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박효선연극상 수상자 인터뷰
지정남 <환생굿>
“분명 거기에 있었던, 누군지도 모르고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만들고 싶다”
인터뷰 일시: 2024년 10월 28일
인터뷰 장소: 카페 플로르
인터뷰어: 한재섭(광주독립영화관장, 제2회 박효선연극상 심사위원)
안녕하세요, 지난 9월 21일 제2회 박효선연극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수상 이후 잘 지내셨나요?
지정남(이하 지): (웃음)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저는 박효선연극상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이 기억에 남습니다. 선배들 덕분이었다는 이제야 철이 든다는 말이 저에겐 지역에서 연극을, 마당극을 꾸려나가는 선후배들에 대한 감사함이란 생각이었습니다. 그 때 못다한 수상 소감이 있다면 해주세요.
지: 수상 이후, 상의 무게감을 점점 더 크게 느끼고 있어요. 1980년 5월 도청의 마지막 밤을 지켰던 분들과 항쟁에 함께한 여성들, 그리고 항쟁 이후 오월의 정신을 멈추지 않고 꾸준히 마당극을 해 온 선배들이 다시 한번 너무 대단하고 감사하게 느끼고 있어요. 예전엔 좀 선배들한테 삐딱했는데 그 시절 나라면 선배들만큼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고 오십 넘어 철이 들었구나 싶드라구요.
또, 상을 받고 저를 돌아보니 제가 놀이패 신명에 입단해서 마당극을 하면서 오늘 이 자리에 있는데, 놀이패 신명은 518 때문에 만들어졌잖아요. 그럼 지정남이란 배우는 오월의 시민들 덕분에 태어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광주에서 박효선연극상 수상작들이 공연될 수 있도록 여러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광주시민뿐만 아니라 광주로 오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박효선과 박효선의 연극 그리고 광주를 알릴 수 있잖아요. 마침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광주를 기억하러 오는 분들이 많을 테고요.
박효선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많으시죠?
네, 저는 마당극을 하는 놀이패 신명에 1993년에 입단했어요. 박효선 선배님은 공연장에서 가끔 뵈면 저에게 잘한다고 늘 응원해주시던 선배님이셨어요. 토박이 단원들에겐 엄격하고 완벽주의자였다고 알고 있는데 어린 새내기 후배들한테 선선한 바람처럼 다정한 분이셨어요.
이번에 수상한 1인극 <환생굿>은 새내기 무당 고만자가 능주 씻김굿을 배우는 과정으로 시작합니다. <환생굿> 창작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놀이패 신명에서 2012년엔가 단원들 역량 강화 과정으로 윤진철 명창께 진도 씻김굿 소리를 배운적이 있어요. 하도 못한께 선생님이 ‘엿장수 목구멍’이라고 하셨어요.(웃음) 또 역량 강화 과정이어서 단체 내부성과발표를 해야 했는데, 씻김굿 소리가 엉망이었죠. 그래서 캐릭터를 입혀서 1인극처럼 했어요. 그때, 지금의 고만자란 캐릭터를 얻었지요. 놀이패 신명의 <만자굿>에서 고만자는 윤색과정에서 다른 인물이 되었지만요.
그러다 2019년에 서울대 여성 청소노동자가 에어컨이 없어 사망한 사건을 보고 5·18 당시 여성들의 죽음과 연결해서 2022년에 1인극으로 <미화(美花)>(지정남 연출)란 작품을 했죠. 그때부터 있어도 없는 존재에 대한 화두가 생겼어요. 이 작품에서 <환생굿>에 등장하는 변미화란 캐릭터가 나왔는데 공연을 본 분들이 “지정남답지 않게 너무 어둡다”고들 하신거에요. 저야 신명에서 안 했던 것, 못 했던 것을 도전했지만 평도 그렇고 실제 <미화>를 올리면 몸살을 심하게 앓았어요. 그래도 이 여성들의 이야기를 계속 하고 싶었어요. 굿을 해보자. 그래서 화순 능주에서 봤던 조웅석 선생님께 전화했더니 바로 오라고 하시드라구요. 씻김굿 배우기에 진도보다 화순이 거리상 더 가까운 것도 좋았어요. (웃음)
이미 고만자와 변미화란 중요한 인물들이 10년 전부터 준비되어 있었네요.
제 핸드폰에 항쟁 마지막 밤 이후 시신 수습과정에서 도청 복도에 길게 그려진 피사진이 있어요. 그리고 한강 『소년이 온다』의 소년인 문재학 열사 사진이랑. 그러다 여성들이 매달 내보내는 생리가 생명을 키워내는 피와 연결되었고 실제로 518자유공원이 된 상무대 유치장에 생리대 투쟁과 관련해 딱 한 줄이 있는데 거기서 오월과 여성을 결합시킬 수 있는 상상력을 구체화할 수 있었습니다.
왜 씻김이 아니라 환생일까요?
우리가 518, 세월호, 이태원 참사를 겪으며 기억하자는 말을 많이 하는데 기억이란 게 그 사람들을 다시 이 자리에 불러내는 게 아닐까, 환생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극작에 속도가 엄청 붙었어요. 현재를 사는 518 당시 ‘황금동 아가씨’였던 김윤희가 청소노동자로 살다가 쓸쓸하게 죽은 변미화를 지금 여기로 데려오자. 그럴려면 무당, 잘하는 무당 말고 안되는 것을 하려는 무당을 세우자. 그래서 서로를 만나게 하자.
오월과 여성은 늘 함께 하는 것이네요.
저도 여성이고, 광주에서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광주여성영화제 등에서 많은 여성들을 만나게 되었어요. 2023년부터 항쟁 기간 계엄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증언도 나오기 시작하구요. 물론 다음엔 남성들도 다룰 거에요. 꼭 남성, 여성이 아니라 사라져 버린 존재들, 항쟁에 참여한 넝마주이, 고아들처럼 그 사람이 분명 거기에 있었는데 누군지로 모른 채 사라져 버린 사람들을 찾아내고 다룰 예정입니다.
사라져 버린 사람들의 증언의 공백을 배우님의 마당극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계속 찾아 볼라고요. 광주에 살면서 『소년이 온다』를 어떻게 안 읽었겠어요. 거기서 모티브를 받아 실제 도청 내부를 이동하면서 하는 공연을 올렸어요. 2019년에 <오월공명>이라고. 윤상원 열사의 외신 기자회견, 오늘 죽을 것이니 쌍방울 새 속옷으로 갈아입었던 시민군, 소설에서 동호로 나왔던 문재학 열사가 친구가 죽었는데 어떻게 나만 나갈 수 있냐며 어머니와 나눈 대화들을 도청 2층, 민원실 지하 식당, 마당, 정문 등 관객들과 함께 이동하며 항쟁의 이야기들을 재연했어요. 그때 문재학 열사 어머니인 김길자 선생님이 ‘내 아들 기억해 줘서 고맙다’며 안아주셨어요. 계속 했으면 좋았을 것을 많이 아쉬워요. 예산이 생긴다면 매년 5월마다 꾸준히 해보고 싶어요.
<환생굿>의 반응도 궁금해요. 서울, 대구, 부산, 청송, 진주 등 이미 여러 곳에서 공연하셨습니다.
부산에선 제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났어요. 공부 잘하고 끼도 많더니 결국엔 해냈구나 하더라구요.(웃음) 청송에선 홍콩에서 온 20대 여배우가 공연 끝나고 정말 서럽게 우는데, 홍콩 민주화 시위 때도 그랬다고, 학교가 봉쇄되니 생리대가 없어 겪은 수치스러움들, 또 투쟁 이후 끌려가고 사라진 친구들 생각에 손을 벌벌 떨며 울드라구요. 언젠가 홍콩민주화시위에 대해 작품으로 마음껏 할 수 있는 날이 올 테니 힘내자고 서로 안았는데 그 친구 얼굴이 생생해요.
저도 공연 보며 황정은의 『디디의 우산』이 바로 생각나더라구요. 서울은 어땠어요?
이게 이태원 참사를 보며 더이상 미루지 말자고 했던 작품이에요. 마지막에 이름을 부르는 장면에서 이태원 참사 때 죽은 친구 이름을 불러 주는 것 같아서 고맙다는 20대 여성분이 있었어요. 또 세월호 엄마도 오셨서 깜짝 놀랐는데 고맙다며 손잡아 주고 가셨어요. 그때 광주 관객들보다 더 많이 우시는 것 같았어요. 눈물의 색깔이 다르게 느껴지드라구요. 너무 가까웠던 참사고, 진짜 왔으면 하는 바람의 눈물 아닐까 싶었어요.
국가폭력만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진 사람들을 다시 되불러오는 연극인 것 같아요. <환생굿> 만들며 주의한 점이 있나요?
피해자로서만 피해자다움으로만 보이지 않게 하는 것. 우리는 그때 사람으로서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게 왜 죄가 되냐. 사람다움이 무얼까 그것에만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1인극이라 신명의 공동작업과 다를 텐데요. 1인극으로 작품을 만든 이유가 있을까요?
일단 이런 내면적인 이야기를 하기에는 1인극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공동작업으로 가면 인물의 가족이나 여러 배경이 등장하는데 마음이 계속 바뀌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줄 형식은 1인극이라는 생각이에요. 또 정말 작품과 내가 내밀해지려면 연습이 많이 필요한데 갈수록 배우들끼리 일정 맞추기가 힘들어지고 있거든요. 지금은 재일교포 연극인 김기강 대표랑 2인극을 준비하고 있어요.
1인극이라 대본, 연기만이 아니라 연출까지 해야 되는데 자신의 공연을 어떻게 객관화하면서 연습을 했을까요?
1년 동안 거의 매일매일 혼자 연습을 했어요. 공연 비수기인 겨울에 신명 연습실 빌려서 연습하는데 히터를 안 틀고 해도 땀이 뻘뻘 났어요. 그렇게 안 하면 그분들에게 다가가기 힘들겠다, 그러다 어떤 날은 혼자 울고만 와요. 또 거울 보면서 미화야, 윤희야 부르다 울기도 하고. 이런 내밀한 작업은 여럿이 하긴 힘든 것 같아요.
공연이 50분인데 핸드폰으로 촬영을 해서 2번을 하면 집에 와서 다시 분석을 해요. 그럼 기본 4시간은 족히 걸리거든요. 눈빛 손짓 동선 이런 것을 1년간 계속 보면서 나에 대해, 또 배우라는 나에 대해 객관화가 계속 됐어요. 그러다 공연 2~3달 전에 악사와 함께 연습을 하고 드라마트루그 선후배들 모시고 시연을 해서 또 고쳤어요. 역시 중요한 대목은 그 분들이 다 집어주시드라구요. 전 저를 잘 안 믿어요(웃음)
굿이나 제사, 장례식은 마당극에서 자주 쓰입니다. 우리 현대사의 죽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겠지만 익숙하다는 것도 사실이에요.
죽음과 삶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죠. 또 오월의 죽음은 스스로 결정한 것이고 세월호참사나 이태원참사, 오송참사는 다르죠.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명예를 회복시켜야 되는데란 생각이 늘 있으니 그런 형식이 자주 쓰이는 것 같아요.
또 같은 씻김굿이라도 어떤 과장을 어떤 인물이 등장할 때 어떻게 달라질까 하는 궁리에서 계속 재해석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맨날 먹는 밥상을 밥 있고 국있지로만 생각하면 그냥 반복이겠지만 현미냐 쌀이냐 된장찌개냐 김치찌개냐에 따라 또 누구랑 함께 먹는냐에 따라 밥상의 성격이 달라지잖아요.
<환생굿>은 배우님께 어떤 작품인가요?
신명 작품을 아는 분들은 <언젠가 봄날에>(박강의 연출)의 늙은 무당 박조금 역을 기억해줘요. 2010년 5·18 30주년 작품입니다. 초고 대본에는 무슨 둥둥 떠다니는 정령이었는데, 그러면 사람들이 공감을 못하겠다 싶드라고요. 지금 여기 사는 사람으로 만들자 해서 제가 인생사와 대사를 직접 쓰고 만든 인물이예요. 박조금은 518을 관객들과 가깝게 밀착시켜준 인물이었어요.
근데 <환생굿>은 배우 이전에 시민으로서 연대한다 이런 추상적인 말로도 설명이 안되고 1인극이니까 내 예술성을 드러내겠다 이런 것도 아니고, 공연 내내 관객들과 직접 손잡고 어깨동무를 하게 해주는 작품 같아요. 근데 만들 때 정말 그냥 막, 막 하고 싶어서 막 안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끝까지 가봐얄 것 같아서 올린 작품이에요.
지금 배우님의 ‘막’이란 말이 지금 이 자리에서는 훅 다가오는데, 글로 읽는 독자에게는 좀 더 풀어서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죽은 사람 산 사람을 막 만나고 싶다 그런 걸까요?
여차저차 재지 말고 만나게 해주고 싶다, 이 죽음들, 황망하게 떠나버린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 그런 마음이랄까요. 나도 오월의 마지막 날 사람들을 한 번 진짜 만나 물어보고 싶어요. <환생굿> 마지막에 ‘마음 속에 품은 그분도 모셔주세요’ 하면 관객분들의 분위기가 또 달라져요.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들,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할머니가 환생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꽃을 놓으셨다고 하드라고요. 누구든 내 기억 속에서 한 사람씩은 다 있잖아요.
늦여름에 올린 신명 정기공연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 원작)도 연출이에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극작이나 연출과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배우로서 간극은 없나요?
배우, 극작, 연출 다 어려워요. 특히 연출 어려워요.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하고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물어보죠. 배우로만 참여할 땐 나름 캐릭터 연구하고 연습해서 연출을 설득하는 과정이 재밌거든요. 근데 연출은 배우들을 설득해내는 과정들, 또 지금 세대와 한국현대사에 대한 경험들이 다르니 그게 힘들었어요.
배우, 극작, 연출을 다 하다보니 내 안에서 서로 타협하고 싸우고 그래요. 세 역할이 내 머리속에서 동시에 움직일 때도 있드라고요. 재미있는 건 극작과 배우인 것 같아요. 그래서 메모를 많이 해 둡니다. 평소에 오월 어머니들이나 세월호 엄마들한테 들은 말들을 수첩에 다 적어놔요. 전라도 어매들의 기맥힌 말씀들도 다 적어놔요. 그러면서 캐릭터 만들 때, 작품 만들 때 꺼내 쓰는 거죠. 연출 기법(?) 이런 것 물어보면 별 할 말이 없어요. 정말 끝까지 막! 막! 한 거지.(웃음)
이렇게 막 해야 직성이 풀리는 마당극과는 어떻게 접속하신 거예요?
열일곱살, 1988년에 광주에 왔어요. 여상 졸업하고 <환생굿>의 변미화처럼 방직공장, 양말공장, 어묵공장, 장갑공장, 비닐공장, 샤시공장을 다녔어요. 그러다 양말공장에 제가 고졸로 들어갔어요. 공장직원 상당수가 중졸 정도였는데 고졸이라고 영업직으로 전근을 내서 7개월 넘게 아침마다 복직 투쟁을 하다 광주 운동권에서 저를 신명에서 일해 보면 어떻겠냐 해서 들어갔죠. 신명에 출근하니 너무 좋았어요. 복직투쟁 정말 힘들거든요.(웃음)
올해가 마당극 배우 데뷔 30주년이네요.
처음 한 마당극이 투쟁 현장 작품인데 1994년에 <쌀방랑소고>예요.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투쟁을 하는 농민들과 연대하는 작품인데 해남장터에서 공연했어요. 제가 쌀탈을 뒤집어쓰고 칼로스 쌀과 복싱을 하다 쓰러지는 장면이었어요. 하필 차디찬 고랑물에 쓰러져 있는데 나이 지긋하신 아부지가 저를 일으켜 세우며 너를 내가 칠 십 평생을 어떻게 키웠는디… 인나야… 니 씨러지믄 안되아 하며 서럽게 우시는 거에요. 어쩔 줄 몰라 따라 울면서 탈 틈으로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쩍쩍 갈라진 큰 손, 그리고 아부지 코에 맺힌 눈물 콧물이었어요. 저희 엄마도 농사지었고 저도 노동자였고 큰집 형제 중에 장애인이 있고 그리고 여성이잖아요. 농민, 노동자, 장애인, 여성, 부모 등 자연스럽게 관심 가고 그들의 처지를 조금은 알고 있는 상태죠.
아까 2인극 준비하신다는데 앞으로 배우님이 환생시키고 싶은 잊혀진 존재들은 누굴까요?
5월 어머니들 한분 한분의 일상을, 정말 개인적인 이야기를 계속 작품으로 끄집어내고 싶고요. 민주광장의 어머니 모습뿐만 아니라 안방에서 어머니들은 어떻게 생활하시나. 우리 엄마랑 똑같구나,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준비하고 있는 2인극에서는 강제징용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고요. 두 할매가 나옵니다. 남편은 한 사람이예요. 두 할매는 각각 일본과 한국에서 살고 있어요. 그 두 할매가 남편의 제삿날 만난다는 이야기인데요. 두 할매를 통해 잔인한 역사를 통과해온 어머니들 삶을 이야기 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마당극이 많이 소극장에 맞춰지고 있어요. 열악한 지역에서 활동하는 마당극 배우로서 어떤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개인적으로 마당극을 지향해요. 조명도 안 쓰고 싶고. 제가 신명 들어올 때가 핀마이크로 넘어가는 과도기였어요. 목 터져라 마당판이란 원형 공간에서 바닥도 맨 바닥에서 했던 마지막 세대인 것 같아요. 지금은 저희들도 무대 삼면에 익숙하고 몸 쓰는 것, 공간 장악하는 것들이 달라졌죠. 그런데도 당시 선배들이 투박하지만 묵직한 힘과 표현이 있었죠. 세련이란 이름으로 많이 부드러워졌지만 잘 되살려 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환생굿>을 또 지정남이란 배우를 만날 관객들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박효선연극상 심사위원들이 말씀해주신 ‘지금, 여기’란 말을 잊으면 안될 것 같아요. 제 수상이 지역의 후배들한테도 좋은 자극이 됐으면 좋겠고요. 한때는 광주란 지역이 답답했는데 30년이 넘고 나이도 오십이 넘어가니까 깊이를 채워나가는데 광주만한 곳이 없구나. 배우나 예술가들한테 광주가 겪은 일들이 얼마나 큰 자양분이고 노둣돌이 되는지 감사하고 내 복이다 싶습니다. 앞으로도 518을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계속 해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정남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노동자로 일하다가 놀이패 신명에서 연극을 시작했다. <97’ 일어서는 사람들> <꽃등 들어 님 오시면> <언젠가 봄날에> <꽃같은 시절> 등에서 공동창작, 각색, 배우로 참여했다. <꽃신> <오월공명> <미화> <환생굿> <아버지의 해방일기> 등에서는 극작(각색), 연출, 배우를 맡았다. <신얼씨구학당> <말바우아짐> <남도마실> 등 방송 진행자, <남도지오그래피> 나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518기념식 등 다양한 대중집회에서 대규모 군중을 사로잡는 인기 사회자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