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배선애(연극평론가)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은 상대적으로 공연이 적은, 일명 비수기인 1월~3월 초에 공연된다. 시기가 참 적절하다. 관객과 만나는 공연 자체가 적기 때문에 연극계의 주목과 집중을 많이 받을 수 있어 화제성이 크다. 거기에 단일 작품 제작과 관련해서는 국내 최고 액수를 지원하고 있어서 연극계의 기대치 또한 높다. 그러다 보니 올해의 신작 작품들에게는 비교적 엄혹한 잣대가 적용되는 듯하다. 그 많은 지원금을 어떻게 썼는지도 궁금한 데다가 얼마나 좋은 작품이기에 그 큰 지원금을 받는지 호기심과 질투, 부러움이 섞인 시선으로 신작을 찾아보게 된다. 높은 기대치 때문에 신작에 대해서는 대체로 호평보다는 혹평이 많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경우가 흔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7편의 신작이 1월부터 3월 사이에 관객을 만났는데, 예년의 평가를 크게 벗어나는 작품은 없어 보인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글은 2024년 선정된 올해의 신작 7편을 대상으로 하지만 개별 작품들에 대해 구체적인 비평을 진행하기보다는 올해의 신작에서 발견되는 전반적인 특징과 아쉬운 점들을 총괄적으로 서술하는 총평으로 작성되었다.
일곱 빛 무지개 같은 다양한 시선들
올해의 신작 7편의 소재나 내용은 기존에 비해 매우 다채로웠다. 관심 주제나 소재가 겹치거나 일정한 경향성을 보이기보다는 각자 개성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품들이었다.

우선, 첫 번째로 관객을 맞은 <기존의 인형들: 인형의 텍스트>(김연재·신효진·안정민 작, 이지형 연출, 조음기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2025.1.10.~19.)는 세 명의 작가가 쓴 세 편의 단막 공연이었다. 인형 제작자이자 공연 창작자인 이지형의 기존 작업이 인형 중심이었다면 이번에는 작가들에게 인형에 대한 텍스트를 부여하게 했고, 그 결과물 세 편을 연출했다는 점이 특징적인 작품이다. ‘창작산실’이 좋은 대본의 발견을 목표로 만들어졌던 ‘창작팩토리’에 뿌리를 두고 발전해온 점을 감안할 때,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한 명의 작가가 집필한 희곡이 대상이었다. 희곡작가의 역량과 희곡의 완성도가 기본이기 때문에 여러 작가가 한 작품으로 지원한다는 것을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인데, 이 작품은 세 명의 작가가 쓴 세 편의 단막으로 지원했고 선정됐다. 이런 이례적인 사례가 앞으로는 다양한 구성과 형식의 희곡을 만날 수 있는 좋은 선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내력을 가진 인형을 놓고 세 명의 작가가 각각 풀어낸 이야기는 인간과 미래, 존재와 죽음, 실존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보여주었다.

<벼개가 된 사나히>(고연옥 작, 구자혜 연출, 여성국극제작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2025.1.11.~19.)는 여성국극이라는 특징이 눈에 들어온다. 드라마 <정년이>의 영향으로 여성국극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진 분위기도 이 작품의 공연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여성국극단에서 남성을 연기하고 싶은 소년이라는 주인공 설정이 흥미롭고, 꿈 속의 왕을 통해 결국은 벼개가 되는 것을 선택한 것은 젠더에 대한 모든 관습적인 것을 뒤틀어 놓았다. <목련풍선>(배해률 작, 윤혜진 연출, 윤무아,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2025.1.18.~26.)은 가을에 핀 ‘아닌 때 꽃’인 목련을 중심으로 환대와 애도, 그리움 등을 겹겹이 그려냈다. 환경이 상수항으로 전제되어 있으며 그 안에 자본의 논리와 인간의 사랑 등이 지층처럼 쌓여가는 구성이 목련꽃의 상징성만큼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

<저수지의 인어>(송천영 작, 이원재 연출, 극단 달팽이주파수,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2025.2.7.~16.)는 청년, 고립, 고독, 우울을 인어라는 상징적 존재를 빗대 표현했다. 저수지라는 닫힌 공간, 그 속에 물처럼 고여있는 존재들. 희망이라는 단어가 무색한 그들의 생활과 철수가 지어낸 인어의 이야기가 중첩되면서 탈주와 안주의 서로 다른 입장이 현실을 그대로 비유하고 있다. <동백당: 빵집의 사람들>(진주 작, 김희영 연출, 프로덕션IDA,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2025.2.15.~23.)은 해방 직후의 힘든 시기를 지역민들이 연대하고 조합을 만들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빵’을 중심으로 펼쳐놓았다. 실존하는 빵집을 모티프로 삼았음에도 여러 인간 군상을 통해 시대를 그려냄은 물론 지역민의 조합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따뜻하게 형상화했다.

<구미식>(이홍도 작, 전인철 연출, 극단 돌파구,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2025.2.21.~3.2.)은 ‘가상의 도시’로 강조되는 구미시를 배경으로 <행복한 왕자>와 <유리 동물원> 등의 작품이 패러디되면서 현실을 조롱하는 블래코미디다. 구미라는 도시가 갖는 상징성은 가상으로 위장되고, 자신의 보석을 떼어주는 행복한 동상은 과거의 독재자 모습이며, 그 보석을 전해주는 제비 역할의 톰은 약물중독의 청년이다. 광고로 도배된 쇼츠 영상 앞에 선 동상과 톰은 자본과 한 몸이 된 권력과 우리의 현실을 고스란히 풍자하고 있었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갔을 때>(이보람 작, 마두영 연출, 보편적극단,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2025.2.21.~3.2.)도 우리의 현대사를 대상으로 하지만 풍자보다는 정공법으로 접근한 작품이다. 암스트롱이 달에 갔던 1969년에도, 그리고 꽤 오랫동안 국가에 의해 자행되었던 조작 간첩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20여 년에 걸친 다큐멘터리 영화 촬영이라는 설정 덕분에 피해자들의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천천히 쌓이면서 전달되었다. 또한 피해자 인터뷰 장면과 드라마적 구성 장면이 복합적으로 설정되어 있어 역사적 사건에 대한 비판적 탐색의 거리를 확보했다.

희곡보다 더 많은 상상이 필요한 무대
이처럼 희곡은 작가들의 섬세한 감각과 다양한 관심사가 반영되어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만들어냈는데, 실제 무대화된 공연은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조금 더 크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무대 활용에서의 아쉬움이 컸다. 작품의 내용이나 규모로 봤을 때 대극장보다 소극장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 같은 작품인데 대극장에서 공연하느라 무대가 작품을 장악한 경우가 있었는데, <목련풍선>과 <동백당: 빵집의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목련풍선>의 무대는 가장 외딴집이라는 설정 때문인지 무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넓은 경사로가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작품의 중심으로 자리잡아 환대와 애도의 공간인 외딴집을 편협하게 만들었고 배우들의 동선도 제한해버렸다. 가을에 목련을 피게 만든 화학공장은 굴뚝으로 처리되어 실체가 무엇인지 불분명한 존재로 보였다. 때 아닌 목련꽃, 그 잎으로 풍선을 부는 행동이 강조되어야 그리움과 애도의 의미가 부각될 터인데 그런 섬세한 부분들이 관객들에게 잘 전달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넓은 경사로와 구음의 만가만이 기억에 남는 공연이 되었다.

<동백당: 빵집의 사람들>은 기존의 객석을 버리고 대극장 무대 위에 마주보는 객석을 세웠고 그 중앙 공간을 무대로 사용했다. 무대에 객석이 올라온 이유는 관객과 무대, 빵집과 관객들을 더욱 친밀하게 만들기 위한 의도로 읽히지만 대극장이라는 공간 속에서 친밀함을 강조하는 것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아 보인다. 거기에 좌우로 트인 무대 때문에 여기가 실내인지 실외인지 구분이 모호하고 다양한 등퇴장로 때문에 동선이 산만해서 지역민 조합이라는 놀라운 성과가 그냥 흘러가 버렸다. 이 작품도 결국 남는 것은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친절하게 나눠준 빵이었다.
같은 대극장 무대의 <벼개가 된 사나히>는 다른 대극장 작품들에 비해 무대를 비웠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지만 여성국극으로서의 형식적 특징들을 좀 더 강조하고 보여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기존의 인형들: 인형의 텍스트>는 세 편의 단막을 공연하는 새로운 형식이었기 때문에 희곡에 최적화된 연출을 선보였는데, 아쉬운 점은 인형이 뒤로 밀려났다는 점이다. 텍스트와 배우가 개입되다보니 배우의 물성이 인형의 물성을 넘어서게 되어 인형은 관심 밖이 되었다. 인형과 배우, 텍스트가 공존, 공명하는 방법을 조금 더 섬세하게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저수지의 인어>는 다층적인 서사 탓인지 무대에 단을 구분해 공간을 구획지었는데 그 활용이 단조로워 서사의 층위를 효과적으로 구현하지 못했다. 무대의 색채도 서늘하다기보다 온화한 분위기여서 인물의 심리와 거리가 있었다. <구미식>은 풍자와 조롱의 블랙코미디를 대사와 연기에 집중해 표현했는데, 영상과 무대에 좀 더 B급의 요소들 혹은 약물의 환각을 가미해 풍자성을 더 강조하면 관객들의 호응이 더 컸을 것이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갔을 때>는 소극장 무대를 적절하게 활용했고, 희곡의 복합적 구성을 무대 위에 잘 구현해 낸 편이다. 특히 의자로 가득 찬 마지막 장면의 무대는 작품이 전개되면서 쌓여온 것들이 한 번에 확인되는 효과가 있었는데, 이미 초반에 마지막 무대가 충분히 예상되었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작가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희곡이라면, 연출은 그것에 더 많은 상상을 해야 한다. 무대, 배우, 조명, 음향 등등 희곡이 입체화되는 모든 것을 더 많이 상상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번 올해의 신작은 희곡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연출적 상상을 보기 어려웠다. 존재만으로도 빛나는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고 국내 최고라고 손꼽히는 스태프로 구성되었음에도 그 결과물이 아쉬운 것은 연출적 상상력이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극장 무대는 그 자체로 큰 공간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부담도 컸을 것이고, 소극장은 소극장대로 큰 예산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늠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희곡을 너무 납작하게 혹은 단편적으로 읽어낸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자신들의 기존 작업들을 훌륭하게 연출해낸 역량있는 창작진들인데 ‘창작산실’이라는 타이틀을 달면 왜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을 것이라 이 질문의 답을 찾기가 쉽지 않겠지만, 이것이 풀려야 창작산실이 더 이상 망작산실이라고 놀림 받지 않을 것이다. 내년에는 창작산실의 무대에서 무한한 상상력을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