봉합된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의 문맥을 꿰뚫도록 각성을 촉구하는 저항 서사로서 읽힐 만하다.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난 폭력을 이데올로기와 제도로 무장된 사랑의 담론으로 묵과하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사진 제공: 그린피그

 

키워드의 싸움

<라이어 게임>의 1라운드가 교제폭력에 노출된 여성들의 신체적 구현이었다면, 2라운드는 장면이 전환되고, 텍스트를 읽고 진술하는 언어적 담화의 시간이다. 여성의 전화센터에 데이트 폭력을 고발하는 내용이 TV 스크린에 큰 글씨체로 나오는데, 모든 소리가 멈추고, 관객은 침묵 속에 그 텍스트를 읽는다. 그 이후, 앞 장면에서 등장인물로 연기했던 배우들이 각각 특정의 피해사례를 진술한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 폭력을 당하고 살해되어 ‘나는 죽었는가’를 담담히 ’진술‘하는 글을 낭독한다. 지금까지 유희적 장면으로 무대를 들었다 놨다 하다가, 극이 갑자기 다큐멘터리처럼 감정을 빼고 차분하게 급변하고 언어 중심이 되니 관객으로서는 조금 당황스럽다고 생각하며, 시계를 본다, 1라운드로 60분 정도 지났고, 남은 30분으로 종결을 향해 치닫고 있다.

<라이어 게임>의 마지막은 다시 초반부의 게임 장면으로 돌아온다, 누가 라이어인지, 무엇이 제시어인지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카드놀이의 제시어는 ‘교제 폭력’ 이었고 라이어는 사랑이라는 제시어를 가졌지만, 스스로가 라이어인지 모르고 계속 “사랑했나봐 잊을 수 없나봐”를 반복한다.

위에서 바라보는 승자의 관점에서 아래서 바라보는 패자의 관점으로 현실 혹은 역사를 다시 바라보고자 하는 극단 그린피그의 역사의식을 참고하여 보자면, 연극 <라이어 게임>은 교제 폭력이라는 지시어로 표현된 모든 장면에는 데이트폭력이 표현되고 있었다. 연인 간의 폭력을 폭력으로 직시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으며, 로맨틱화하고 낭만적으로 미화하는 여러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사랑담론을 표현해내고 있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연극은 특정의 사건을 다루기보다, 해석학으로써의 역사 다시쓰기로 풀이된다. 구체적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이나 재현 혹은 해석이 아니라, 교제 혹은 사랑이라는 키워드가 어떻게 수행되는가를 밝히고 있다. 갈등하는 두 주체 혹은 집단, 이 극에서는 남성과 여성, 이와 관련하여 가해자 그리고 피해자라는 기호의 정체성을 단순히 묻는 차원이 아니라, 개인, 집단이 기호를 어떻게 전유하려고 노력하는가, 즉 제시어인 언어를 통한 역사담론으로 필자는 해석하였다.

연극 <라이어 게임>은 데이트 폭력이라는 용어가 사회 문화적으로 억압적 기제로 작동하며,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체제의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은닉하는 데 일조한다고 보는 것 같다. 이러한 측면에서 제도적 기득권은 데이트 폭력 혹은 교제 폭력을 사랑이라는 말로 가리고, 폭력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을 방해한다. 무엇보다 몸으로 이행된 1라운드는 이러한 담론을 체현한 것이며, 언어가 아닌 몸으로 구현한 저항 서사이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용어는 낭만적으로 미화된 거짓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연극 <라이어 게임>은 언어가 매개된 정치적 문화적 논쟁의 장을 마련하였다. 9월 11일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데이트폭력을 대체 할 만한 용어에 대해 언급되었는데, 어찌 보면 이 연극은 제시어 교제폭력 아래 ‘데이트폭력’을 상상하고 표현하는 현실에 대한 표현이자 논쟁일 수 있다. 교제 폭력이든, 데이트폭력이든, 친밀한 사이의 폭력이든 다른 키워드이든, 역사적으로 이데올로기에 의해 은닉되고, 승자의 관점에서 굳어진 키워드를 지속해서 비판하고 표현하는 것이 그린피그의 역사 시비 프로젝트의 의미일 것이다.

 

사진 제공: 그린피그

 

<라이어 게임>에 나타난 정치적 무의식

필자는 서두에 이 연극은 라이어 게임이라는 카드놀이를 메타형식으로 활용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극의 마지막 장면도 “애들아 한 판 더 할래?”하고 끝난다. 물론 키워드 교제 폭력을 제시하기 위해 이 형식이 필요했고, 마무리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연극은 자신이 비판하고 저항하고자 하는 기득권의 이데올로기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은닉의 문화적 방식’을 자신에게 그대로 사용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연극은 폭력적인 내용을 순화시킨 동화 같은 느낌을 준다. 부모의 학대, 방치 그리고 폭력을 계모인 탓으로 은닉하여 아이에게 들려주는 수많은 계모 모티브의 낭만주의 동화처럼 말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한 친부모의 자식에 대한 학대와 폭력은 동화에서 그 진실이 은닉되어 있다. 이 문제는 필자가 서두에 언급한 왜 이 이야기가 폭력적 내용인데도 폭력적으로 와닿지 않는가 하는 놀라움과 연결되는 것 같다.

“애들아 한 판 더 할래?”하고 묻는 이 마지막 대사는, 아 이 모든 게 모두 게임일 뿐이었구나. 한 판 유희적으로 놀다가 끝나는 환상일 뿐이구나 하는 감각을 준다. 아! 그래서 여성 인물들의 이름은 불리지 않고, 게임의 플레이어일 뿐이구나 하고 뒤늦게 깨닫는다.

“정치적 무의식”의 저자 프레드릭 제임슨은 예술작품이란 작가가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모순을 작품 속에서 상상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해 저항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예술작품은 상상적이나마 사회적 모순을 해결해보자 하는 상징적 행위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연극 <라이어 게임>은 교제폭력과 관련된 사회적 모순을 치열하게 고민하였고, 표현하기 위해 노동하였다. 그러나 이어지는 유희의 장면들 그리고 서사의 종결을 모두 게임 한 판으로 돌리는 것을 보면서, 이 연극에 참여한 예술가들의 의식 혹은 정치적 무의식을 감각하고 발견할 수 있었다.

예술텍스트의 표층은 창작자의 무의식을 봉쇄하기 위한 것이다. 아무리 의도적으로 저항서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창작자는 자신이 사는 사회 문화의 맥락을 벗어날 수 없기에, 텍스트에는 언제나 창작자의 무의식이 징후나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비평가/독자나 관객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소를 발견하고 모순이 드러나는 지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텍스트 안에 내재하는 창작자의 의식이 아니라, 당대의 역사에 따라 통제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달라진 생산양식이 가져온 모순된 사회현상은 모순점을 낳는데, 창작자는 이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며 사회적인 상징적 서사로서 해결책을 제시한다. <라이어 게임>에서 ‘게임’의 메타적 활용은 바로 이러한 끝없이 재생산되는 문화적 양식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연극 <라이어 게임>은 교제 폭력의 모순성과 야만성에 대한 이 시대 여성들의 불안을 대변하는 건 아닐까? 진실을 그대로 이야기하기엔 너무 폭력적이니까. 어쩌면 이 시대의 관객은 유희적 장면이 아니면, 접근 불가능하니까, 이미 우리는 그러한 생산양식에 연루되어, 모순을 지적하면서 스스로 모순을 낳고 있는 시스템에 빠져 있는 건 아닌가?

이 연극에서 교제 폭력에 노출되었던 여성들의 끝은 어떻게 무대화되었는가? 질문을 달리하면, 교제 폭력에 대한 한국 여성들의 두려움은 어떻게 해결되는가를 다시 살펴보자.

1라운드 끝에 남자친구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는 여성 플레이어가 결국 이 남자의 칼에 살해되어 쓰러지자, 이 순간, 무대가 밝아지고, 두려움에 떨던 여성들은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온다. 그리고 이제 해방된 듯한 춤을 춘다. 그 위로 흰색, 붉은색의 컨페티가 쏟아진다, 자유로운 순간이다. 죽어야 끝나는가! 잠시 필자는 그 장면이 아름답다고 느끼기까지 하였는데, 1라운드 종료 스크린이 떴다. 흰 웨딩드레스는 여성을 억압했던 가장 오래된 상징물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스친 것은 이미 연극이 끝나갈 때 즈음임을 지금 고백한다.

위의 장면은 분명히 다양한 코드로 읽히고, 관객마다 다른 소감을 가질 것이다. 필자 역시 광고에서 본 듯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활짝 웃는 여성들을 보며 해소되는 부분이 있었다. 남성의 여성 살해 장면은 짧게 나타나고, 이를 이어서 유령처럼 이 장면이 나타나는데, 왜 우리는 안도하였을까? (필자뿐만 아니라, 다른 이도 그런 소감을 가진 것 같았음을 관객과의 대화에서 알 수 있었다) 바로 은닉되고 이상화되었던 이데올로기, 다시 말하면 여성/신부에게 가해진 상징 “순수, 죄 없음, 처녀, 백인”이 무의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그 불안을 완화한 것은 아닐까? 사실은 이 코드는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을, 약자를, 힘이 약한 자를 역사에서 타자화하지 않았는가! 창작자가 처한 환경이나 사회 문화적 맥락이 창작과정에 유령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전통화된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려 하는 순간에도 말이다. 이는 정치적 억압의 무의식적 표출이다.

 

사진 제공: 그린피그

 

결론: 삶 안의 역사적인 것

연극 <라이어 게임>은 역사시비 프로젝트로서 지원금을 받고 수행되는 연극이고, 역사적 관점으로 연극을 봐달라는 프레임을 팸플릿에 제시하고 있으니, 또 이것이 흥미로워 필자도 관람하였으니, 이 관점에서 조금 더 생각해보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한 키워드의 투쟁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정치적 무의식의 역사적 관점은 일정 정도 역사에 대한 후기구조주의적 담론이다. 그러한 담론도 중요하지만, 동시대 관객으로서 이 연극을 보면, 역사적인 기억, 체험 혹은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모티브는 거의 없었다. 모두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젊은 여성과 신체들의 서사였기 때문일까? 마지막 진술 장면에서 50대 여성의 사건에 대한 진술이 있었는데, 이 경우 유일하게 어깨너머를 뒤돌아보는 ‘시간’을 느낄 수 있었다.

교제 폭력의 이데올로기적 그리고 미디어적 낭만화는 다중매체가 발달한 동시대 세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세대를 초월하는 역사적인 것이다! 만약 이 주제를 삶 속에서 소박하게 더 깊이 들여다보았다면, 이와 관련된 언어적 현상과 사회적 모순이 투명해질 것이다. 그러면 이 연극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남성을 사이코패스처럼 캐릭터화하거나 키워드 투쟁이라는 도식적 개념을 장면화하려고 애써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오히려 이 주제가 내 아버지, 오빠, 남동생, 아들의 이야기가 될 수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그들을 사랑하는 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로 느껴질 것이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교제 폭력은 가정 폭력과 유사한 성격이 있다. 가정폭력은 바로 가족 간의 서열적 관계 그리고 힘의 관계로 발생하는 폭력 및 상해이다. 이것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바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적인 구조 아래, 남성이 여성을 서열상으로 낮게 위치시키는 문화와도 연관 있다. 부모의 뜻에 아이가 어깃장을 놓으면, 엄마가 방울뱀 소리를 내며 아이에게 “어디 엄마에게 감히….” 하는 말을 듣지 아니한 사람 하나 없을 것이다. 제 뜻에 반대하면, “감히 (여자가) 어디….”를 발화하며 폭력이 행사되는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필자가 조사한 결과, 이러한 발화 “감히 (여자가) 어디….”는 교제 폭력에 자주 나타나는 발화라고 한다.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지” 같은 표현도 마찬가지다.

“아니 사랑을 왜 저렇게 표현한 거야?”라는 이 극 마지막의 비명과 같은 대사는 상대를 소유해야만 사랑이 성취된다고 생각하는 사유에 대한 문제 제기일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자본주의의 발현 이후 사랑의 방식이 어떻게 변질하는가를 역사적 방법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적 욕망의 구조 속에서, 현대인은 사랑을 존재의 방식으로 이행하지 않고, 소유의 방식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삶의 방식도 존재적 방식이 아니라, 소유에 기반한 방식이 되었고, 이를 통해 사랑의 방식도 대상화되고 사물화되었다, 이것은 사랑의 소외현상이다. 어떻게 우리가 사는 삶의 구조가 인간을 타자화하는지에 관한 깊은 물음을 삶 속에 놓고, 그 언어작용을 살펴보면, 현실 안에 있는 나에 대한 자의식 그리고 현실 인식, 나아가 역사 인식이 같이 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예술과 삶의 관계이며, 그 관계성을 총체화하는 것은 나/예술가의 책임이다. 이때 우리를 더 단단하게 하고 부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현실과 나 사이의 변증법적 태도일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역사를 승자와 패자로 나누고, 키워드를 쟁취한 자가 승자였던 역사서술방식이 꼭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역사관이자 미학적 콘셉트일 필요가 있는가? 사실 이러한 이론은 힘의 관계로 구성되는 역사를 비판하기 위해서 나온 비판 담론이다.

필자의 한 지인은 온라인에서나 미디어를 통한 교재를 통해 성희롱이나 폭력이 오고 가는 것을 교제 폭력으로 상상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교제 폭력의 양상은 다양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위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바라본다는 것은 이러한 이분법적 사유에서 나아가, 특정의 개인이나 집단의 말을 구술하게 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삶 안의 다성적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면, 그리고 가장 동시대적 현상을 짚어 볼 수 있다면, 역사적 태도로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자, 역사적 의식을 총체화 하는 일이다.

그런데도 <라이어 게임>은 교제 폭력에 노출된 현대 여성들의 불안 그리고 그 모순을 잘 감지 할 수 있는 연극이었다. 자주 멍이 있는 여성이나 어린이를 보면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의심하고 묻는 것에서 역사는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계몽적 장면을 도입부에 넣은 것은, 꼭 연극이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신문 기사도 수행하는 일이지만, 또 안 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가 생각하면 오히려 응원하고 싶다. 그만큼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교제 폭력의 사안이 심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인류문명의 중요한 담론 중 하나라면, “문명의 기록치고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 아니었던 것이 없다”(역사철학 테제 중 7번째)고 서술한 발터 벤야민의 말은 이 연극의 전언에 해당한다.

 


  • 무료정기구독을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메일을 보내주세요.
  • 리뷰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원고를 보내주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