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삼일로 인큐베이팅 팩토리 <비타민D> <개 짖는 소리> <광인 일기>

글_수진(연극평론가)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는 역할 놀이로 체험하는 미디어와 대중의 폭력성

극단 전원 <비타민 D>

공연장 입구에서 티켓을 받고 당황했다. 공연 중간에 내가 해야 할 미션(?)이 티켓 뒤편에 구체적으로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이 공연은 처음부터 관객에게 작품 안에서의 명확한 역할을 요청했다. 물론 그 요청에 응할지, 거리를 두고 공연을 관람할지는 관객이 선택할 몫이었다. 그동안 ‘관객참여형’ 또는 ‘이머시브(Immersive)’라는 형식을 언급하며 공연된 다양한 작품들이 있었다. 그러나 공연을 보고 극장을 나설 때에는 늘 의문이 남았다. 이 공연에 관객은 어떻게 참여를 했는가. 의문의 출발점은 늘 공연 속 관객의 역할 유무에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극단 전원의 <비타민 D>(2024.09.12.~15 삼일로창고극장, 구지수 작, 김상윤 연출)는 극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관객에게 명확한 역할을 부여한 의심할 여지없는 ‘관객참여형’ 연극이었다.

극장 안쪽에 들어서면 객석이 따로 구분 되지 않은 무대에 하나의 구조물이 보인다. 철제 프레임에 불규칙하게 비닐이 둘러싸여 있는 형태이다. 얼핏 보면 비밀하우스 같기도 하고, 동물원의 우리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안에 한 여자가 있다. 종종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조금씩 움직이지만, 그녀에게서 삶의 의지나 생기는 찾아볼 수 없다. 좁은 공간에 갇힌 듯 보이는 그녀는 작품의 주인공 최하나 PD이다. 그녀는 전염병으로 어린 딸을 잃은 슬픔과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에서 시작된 대중들의 폭력적인 시선에 갇혀버렸다. 구조물 좌측에 위치한 모니터 화면에는 대중들이 실시간으로 오픈 채팅방에 공유하는 최하나의 사진이 빠르게 지나간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에서 비롯된 폭력적인 언사들도 보인다. 무대 정면에는 진위 여부가 명확하지 않은 언론의 뉴스 영상 및 기사들이 투사된다.

<비타민 D>는 코로나19가 지나가고, 또 다른 전염병 X가 창궐한 세상을 그린다. 어느 날 기후와 환경 문제를 다룬 방송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얻은 최하나 PD의 딸이 X에 감염되어 사망한다. 언론은 국내 10세 미만의 확진자 가운데 처음 나온 이 사망 사례에 주목한다. 그리고 사망의 원인을 최하나 PD의 채식주의 탓으로 몰아간다. 선천적으로 약했던 아이에게 채식생활을 하게 해서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근거 없는 이 보도 때문에 최하나는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대중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된다. 결국 몰려드는 미디어와 사람들 때문에 일상마저 불가능하게 되고 집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자신을 전적으로 믿고 지지해 주던 가족과 동료마저도 그녀를 보호해 주지 못한다. 오히려 또 다른 상처를 남길 뿐이다.

<비타민 D>는 일반적인 공연 관극에서 허용되지 않는 행위들이 자연스럽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다. 휴대폰을 끌 필요도, 주어진 자리에서 부동의 자세로 공연을 볼 필요도 없었다. 반대로 공연 중에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사진을 찍고, 그 사진들을 오픈 채팅방에 업로드 하고, 배우에게 말을 거는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했다. 이는 관객이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공연을 관람하는 ‘관객’에서 공연 속 ‘등장인물’로 역할이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공연은 관객에게 무책임한 미디어와 무분별한 대중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관객이 작품의 주제를 직접 체감하게 했다. 공연을 더 깊이 알고 싶은 적극적인 관객일수록 더 높은 강도의 폭력적인 시선으로 최하나에게 다가가는 가해자가 되는 셈이었다. 공연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관람하기 원하는 관객마저도 공연의 특성상 미디어와 대중들의 폭력을 용인하는 방관자라는 또 다른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비타민 D>는 미디어와 대중의 폭력성을 관객참여형 공연의 형식으로 매우 직관적으로 풀어냈다. 관객에게 주어진 미디어와 대중의 역할은 마치 게임에서 미션이 주어지듯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물론 그 미션을 관객이 수행하지 않을 경우의 차선책도 배우들에게는 마련되어 있었다. 때문에 미션을 부여받은 관객이 주어진 대사나 행위를 하지 않더라도 극이 진행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중간에 등장하는 인물이 배우인지 관객인지 순간적으로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배우도 관객과 동일하게 무리 사이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객은 그들이 진짜 배우인지, 연기를 능청스레 하는 관객인지는 커튼콜에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오픈 채팅방에 올라오는 사진과 멘트들도 오롯이 관객이 공유하는 것인지, 어느 정도 배우들의 개입이 있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이는 관객이 여러 상황을 추리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관객 누구든 최하나처럼 미디어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될 수 있음을 의미 상황이기도 했다. 관객은 극장에 들어서는 최소한의 행위로 이 모든 상황을 직접 목도하고 체험할 수 있었다.

이처럼 <비타민 D>는 작품의 주제와 공연의 형식이 절묘하게 매치되어 빛을 발했다. 관객에게 공연에 직접 참여하는 즐거움을 선사함과 아울러, 선택의 여지없이 주어지는 역할 놀이를 통해 미디어와 대중의 폭력성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 다만, 공연 속에서 ‘비타민 D’의 의미가 공연의 주제를 상징화하기에는 다소 약하지 않은가 싶다. 이 공연의 주제와 형식처럼 의심할 나위 없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제목이 있지 않을까.

 

 

전쟁 같은 현실 속 연대조차 불가능한 이들의 소리

프로젝트 사이 <개 짖는 소리>

 

소리는 낸다는 것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현대 사회는 각자의 소리를 내는 것이 자유로운 만큼, 넘쳐나는 소리들 때문에 간과되고 묻히는 소리 역시 허다하다. 특히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에서 사회적 약자의 소리는 아무리 몸부림치며 목청을 높여도 쉽사리 사람들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프로젝트 사이의 <개 짖는 소리>(2024.09.26.~29 삼일로창고극장, 이민구 작/연출)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 정착하기 위해 소리를 높이는 청년 세대의 전쟁 같은 삶을 조명한다.

<개 짖는 소리>는 자기 몸 하나 누울 곳 없는 하준, 마람, 유영 세 사람을 통해 이 시대 청년들의 주거불안 현실을 켜켜이 담아낸다. 주인공 하준은 전세사기로 집을 잃고 고시원도 아닌 그 앞 개집에 살고 있다. 그는 사기범을 찾기 위해 전직 기자였던 춘식과 함께 헤매지만, 돈을 돌려받을 수 없는 현실을 깨닫는다. 전쟁 중인 나라에서 탈출해 한국에 온 마람은 잘 곳을 찾다 하준의 개집까지 오게 된다. 그녀는 동물원 코뿔소의 뿔을 잘라 돈을 벌기로 결심하고, 이에 하준이 동행한다. 하준의 여자 친구 유영은 첼로를 전공하는 학생이었지만, 갑자기 치솟은 전세금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건설 현장에서 일한다. 하준과의 소박한 미래를 꿈꾸기도 했지만, 그럴 의지가 없어 보이는 하준에게 지쳐 그를 떠난다. 이 세 인물은 국적, 성별, 처한 상황이 서로 다르지만, 안정된 보금자리가 없는 현실,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현실은 동일하다.

이들의 절망적인 현실은 가장 먼저 무대의 이미지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공연은 삼일로창고극장의 일반적인 무대와 객석 위치를 바꿔, 극장의 난간과 계단 등 기본 구조를 충분히 활용하여 입체감을 살렸다. 무심코 걸쳐둔 것 같은 테이프와 그물망, 안전모 등은 폐허가 된 공사장의 현장감을 살려주었다. 반면 무대 중앙에 크게 자리 잡은 파란 천막이 씌워진 철제 구조물은 상징적인 공간에 가까웠다. 그 공간은 기본적으로 하준이 생활하고 있는 개집이지만,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모든 공간을 의미했다. 공연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공간은 철저하게 분리 해체되었다. 이는 인간 이하의 삶, 최소한으로 누릴 수 있었던 공간마저 빼앗긴 청년 세대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며 여운을 남겼다. 이처럼 <개 짖는 소리>는 사실적인 배경에 추상적인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하여 맨 몸으로 세상에 던져진 청년 세대의 극한의 위기를 보여주었다.

<개 짖는 소리>에는 전쟁에 대한 언급이 계속된다. 하준과 함께 전세사기범을 찾아다니는 춘식은 할아버지에게 들었다는 전쟁 이야기를 끊임없이 일방적으로 뱉어낸다. 실제 전쟁터에서 온 마람도 자신이 경험한 참혹한 실상을 공유한다. 심지어 전쟁과 무관해 보이는 하준 마저 군대 훈련에서 경험한 일을 고백한다. 이들의 전쟁 이야기는 단순히 물리적인 폭력과 그로 인한 참혹함을 드러내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 공연은 전쟁의 공포로 인한 인간성의 상실, 그로 인한 인간 존엄성의 파괴를 이야기한다. 전쟁 영웅이었다는 춘식의 할아버지는 사실 부하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혼자 살아남았으며, 마람은 인간 폭탄이 되어 트럭에 실려 가는 동생을 보고 홀로 도망친 사람이었다. 하준 역시 지뢰가 폭발해 죽은 부하를 북한군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던 기억을 안고 있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거나, 타인의 희생을 방관한 사람들이다. 전쟁은 불가피하게 인간다움을 상실시키고, 그로 인해 타인의 존엄성을 파괴시킨다. 바로 이러한 전쟁의 속성이 하준을 비롯한 젊은 세대가 처한 시대적 상황과 닮아 있다. 때문에 이들의 연대는 성공하기 어렵다.

하준은 자신의 처지가 넉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체류자인 마람에게 개집의 한 켠을 내어준다. 그리고 마람의 바람대로 코뿔소 뿔을 자르러 동행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좁은 주거 공간을 공유하며 맺어진 연대는 마람을 찾으러 온 여자 앞에서 끊어진다. 하준은 포상금을 위해 마람을 더 이상 숨겨주지 않는다. 그리고 마람이 난민 지위를 획득해 자택을 받게 된다는 말에 분노한다. 동물 사체 소각장에서 만난 학생 보민도 마람에게 BTS 열쇠고리를 건네며 호의를 베풀지만, 포상금을 받기 위해 마람을 고발한다. 보민 역시 텐트 같은 집을 빌려 사는 자신의 처지가 그 누구보다 절박했기 때문이다.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자기 앞에 놓인 문제의 무게는 절대적이다. 때문에 순수한 목적에서 지속적으로 타인과 연대하거나 돕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 세대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당면한 가장 큰 사회 문제이다.

공연은 하준이 춘식의 구령에 맞춰 개 짖는 소리를 내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전까지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 있음을 외쳤던 하준은 이제 마지막 남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내려놓고 또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과연 하준의 소리는 이제 세상에 닿을 수 있을까. <개 짖는 소리>는 표면적으로 청년 세대의 주거 불안정 문제를 보여주지만, 이면에 취업, 결혼, 연대, 전쟁, 난민, 미디어 등과 관련한 사회 전반의 다양한 문제의식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장점일 수도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모호해지는 단점이 될 수도 있다. 좀 더 궁극적인 주제에 방점을 둔다면, 이 공연이 외치는 소리가 더욱 관객에게 잘 도달하지 않을까.

 

죽어 있는 오브제가 담아낸 살아 있는 인간의 열망과 한계

공연창작소 숨 <광인 일기>

 

무대 정면의 위쪽에 이불을 덮고 있는 한 남자가 매달려 있다. 사람일까, 인형일까. 이미 극장에 들어서자마자 한 구석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실제 사람과 유사한 인형을 접했기 때문에 의문은 커져갔다. 관객들이 바퀴 달린 등받이 없는 의자에 자리를 잡은 뒤에도, 공연 시작 까지 꽤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공중에 매달린 존재는 미동조차 없었다. 인형인가. 아니, 사람이었다.

<광인 일기>(2024.10.03.~05 삼일로창고극장, 이주영 작, 정욱현 연출)는 이처럼 제목 속 광인으로 예상되는 주인공과 호기심 가득하게 만나며 시작된다. 광인은 하루하루가 두발이 허공에 떠 있는 채로 공중에 매달린 것처럼 불안정하고 힘겨운 미취업 청년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 ‘남들처럼 사는 것’이다. 세상이 인정하는 그럴싸한 대기업에 들어가 당당하게 어깨 펴고 살아가는 것, 가족에게 자랑스러운 아들과 오빠가 되는 것, 더 이상 부모님과 여동생에게 손 벌리지 않는 것, 먹고 싶은 치킨을 맘 편히 사 먹으며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것. 그러나 광인에게 ‘남들처럼 사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는 입사 시험에서 번번이 미끄러지고, 지지해 주던 가족들도 이제는 자신을 한심하게 여긴다. 끊임없이 세상에 속하고자 하는 광인은 계속되는 실패로 세상이 아닌 이불 속으로만 파고든다.

<광인 일기>는 몇 가지 오브제를 활용하여 현대인과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상징적으로 담아낸다. 특히 이불은 가장 주된 오브제로, 주인공 광인과 다른 사람들의 차이를 이미지로 보여준다. 사회에서 거절당해 이불을 둘둘 감고 숨어드는 광인의 모습은 언뜻 누에고치를 연상시킨다. 언젠가 하늘을 나는 나방이 되길 꿈꾸는 존재. 그러나 매번 고치를 뚫고 세상으로 나와도 그의 비상은 실패한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이불 속으로 홀로 침잠한다. 광인에게 이불은 자신의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의 도피처이자, 결국은 벗어던지고 탈출해야 할 고치이다. 다섯 명의 앙상블 배우들도 각자의 이불을 가지고 있다. 광인의 이불과 차이점은 다른 앙상블 배우의 이불과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연 중 다섯 명의 이불이 연결되어 거대한 하나의 존재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다른 사람과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은, 그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앙상블 배우들은 이불을 입고 벗으며 불특정 다수의 군중이 되기도 하고, 광인의 가족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이불을 다른 물건을 대체하는 소품으로 가볍게 활용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이불은 사회에서의 인정이고,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하나의 도구이다.

공연은 이불 외에도 인형과 프레임만 존재하는 큐브를 활용하여 광인과 세상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극장 입구에서 관객을 맞이한 인형은 광인의 얼굴과 똑같은 모습이다.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배설을 해야 하는 살아있는 인간과 동일한 모습이지만, 죽어 있는 존재. 인형은 어떤 상황에도 고정된 표정을 바꿀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영원히 정지해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광인은 공연의 후반부에서 이 인형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인간인 자신은 계속해서 실패하고 이불 속으로 빠져들지만, 자신의 얼굴을 한 인형은 자유롭게 비상하길 바라는 간절함이 광인의 몸부림에 담겨있다. 광인과 달리 앙상블 배우들은 철제 프레임으로 만들어진 큐브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많다. 프레임만으로 만들어진 큐브는 형체는 있지만 속이 비어있다. 이는 마치 현대인들이 세상이 규정한 프레임 안에 존재하려는 열망은 가득하지만, 정작 내면은 공허하고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처럼 <광인 일기>는 죽어 있는 오브제에 살아 있는 인간의 열망과 한계를 담아낸다.

수시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연기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배우 개개인이 관객을 사로잡는 연기와 움직임의 온도는 그 어떤 작품보다 높았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절규하는 광인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비극적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무작정 함께 탄식하고 공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공연 전반을 통해 그려진 광인의 캐릭터가 다소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공연 속 광인의 모습은 남들처럼 살고는 싶지만, 그들처럼 노력하지는 않는, 세상의 흐름에 적절히 편승하기 원하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그의 좌절이 설득력을 얻지 못했고, 오히려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다. 이는 각각의 이야기와 광인의 캐릭터가 평면적이고 가볍게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좀 더 유기적인 이야기의 구성과 입체적인 캐릭터 구축을 통해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명징한 공연으로 돌아와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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