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김유빈(연극평론가)
기후 위기에 대한 담론이 연극계를 비롯하여 전 세계 여러 ‘계’들의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아니, 트렌드가 된 것은 수년 전부터였던 듯한데, 근래에는 트렌드 수준이 아니라 동시대 논의의 필수요소 정도로 부상하는 중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느낄 만큼 최신 작품의 여기저기에 ‘기후 위기’가 당연한 듯 묻어 있다. <멸망의 로맨스>라는 제목에서 이미 그러한 기후 위기 이야기의 냄새를 맡았다. 지구 멸망이 반드시 기후 위기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요즘 ‘멸망’이라는 단어에서 바로 행성 충돌이나 지각 변동을 떠올리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멸망의 로맨스>는 기후 위기로 인한 인류의 멸망만을 다루지 않았다. 극 전체가 하나의 쿠키라면 여러 동시대 담론들은 마치 그 쿠키에 박힌 초코칩들과 같았다. 쿠키와 초코칩의 상성이 그러하듯, 관객들은 쿠키에 녹아든 초코칩의 맛을 자연스럽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무엇 하나 튀게 강조하지 않고 슬며시 녹여버린, 그런 작품이었다.
80여 분간의 상연 중 몇 번인가 마음속으로 ‘어? 그런 거야?’라 외쳤다.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놀라며, 깨닫는다. 첫 장면에 등장한, 어쩌면 지구의 마지막 인류일 지도 모르는 두 남녀의 극적인 만남. 이 두 사람의 로맨스일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주어지지 않고, ‘멸망의 로맨스’를 주제로 한 옴니버스 극인 듯싶은 두 번째 장을 보게 된다. 혜성 충돌로 인한 멸망이 예고된 세상에서 두 여자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첫 번째 장면과 두 번째 장면의 연결고리가 명확히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세 번째 장면으로 이어진다. 남자와, 남자가 키우는 개의 이야기를 보며 이건 또 어떤 종류의 ‘멸망의 로맨스’인가 고민하고 있을 때 드디어 전체 흐름의 본격적 실마리가 나타난다. ‘홍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의 딸이 등장하는데, ‘홍이’는 바로 전 장면에서 나온 두 여자 중 한 명이었으며, 이 이름은 첫 장면 속 여자의 엄마 이름으로 등장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비로소 이 모든 이야기가 연결되었음을 깨닫는다.
그 실마리로부터 인물들의 언행을 하나씩 더듬어 가는 과정이 생기고, 극은 한층 흥미로워진다. 1막에서 2막까지는 시간이 역행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극 중 현재(빙하기)와 과거(실제 세계에서는 지금에 가까운 시기들)을 오간다. 재난 알림 문자를 보내는 직원, 즉 ‘90자의 히어로’가 ‘홍이’의 아버지이자 2막에 등장하는 ‘남자’라는 사실과, ‘두 여자’의 방 안에 있던 AI ‘밀크’는 그 아버지가 키우던 개의 이름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슬쩍 지나치듯 등장하는 몇몇 키워드를 통해서 이렇게 저렇게 이어져 있구나, 하고 선을 이어 가다 보면 여러 가지 로맨스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가족 간의 사랑을 로맨스라 말할 수는 없으니, 다시 말하자면 거기에는 여러 가지 ‘사랑’들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다.
새로운 형태의 가족의 모습도 무심히 보여준다. 엄마만 두 명이라든가, 배우자 없이 인공 수정을 통해 임신을 한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은 지금부터 앞으로 점점 익숙해져야 할 근미래의 모습들이다. 미래 모습을 그리는 작품들에서 종종 다뤄지며, 때론 심각하게 접근하기도 하는 이 개념들을 스쳐 지나가듯 잠시 이야기하고 마는데, 어쩌면 앞으로는 ‘당연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머지않아 이것들은 심각할 필요도, 진지할 필요도, 반박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레 ‘당연한’ 모습일 것이라는.
또한, 극 전반에 걸쳐 모든 종류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연인 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반려동물과 인간의 사랑까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사랑의 형태가 모두 옳다고, 우리는 당연히 사랑을 하는 존재라고 여러 번 강조한다. 그 어떤 혼돈 속에서도 이 모든 역경을 이겨낼 원동력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 사랑의 힘이 밑받침되어 멸망의 분위기 속에 작은 희망을 품고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사랑을 찾아 나서는 두 남녀의 모습에서 막이 내린다. 그리고 “결국엔 다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야, 우린 다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라던, 개 밀크의 말이 가슴 속 깊이 남는다.
무대의 유연한 활용이 매우 돋보였다. 장면 전환 시에 암전 속에 도구들을 움직인다는 전통적 방법을 버리고 조명이 켜진 채로 전환수가 아니라 배우들이 각자의 역할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움직이며 무대를 재배치한다. 이로써 관객은 무대가 전환되는 과정에서 지루하지 않게 숨을 고를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시공간이 일그러지는 표현의 연극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장면 전환을 이렇게 극 속에 녹여 활용할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지금껏 이러한 방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처럼 자연스럽고, 관극이 끝난 이후에도 기억에 남는 전환이 있었던지. 장면을 끊지 않는 전환과 더불어 배우들의 찰진 연기도 관객이 숨 쉴 틈 없이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큰 몫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