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공연예술 진흥의 선도적 모델 구축을 위한 제안(1)

글_오세곤(극단 노을 예술감독)

 

  1. 시작하며

 

문화와 예술은 헌법적 가치를 지닌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9조에서 “국가는 전통문화의 계승·발전과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또 제22조 1항에서는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고 하였으며, 2항에서는 “저작자·발명가·과학기술자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고 밝히고 있다. 궁금하다. 도대체 왜 국가 운영의 근본 원칙인 헌법에서 문화와 예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그 답은 간단하다. 국가와 사회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문화와 예술이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문화란 삶의 양식이다. 그래서 어떤 세상이 살 만한지 아닌지는 문화로 판별할 수 있다. 문화가 어떤지를 보면 그 사회의 질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그렇게 문화는 사회를 움직이는 근간이다. 그런데 그 문화의 핵심이자 지향점이 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은 단 하나의 답이나 단 하나의 길과 같은 획일화를 거부한다. 즉 예술은 다양성을 속성으로 한다. 당연히 비효율적이다. 게다가 예술인들은 아무리 확률이 낮아도 시도하고 아무리 실패해도 다시 도전하는 무모할 정도의 집요함을 특성으로 지닌다. 따라서 생산성과는 무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듯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으로 보이는 특성들이야말로 인류가 높은 문화를 쌓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임을 알아야 한다.

문화와 예술은 이것저것 다 한 다음 여력이 있을 때나 들여다보는 장식품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문화와 예술은 국가와 사회를 이루는 필수 요소이다. 인간은 공기가 없으면 몇 분 안에 죽고, 물이 없으면 며칠 안에 죽고, 쌀이 없으면 몇 주 안에 죽는다. 잠을 자려면 집이 있어야 하고, 추위를 이기려면 옷도 필요하고 열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만 중요하고 문화와 예술은 중요하지 않거나 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크나큰 오산이다. 문화가 없으면, 문화의 핵을 이루는 예술이 없으면 결국 그 사회에서는 인간이 삶다운 삶을 살 수 없게 되어 버릴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전국적으로 도시재생이니 문화도시니 하는 사업이 유행처럼 일어났다. 대부분 문화를 내세우고 그 안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예술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사업이 끝나면 예술은 사라지고 결국 문화도 정착되지 못 한 채 부작용만 남기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술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업을 위해 잠시 끌어들였던 예술인들을 계속 남아 있도록 하는 계획도 없고 장치도 없다. 수익을 목적으로 사업을 따낸 주관 업자들에 의해 잠시 머물지만 결코 주인이 아닌 손님으로서 몇 가지 수동적인 역할을 하고는 더 있을 환경도 아니고 근거도 없으니 떠날 수밖에 없다. 결국 남는 건 공허한 수치로 가득한 현란한 결과보고서뿐이다.

문화는 기획하는 게 아니다. 예술을 진흥하면 저절로 문화가 살아난다. 그러므로 목표는 간단하다. 예술인이 예술을 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면 된다. 괜히 어떤 문화를 만들겠노라고 내세우고 섣불리 문화를 유도하려다간 죽도 밥도 아무것도 안 된다. 그러나 정책을 다루는 이들은 조바심을 내며 그런 단순한 원리를 믿지 않는다. 문화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그 핵심인 예술 진흥에 대해서는 대단히 정교한 계획과 실행이 이루어져야 하건만, 반대로 문화에 대해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복잡한 수사(修辭)를 들이대고 예술은 그저 끌어다 붙이는 정도로 단순히 취급한다. 그러니 현실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는커녕 심할 경우 오히려 문화니 재생이니 하는 명목으로 그 사회를 병들게까지 한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글은 공연예술, 그중에서도 특히 연극의 진흥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예술 중에서 연극만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종류든 하나만 살려도 능히 문화가 살아날 것이란 뜻으로 해석되기 바란다. 또는 하나의 모델로서 연극을 선택한 것이라 이해되기 바란다. 하나를 살릴 수 있으면 같은 방법으로 열도 살릴 수 있다. 그 방법은 대단히 정확하고 세밀해야 한다. 예술이라는 가장 예민하고 가장 섬세한 존재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분야에 대해 그런 정교한 설계를 해보는 것은 여러모로 유용할 것이다.

연극의 진흥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안정적으로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또한 작품 생산을 활성화할 수 있는 정책도 있어야 하며, 기본 환경이 좋아질 수 있도록 창작 지원의 기조를 바꿀 필요도 있고, 또 연극인들이 안심하고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복지 지원도 강화해야 한다.

 

  1. 예술 진흥의 중심 이동

 

문화예술진흥법이 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진흥보다는 지원(支援)이 중심이다. 지원의 사전적 의미는 “지지하여 도움”이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 요소에 대해서는 지원은 보조 수단일 뿐, 중심은 그것을 지키고 진흥시키는 데 두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1970년대 이래 예술은 계속 지원의 대상이었다. 소위 지원이라는 이름으로 제작비의 일부를 도와주는 형식은 수많은 부작용을 낳으며 예술을 무너뜨렸다.

 

불공정: 카르텔. 양극화. 편중. 기울어진 운동장. 그들만의 리그. 부익부 빈익빈. 상호불신.

불합리: 허술한 지원 설계. 비예술적 평가기준(언론노출, 흥행실적, 수상 등 기존 성과에 치중)

부정확: 평가 역량 미흡(오히려 권위적)

 

따라서 이제 예술 진흥의 중심은 지원이 아니라 예술가가 생산한 작품을 공적으로 구매하고 예술가는 당당하게 인건비를 받는 것이 되어야 하며, 지원은 예술 진흥을 위한 보조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원도 현재의 ‘소수만을 대상으로 하는 편중 선별 지원’이 아닌 ‘기본 환경 중심의 보편지원’이 되어야 하고, 행정 편의적 틀에 맞춰 적극적으로 신청해야 가능한 지원’이 아닌 ‘창작에 전념하느라 까다로운 신청 절차에 소극적인 예술가들까지 찾는 발굴지원’이 되어야 하며, 거의 예산에만 국한된 지원’이 아닌 ‘부족한 부분을 찾아 그게 무엇이든 채워주는 맞춤지원’이 되어야 한다.

 

<예술 진흥의 중심(공연 분야)>

고용 창출: 공공 공연단체

작품 구매: 민간 공연단체

수요 창출: 문화예술교육(학교, 사회)

<예술 진흥의 보조수단>

보편지원, 발굴지원, 맞춤지원

 

  1. 연극 창작 지원의 기조 전환

 

연극인들은 대부분 예술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실하고 그래서 자비로라도 창작 활동을 계속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하다. 반면에 공적인 창작 지원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특히 발표할 기회마저 아주 편중되게 허용된다는 부정적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결국 가장 시급한 것은 보편적인 기회의 확대, 즉 보편지원이며,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자존심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졸라야 지원해 주는 형식이 아닌 샅샅이 찾아서 지원하는 이른바 발굴지원일 것이고, 또한 지원기관들이 행정 편의적으로 제시하는 틀에 맞춰 서류를 내고 심사를 받고 하는 것이 아닌 연극인들의 여러 사정에 맞춰 조정해 지원하는 이른바 맞춤지원일 것이다.

 

1) 보편지원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지만 연극은 실패의 확률이 대단히 높다. 실패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그런데 우리의 예술 지원은 너무 성공에만 초점을 맞춘다. 더욱이 성공 여부를 판정하는 정확한 기준을 마련하지 못한 터에 이루어지는 선택은 너무도 위험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우선 “보편 지원” 정책이다. 까다로운 질적 평가 없이 기본적인 요건만 갖추면 지원하는 이 정책은 특히 신진 연극인들에게 적합하다. 물론 꼭 연령이나 활동 연한에 의거한 신진이 아니어도 아직 성과 확인이 안 된 작품에 대해 언제고 신청할 수 있는 소액다건 방식의 지원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울러 단순히 제작비 지원뿐 아니라 연습, 창작 및 발표를 위한 공간 지원, 창작품을 향유자들에게 연결하기 위한 홍보 지원, 최소 기본액 보장 구매 지원(또는 작품 담보 융자 지원), 위탁 판매 지원, 영상화 지원, 디지털아트마켓과 실물아트마켓에 출품 지원 등, 보편지원에 포함할 만한 항목은 대단히 많을 텐데, 이것은 일종의 연극 창작을 위한 기초 환경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해 무조건 지원해 주기로 했다가 누구나 다 연극을 하겠다고 나서면 어쩌겠느냐는 걱정들도 한다. 그러나 연극 작업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나 비용 정도를 지원하는 제도 때문에 모두가 그 어렵고 위험한 연극인의 길을 선택한다면 그건 너무 과한 예측이다. 물론 무조건 지원에는 한계가 따른다. 아무래도 한정된 예산 안에서 진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요가 많으면 이후 설계에서 예산을 늘리고 예산 소진이 다 안 되면 줄이는 식으로 하다 보면 적정 수준이 결정될 것이다.

 

2) 발굴지원

 

현재 우리의 연극 지원은 공모제 중심이다. 물론 그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방식은 예술에는 적합하지 않을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 과대하게 포장할 수도 있고 반대로 대단한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엄격한 나머지 내세우기를 주저할 수도 있다.

더욱이 대부분 서류로 진행되는 지원 심사는 본질을 왜곡할 우려가 크다. 즉 소위 서류 전문가들이 개입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고 그렇지 않으면 귀한 진주도 진흙 속에 묻힌 채 사장되고 마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든 판별해야 하는 게 현실이라지만 궁극적인 목적을 망각한 채 오로지 판별을 위한 판별로 흐른다면 오히려 연극을 망치고 말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발굴 지원” 정책이다. 물론 신청을 받을 수도 있고 추천을 받을 수도 있으나 지원기관의 적극적인 제안에 대해 동의 표명만 있으면 되는 정도가 좋다. 아무리 지원해 주려고 해도 거부하면 더 두고 지켜보며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어쨌든 그렇게 동의 표명이 된 이후 해당 단체나 개인에 대한 검토 및 판단은 지원기관이 맡아야 한다.

 

3) 맞춤지원

 

연극인이나 연극단체들에게 골고루 모든 능력을 갖추라는 건 과한 주문이다. 오히려 아주 좁고 깊게 몰두하는 게 예술의 특성이라 할 때 여러 요소에서 골고루 평균 이상의 점수를 받은 경우보다는 비록 전체적으로 점수가 낮더라도 일부 요소의 점수가 대단히 높은 경우 지원 대상으로서 더 적합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연극 지원은 거의 모든 것을 갖춘 대상에게 부족한 일부만을 채워주는 형태이다. 그 부족한 일부란 십중팔구 돈이다. 물론 최근 컨설팅 지원이나 인적 네트워킹 지원도 종종 거론되기는 하지만 대부분 예산 지원에만 한정된 형태이다. 그러나 연극의 특성을 생각할 때 현재의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 즉 극히 일부만 가진 대상에게 나머지 부분을 채워주는 지원 형태도 가능해야 한다.

사실 이것은 일반인을 위한 예술 교육에서 강조하는 것과 유사한 내용이다. 즉 어떤 예술 활동에 필요한 요소가 10가지라 할 때 교육 대상의 상태에 따라 5가지 지원이 필요할 경우도 있고 1가지 지원이면 충분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대사를 부담스러워 하는 노인들이 연극을 한다면 마치 노래방에서 자막을 보여주듯 커다란 종이에 대사를 써서 보여주는 방법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더라도 연극의 즐거움은 상당 정도 맛볼 수 있다.

그렇게 대상에 대한 발상 전환과 함께 지원의 내용도 유연해져야 한다. 예를 들어 홍보 마케팅 능력이 부족하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지원해야 할 것이고, 대중성이 높을 경우 단순한 예산 지원이 아닌 융자나 투자 유치를 도울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예술성은 있지만 관객이 쉽게 선택하지 않을 작품이라면 관람료 대부분을 지원하는 방책이 필요할 것이다. 또 외국 작품 저작권에 어려움이 있으면 그것을 해결해주고 인적 정보력이 약하면 그것을 도와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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