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두산아트센터 <애도의 방식>

글_홍혜련

 

어느 날 갑자기 폐공사장에서 내 아이가 죽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다른 아이가 있었다. 도대체 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 아이는 분명 알고 있을 텐데 그 아이는 도대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 아이의 장례식에 온 아이들 중 어떤 아이가 뱉듯이 하고 간 그 말이 가슴속을 파고든다. 살아 있는 그 아이는 죽은 내 아이와 친구 같은 그런 거 아니라고, 내 아이가 그 아이를 줄곧 괴롭혔다고. 그럼 내 아이의 죽음에 그 아이가 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엄마의 가슴은 타들어 간다.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안보윤 작가의 연작 단편 세 편을 묶은 두산아트센터 제작, 신진호 연출의 <애도의 방식>은 가해와 피해 사이의 경계가 실은 흐릿함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완전한 사과>. ‘가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소윤은 집안에서만 개새끼였는데 만인이 다 아는 개새끼가 되어 버린 오빠 탓에 다니던 학교에서도 해고되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사 가 새 출발을 하려 한다. 소윤은 밥벌이를 위해 동주라는 한 아이의 하교를 돕는 일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동주가 승규라는 아이에게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승규와의 욕하기 게임에서 이겨서 승규의 정강이를 ‘딱 한 번’만 시원하게 걷어차 주는 게 소원이라는 동주를 위해 소윤은 친구의 딸에게 부탁해 욕을 녹음해서 동주에게 준다. 그러다 결국 동주 엄마에게 이 사실을 들키고 해고되고 만다. 동주의 엄마는 그저 ‘가만히’ 아무 반응도 하지 않으면 다음 타깃으로 넘어갈 거라고, 그러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한다.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애도의 방식>. 시간이 흘러, 동주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동주는 고속버스 터미널의 꼭 찻집만은 아닌 찻집에서 일한다. 그곳에서 두 사람이 터미널 매표소에서 일하는 아저씨에 대한 소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고받는다. 아저씨의 아들이 바로 이곳 터미널에서 버스에 치여 죽었다고, 그 덕에 일자리를 얻어 일하게 되었다고, 어쩌면 아들이 죽은 곳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 당최 알 수가 없다고.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멀쩡하게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아저씨의 아들을 죽이고, 그저 자기 일터에서 일하고 있을 뿐인 아저씨를 아들의 목숨과 일자리와 바꾼 파렴치한으로 만든다. 그렇지만 이런 말을 주고받는 사람들 역시 그저 찻집 한 구석에서 매일 마늘을 까는 할머니, 매일 마주쳐도 이상할 것 하나 없는 평범한 이웃에 다름 아니다. 그곳, 찻집에서 알바 중인 동주에게 반갑지 않은 손님이 자꾸만 찾아온다. 어린 시절부터 내내 자기에게서 떨어지지 않던 승규의 엄마다. 승규가 죽었는데 이제는 승규의 엄마가 자꾸만 찾아온다.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딱 한 번>. 돈까스 가게를 운영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미정과 석현은 그날도 아들 승규를 위해 돈까스를 잔뜩 구워 놓았다. 그렇지만 승규는 돈까스를 먹지 않고 친구를 만나러 밖으로 나간다. 그러고는 폐공사장에서 떨어져 죽는다. 승규와 같이 있었다는 동주는 분명 뭔가 알고 있을 텐데 아무 말도 해 주지 않는다. 미정은 남편 석현과 함께 승규가 그렇게 좋아했다는 불닭볶음면에 핫소스를 뿌려서 먹어 본다. 미정의 목구멍이 타들어 간다.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가해자의 사연을 들여다보는 일은 당혹스럽다. 가해자가 괴물이 아니라 그저 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세상 살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 가해자는 가해자, 피해자는 피해자, 흑은 흑, 백은 백, 세상이 이렇게 명명백백하다면 참으로 쉽고 편하련만… 그러나 실상 세상은 찬란한 회색의 스펙트럼이다.

누구나 저마다의 괴물을 속에 안고 살아간다. 그런 괴물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 수 있다면 어쩌면 그것이 행복한 삶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르고 살 수는 있을지언정 내 안에 괴물 따위는 없다고 자신하며 단정 짓는다면 기만에 불과하다.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때로 좋은 연극은 무대와 객석 사이의 장막을 찢고 나와 관객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낸다. 이 상처를 통해 비로소 내 안의 괴물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괴물을 달래고 얼러, 회색의 세상에서 살아나갈 힘을 키운다. 무대를 통해 나를 발견하기. 그걸 위해, 또다시 상처받기 위해 극장으로 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승규 엄마가 동주를 계속 찾지 않았다면 동주는 승규를 꿈에서도 보지 않고, 벌써 잊어버렸을까? 동주는 승규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는 것일까? … 질문이 자꾸만 이어져 가슴을 옥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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