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산수유 <고트(GOTT)>

글_홍혜련

 

 

무대 위는 공청회장이다. 리하르트 게르너라는 한 남성을 중심으로 공청회의 사회자와 찬반 양측의 변호사, 전문가 의견을 제시하러 온 법학자, 의사, 종교인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팽팽한 논의를 벌인다. 관객들은 공청회의 청중으로서 모두의 말을 듣고 공청회 말미에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온라인 투표를 한다.

 

사진 제공: 극단 산수유

 

리하르트 게르너가 제기한 문제란 이것이다.

그는 죽고 싶다. 이를 위해 자국 독일에서, 자신의 건강을 돌보아 온 주치의로부터, 고통 없는 확실한 죽음을 맞게 해 줄 약물을 처방받을 수 있도록 법제화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그러나 그는 사회 통념상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할 정도의 그 어떤 고통도 겪고 있지 않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질병 없는 건강한 상태이며, 경제적 어려움도 없고, 사회적 위기도 겪고 있지 않다. 자식들과의 관계도 매우 건전하다. ‘단지’ 아내와의 사별 이후 더 살아야 할 의미를 모두 상실했을 뿐이다. 그러나 게르너는 죽기 위해 육체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통상의 자살 방법을 택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스위스 등 타국에 가서 죽음을 맞고 싶지도 않다. 그는 생전 정치적 신념에 투철했던 아내가 자신에게 기대할 법한 일을 지금 해내려 한다.

 

사진 제공: 극단 산수유

 

논쟁은 ‘스스로 죽음을 맞을 권리’를 논하는 데서 출발해 ‘타인의 조력에 의한 선택사를 법적으로 허용할 것인가’에까지 이른다. 이 과정에서 관객들은 우선 죽음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있다는 데서 기존의 죽음의 대한 생각을 되짚어보게 되고, 나아가 스스로 죽는다는 것이 ‘권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며, 스스로 냉철한 사고력으로 죽음을 결심한 데 대해 다른 사람이 가치 판단을 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지, 그로 인해 한 사람의 자율성을 침해해도 되는지까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것을 법으로 정하는 데까지 생각을 이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공청회 여러 패널들의 말들은 기존의 생각을 확장, 발전시키거나 완전히 뒤집어 놓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관객들에게 가 닿은 말들은 각기 서로 달랐겠지만, 개인적으로 필자를 흔들어 놓은 것은 마지막 전문가 패널인 가톨릭 주교의 말이었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성인이 된 후 지금까지 한 번도 흔들림 없이 늘, 스스로 정한 때에 약물에 의해 고통 없이 사망할 수 있기를 강력하게 소망해 왔다. 그런데 주교의 말, 현대인에게 삶의 목표란 행복이기 마련이지만, 삶은 실은 고난이며 그 고난의 삶을 끝까지 완수해 내야만 진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을 듣자 필자가 그동안 얼마나 편협하게 사고해 왔는지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실로 삶이란 가능성이다. 가능성에는 음과 양이 모두 존재한다. 삶을 완벽하게 스스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주체성, 자율성을 강조하며 스스로 결정하는 삶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고통 없는 선택사를 바라면서 한편으로는 삶의 밝은 면만을 추구해 왔던 것은 아닐까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진 제공: 극단 산수유

 

공연을 보기 전과 후, 존재가 바뀌었음을 느끼게 하는 공연을 가끔 만난다. 길다 해도 결국 몇 시간에 불과한 공연 시간 동안, 사건과 상황이 벌어지는 무대로부터 떨어진, 어쩌면 ‘완전히 안전하다’고 할 수 있는 심적, 물리적 거리의 객석에 앉은 관객으로서 그런 체험을 할 수 있을지 모를 가능성이야말로 수차례 실망을 할지언정 또다시 극장을 찾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이번 <고트> 공연은 단연, 훗날 되돌아보았을 때 삶의 궤적을 바꾸었을지도 모를 그런 공연 중 하나였다. 이 공연이 던진 질문은 죽음에 대한 필자의 이전 신념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았고, 관극한 지 수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새로운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

또 하나, 토론극 형식의 본 공연에 대해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바로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것의 미덕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다는 점이다.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을 스스로 약함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지는 않나 반성할 때다. 내 말을 하면 뇌 속의 도파민이 폭발한다. 그러므로 내 말만 하는 것은 너무나 즐겁고 중독적이다. 한마디로, 쉽다. 반대로 남의 말을 끝까지 들으려면 진정한 힘이 있어야 한다. 듣는 자가 진짜 강자다. 2024년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에게도 <고트> 속 공청회처럼 남의 말을 경청함으로써 사회적 합의의 이르는 과정이 당연해지는 날이 오기는 올까.

 


 

  • 무료정기구독을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메일을 보내주세요.
  • 리뷰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원고를 보내주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