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홍혜련
저명한 한 극장으로부터 제안을 받아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S’의 독백으로 공연은 시작된다. 그는 존속 살인을 주제로 삼아 실제 존속 살해범을 무대에 올리고 싶다고 극장에 역제안한다.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그는 21세의 존속 살해범 마르틴을 만난다. S와 마르틴이 만남이 이어지고 그렇게 <테베랜드>라는 공연이 탄생한다.
공연은 이렇게 시작부터 이 이야기가 실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관객에게 심어 준다. ‘S’라는 이니셜로 된 극작가 인물의 이름이 본 작품의 실제 극작가인 세르히오 블랑코를 곧바로 연상시킨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한국 공연에서는 원작에 충실하여 등장인물의 이름도 변형 없이 S, 마르틴 등으로 해서 확실한 거리감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지만, 스페인어권에서는 ‘실제 이야기’라는 판타지의 효과가 좀 더 강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왜 이 공연의 ‘실제’의 이미지에 주목하는가.
무대 위에 펼쳐지는 인물의 이야기가 관객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발휘하는 때가 언제인가. 바로 그 인물이 진짜처럼 느껴질 때다. ‘진짜’라는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것에서부터 어쩌면 연극의 역사적 미학 대부분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신이 지금 보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 단지 극일 뿐이라고 일깨워 주는 소격 효과가 현대 연극에서 주요하게 떠오른 것도 어쩌면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고 그 인물의 입장이 되어 사건을 경험하는 것의 효과가 워낙 강력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테베랜드>는 이 공연이 ‘실제’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데 단순히 머무르지 않는다. 만일 이 공연이 단지 S와 마르틴의 이야기에 그쳤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공연은 제3의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당신이 지금 보는 것은 실제에서 영감을 받아 새롭게 창조된 ‘이야기’라는 사실을 다시금 강력하게 주지시킨다. 여기서부터 공연은 더욱 복잡하고 흥미로워진다.
S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를 극장의 무대에 세울 수는 없다고 정부가 최종 결정함에 따라 S와 마르틴의 애초 계획은 무산된다. 대신 S는 마르틴의 역할을 할 배우를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다. 관객이 지금 보고 있는 <테베랜드>의 공연에서는 이제부터 마르틴과 그를 연기하는 배우 페데리코를 한 명의 배우가 넘나들며 연기한다. 마르틴이라는 인물, 그 인물을 연기하는 페데리코라는 극 속 배우, 그리고 그 둘을 연기하는 또 다른 현존의 배우 사이에 연극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거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배우가 두 인물을 연기함에 있어 그 시작과 끝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이 배우가 지금 어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 자주 찾아오면서 관객은 마르틴과 페데리코를 혼동하게 된다. 심지어 S와 마르틴, 페데리코, 세 사람 사이의 대사가 뒤섞이면서 이 현상은 더욱 심화된다. 예를 들어, 마르틴이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 어머니의 유품인 묵주가 처음 마르틴과 S의 대화에서 재스민 꽃잎으로 만들어졌다고 언급되는데, 이것이 이후 페데리코와 S의 대화에서 재스민은 남성적이고 장미는 여성적이니 장미가 더 어울리지 않겠냐고 이야기된다. 그런데 이것이 이후 마르틴과 S의 대화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마르틴의 묵주는 장미꽃으로 만들어져 온몸에서 장미 향기가 난다고 관객이 알아채지도 못하게 바꿔치기 된다. 이 순간 이 말을 하는 마르틴은 마르틴인가 마르틴의 연기를 하는 페데리코인가. 극 속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한편, 마르틴은 자신을 다른 배우가 연기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배우가 자신을 만나러 오느냐고, 어떻게 자기를 만나지도 않고 내 ‘흉내’를 내느냐고 반문한다. 이에 S는 재연과 재현의 차이를 이야기하며 배우는 실제 인물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에서 영감을 받아 새롭게 인물을 창조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이후 마르코와 페데리코, 두 사람이 똑같이 착용하고 있는 나이키 운동화와 레이밴 선글라스가 어느 것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이야기되며 이 연극의 메타 연극성은 더욱 강하게 발현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세르히오 블랑코는 이 모든 치밀한 연극적 수단으로 연극 속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한 단계 더 뛰어넘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관객은 공연을 보면서 그 인물이 창조된 인물, 즉 가공의 인물임을 잘 알면서도 공연이 진행되는 시간 동안 인물과 함께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기꺼이 마음을 내주어 결국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 인물을 살아 있는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한다. <테베랜드>에서 S가 마르틴을 대하는 모습 역시 그렇게 변화한다. 처음에는 공연을 만들기 위한 매우 적절한 장치이자 소재로서만 마르틴을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매우 객관적임을 표방하면서도 그와의 만남이 이어질수록 S는 마르틴을 마음속에 점점 더 깊이 품게 되고 그 역시 한 인간임을 받아들이게 된다.
마침내 극 중 <테베랜드> 공연은 (마르틴 없이) 무대에 올라가고 마무리되어 S와 마르틴은 필연적 작별의 순간을 맞는다. 오랜 만남 내내 담담하게 보였던 S는 마르틴에게 마지막으로 포옹 한번 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그를 아주 길게, 그리고 깊게 껴안는다. 그리고 마르틴에게 잊을 수 없는 선물을 준다. 그러면서 앞으로 계속 엽서를 쓰겠다고, 오늘 밤 파리에 가자마자 에펠탑 엽서를 사서 쓰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라는 존재가 으레 그러듯이 S에게서 마르틴을 지울 것이다. 그렇게 될 것임을 작별의 이 순간 S와 마르틴, 두 사람 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 이 모든 게 다 허구임을 알면서도 관객인 나는 왜 이런 상상을 하며 에는 가슴을 어루만지는가. 어딘가 마르틴이 진짜 있다고, 그리고 그를 생각하는 S가 분명 있다고, 믿고 싶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관객이 이렇게 믿는 한 공연 속 인물은 이렇게 극장 밖에서도 계속 살아 숨 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