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양세라(연극평론가)
- 동백당; 빵집 사람들의 드라마와 가변형 무대

이 공연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의 고정된 관객석을 비우고 무대 위로 객석을 임시로 설치하였다. 좌우로 가설된 객석 사이를 무대로 쓰고 무대 왼쪽 등퇴장 출입구는 빵을 굽는 주방으로 오른쪽 등퇴장 출입구는 ‘동백당’ 외부인들 출입구로 설정되었다. 무대는 마치 요즘 유행하는 빵 공장 스타일 카페처럼 무대 맨 뒤쪽 가운데로 ‘동백당’ 가게문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빵 진열대가 관객석 앞 좌우로 놓여 있다. 극장을 들어오며 무대와 객석을 살피는 사이 무대에 퍼져있는 빵 냄새가 먼저 후각을 자극해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났다. 빵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덕분에 관객은 동백당에서 일어나는 일을 목격하는 목격자가 되거나 빵집을 기웃거리는 손님 같은 기분에 들뜨는 듯한 공연장의 분위기가 있었다.
무대 위로 관객석을 가설한 시도처럼, 이 공연의 무대와 무대장치 오브제들은 상황에 따라 그 역할이 가변되는 특징을 보인다. 무대의 가변성은 마치 여러 편의 옴니버스극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다양한 서사를 재현하는 유연한 무대 전략이다. 무대에서 객석과 가까운 가장자리에는 자작나무처럼 마르고 헐벗은 나무들이 울타리처럼 서 있어 본래 관객이 앉았을 객석을 가리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하고 등장해 있는 아들에게 버려진 일본인 할머니의 서사가 드러나면서 나무 오브제는 마치 그녀의 그림자처럼 처연하였다. 그리고 동백당의 가게문은 바다가 보이는 언덕이 되어 이씨와 후유에, 석이 가정사가 극적으로 화해하는 재현 공간으로 기능한다.
- 제빵서사 드라마 몽타쥬와 레시피 언어의 드라마트루그

이 공연은 해방 직후 식민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도시 군산에서 노동으로 생존과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가난과 차별, 가업을 이어가는 남겨진 사람들이 빵을 경험하고, 빵을 만드는 삶에 뛰어들어 노동으로 연대의 삶을 살아가고, 빵으로 독립된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만들어진 연극이었다. ‘동백당’의 작은 사장 여왕림과 수석제빵사 공주는 독립운동하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남편과 연결된 여성들이다. 이들은 끊임없는 빚 독촉과 술에 젖은 지식인 아들과 도시생황을 꿈꾸는 딸을 기르며 동백당을 지켜가고 있다. 일본인이 떠난 지역에서 빵집은 우여곡절 끝에, 마을 사람들과 협동조합을 만들고, 빵 제조법을 교육한다. 이 과정에서 빚쟁이에게 오븐을 빼앗기고, 빵반죽을 모아놓고 조합원들과 고민하던 중 화덕을 만들고 새로운 빵을 만드는 레시피를 연구하다 솔 빵을 만들게 된다. 이 연극에서 빵을 만드는 서사는 예전의 제빵 제과를 매개로 한 보통사람들의 성공드라마를 떠오르게 한다. 그만큼 이 연극은 보편적인 소재와 평범한 인간의 삶을 존엄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인가 연극을 보는 동안 드라마 <국희>와 <제빵왕 김탁구>가 연상되는 순간이 있었다. 두 드라마는 제과 제빵업을 매개로 한 대표적인 성장드라마이다. 1999년 방송드라마 <국희>는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여성이 제과점부터 기업을 창업하는 성장기를 다루었다. 2010년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경제 개발기를 배경으로 주인공 김탁구가 온갖 역경을 딛고 최고의 제빵인으로 성공하는 모습을 다루었다. 공연장에서 빵을 만드는 노동과 노동자의 삶을 매개로 한 드라마 계보를 이 연극이 이어가는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이 연극이 협동조합원들과 이웃, 그리고 자녀들의 독립 가능성을 독려하고 확인한 순간, 두 여사장이 자신들의 온전한 삶을 위해 독립하여 떠나는 마지막 장면 때문에 마치 연극의 몽타쥬처럼 느껴졌다.
제빵 드라마 몽타쥬가 연상되는 것은 -빵을 만드는 과정이 역동적이지 않아 아쉽지만- 어차피 이 연극은 고단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의 삶을 빵과 빵을 만드는 과정을 메타포로 하기 때문이다. ‘동백당’에서 빵이 발효되고, 반죽에 기포가 생기고 기포가 터지면서 공기 구멍이 생기는 이 과정을 표현하는 언어는 극 중 인물들이 고단한 삶 가운데서 의지하며 숨 쉬고 위로받는 상황을 대신한다. 이 연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제빵 레시피 언어는 특별한 드라마트루그라할 만하다. 이 레시피 언어는 장애가 있지만 빵의 맛을 예민하게 느끼는 이, 삶에 열정적인 고아 남매, 해고된 노동자, 버려진 난민들, 이들과 가족을 이룬 사람들의 고단한 몸이 부딪히며, 빵 반죽에 참여하는 상황을 뮤지컬 군무처럼 화려하게 재현하는 몸의 언어로도 극대화 되었다.
- 보편적 정서를 표현하는 극적 전략

무대 위 임시로 설치된 가설 객석에서 관객은 무대와 함께 무대 넘어로 보이는 빈 객석을 보며, 이 이상적인 서사와 공간이 비현실적이라 느끼는 순간이 있다. 빵만큼이나 따뜻했던 공연은 마치 극장 밖 현실을 잊어버리라는 듯 감상적인 측면도 있다. 성실하고 인정 많으며,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사람들을 만나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 연극의 배경인 1947년, 군산의 역사를 떠올려 보면, 1945년 해방을 맞이했지만, 일년 뒤엔 홍수와 열병에 시달리다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침략국으로부터 해방됐지만, 일상의 혼란에서 해방되지 못한 빈민들이 버거운 삶을 영위하는 아름다움, 삶의 가치에 대한 극작가의 비젼이 내포된 연극이다.쏜튼 와일더의 <우리 읍내> 신문팔이 소년의 등장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재현하는 장면 시작처럼 이 연극도 자전거를 타고 시간의 변화를 상징하는 장면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무대를 가르는 장면은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벽을 넘어서는 듯한 효과를 연출한다. 소년미가 있는 배우가 페달을 밟으며 두 바퀴로 무대를 가로지르는 순간이 재현되는 장면에서 극중 상황은 문제적이거나 갈등의 공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그리운 시공간으로 이끄는 듯했다. 분명 실내극장 무대였지만 유려하게 자전거가 바람과 공기를 가르는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공연의 이 장면은 관객의 현실에서 우리가 그리워하는 시공간으로 이끄는 듯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탄성의 숨을 죽이며 마음이 가벼이 떠오르는 듯했다.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우리의 일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야!’ 라는 솔의 대사는 <우리읍내>에서 사망 뒤에 과거 어린 시절의 에밀리로 돌아가 마주한 일상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장면과 겹친다. “난 몰랐어요. 모든 것이 자꾸 지나가는데 우린 그걸 모르고 있는 거예요. (중략)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까요?”
- 연대의 환타지

연극을 통해 공동체가 연대하고 그 활력을 함께 나누는 기쁨은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연극은 공동체가 어울리던 관습이라는 문화적 경험을 1947년 해방 직후 군산의 작은 빵집 ‘동백당’을 극 중 공간으로 전유한다. 그래서 마치 이 연극의 사건과 갈등의 서사는 마치 통과의례가 수행되는 듯하다. 공동체의 의례를 수행하며 갈등을 극복하고 평화와 일상을 회복하는 서사를 수행하는 방식은 이 연극의 구조적 특징으로 느껴진다. 치즈케익과 솔빵을 나누어 먹는 경험은 음식(빵)을 나누며 의례의 가치를 참여자의 몸에 각인하고 성스러움과 소속감에 충만해지는 특별한 경험이다. 그래서 저물어가는 시대에 대한 불안과 고단함을 그린 체홉의 <벚꽃동산>이, 인간 개개인 존재의 가치가 있음을 말하는 연극이라는 보편적 정서가 느껴지는 순간에는 쏜튼 와일더의 <우리읍내>가 존재하는 연극이었다. 극단적인 차이와 소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 시대에 공존과 연대의 삶을 빵을 만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그린 연극이라는 설정은 매우 흥미롭다. 또한 우리는 이 극장 밖, 대학로를 조금 벗어나면, 서로 다른 구호를 외치며 상대와 소통하지 않는 현실과 마주한다. 현실과 괴리되는 연극 공간은 빵 굽는 냄새와 극장에서 맛본 빵 맛만큼이나 환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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