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오판진(연극평론가)
극단 ‘몽중자각’이 제작한 공연 <고딩만담>이 2025년 4월 23일부터 4월 27일까지 동숭무대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박지원 정민찬 김성진 극작가 세 명이 쓴 희곡을 바탕으로 김성진이 연출하였고, 박솔지 윤경화 신다혜 안 용 유경민 유명진 배우가 출연하였다.

요즘 공연장에서는 인물의 성격이 극단적이거나, 상상하기 어려운 사건과 갈등이 펼쳐지고,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막장인 이야기가 상당하다. 그런데 이 공연은 이런 흐름과 달리 상당히 순한 맛이 나는 청소년극이었다.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연극의 제목 <고딩만담>은 ‘고딩’과 ‘만담’이 결합한 합성어이며, 재미있고 익살스럽게 고등학생들의 세상을 풍자하는 이야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앞에서 밝힌 역량 있는 극작가 세 명이 각각 에피소드 하나씩 맡아서 썼고, ‘월담론,’ ‘맥콜진담’, ‘반성,문’ 이 그것이다.
자율이라는 이름의 강제 학습, ‘야자’
첫 번째 이야기 ‘월담론’을 보면, 여고생들이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실시되는 야간 자율 학습을 하지 않고, 학교 담을 넘으려고 하고 있다. 하루 종일 공부하는 것도 부족한 것인지,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하는 고등학생들의 삶이 표현된다. 과거에는 많은 고등학교에서 야간 자율 학습, 일명 ‘야자’를 실시했기에, 관객 대부분은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이런 강제 학습이 많이 사라졌다. 그래서 학생들이 이 장면처럼 힘들고, 위험하게 월담해야 할 일은 거의 없다. 물론, 2025년 현재, 대한민국 어느 지역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야자를 실시하는 고등학교가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드라마이다. 사실에 근거해서 개연성 있게 상상으로 만든 허구의 산물이다. 이 작품을 쓴 작가들이 고등학생의 야자와 월담을 주목한 것은 ‘야자’라는 흘러간 옛노래 같은 소재를 통해 현실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학교에서 실시하는 야자가 없어도 각자 알아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그들의 모습이 과거와 달라지긴 했지만, 그런데도 여전히 고등학생들의 삶이 학생 자신의 선택보다는 부모님이나 교사 등에 의해 결정되는 점은 동일하다. 야자나 월담과 같은 학교 층위의 장벽보다 더 높고 강력한 또 다른 담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학교의 담이 문제가 아니라 학원이나 또 다른 유형의 장벽들이 고등학생들을 가두고 있다. 가령, 고액학원이나 ‘스터디카페’에 비용을 더 내고서 들어가기도 한다. 반면, 지우처럼 좋아하는 선생님께서 야자 감독을 하시면 그 선생님 얼굴 보는 맛에 즐거운 마음으로 야자에 참여하기도 한다. 또한, 옛날엔 팬 미팅 행사나 콘서트 등에 참석하기 위해 아픈 척 연기하는 것이나 또 다른 까닭으로 야자에 불참하는 사례가 있었고, 추억처럼 회자된다. 이렇게 어떤 학생은 강제로 담 속에 갇혀 있기도 하였지만, 또 다른 학생은 스스로 새로운 담 속에 자신을 가두기도 한다. 이런 고등학생들의 현실을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만담처럼 보여주었다. 그 시절이 지나면 망각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맥콜을 ‘맥주’처럼 마시면서 진심 털어놓기
두 번째 이야기 ‘맥콜진담’에서는 편의점 앞 간이 테이블 앞을 배경으로 고3 남학생들이 등장한다. 사랑 고백을 준비하는 민성이와 투표가 중요하다는 하진이, 직업군인이 되어 경제적으로 준비한 후 결혼하겠다는 대건이가 그들이다. 이 세 학생은 서로 친하지만, 말하는 내용이나 초점이 일목요연하진 않다. 어차피 제목부터 만담이니깐 부담 없이 각자 캐릭터대로 하고 싶은 말을 끝없이 쏟아놓는다. 이들은 마음으로는 맥주를 마시고 싶었지만, 성인이 아니라서 맥콜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맥콜은 맥주와 콜라 그 중간쯤이라면서, 이제 청소년기를 벗어나고 있지만, 아직 어른이 아닌 자신들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인물들은 남학생임에도 매우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 시절엔 나도 저랬나 생각하면서 대사를 듣다 보니, 옛날과 확연히 다른 점을 하나 발견하였다. 등장인물들의 주장이 매우 분명하고 설득력이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30대 이상 관객들은 청소년기에 주장할 게 있어도 부모님이나 선생님 등 어른들의 눈치를 보면서 말하지 못한 게 많았다. 사실 말해 봐야 해결되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말이 많으면, 공산당이라며 공격을 당하거나 손해 보는 경험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대건이란 인물은 고등학생인데,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너무 현실적이고 똑똑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돈 없고 집 없으면 결혼하기 힘들다는 것을 너무 빨리 알아버렸다. 그리고 민성이가 좋아하는 민지를 대건이도 좋아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건이는 다른 친구나 민지에게 자기 속마음을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이미 속이 깊은 어른이었기에,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에피소드의 인물들을 보면서, 청소년들이 진심이라고 말한 게 전부가 아닐 수도 있고, 이들이 말하지 않은 것 또는 말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 알아보고, 그들과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답 없는 반성문을 써야 하는 청소년들
세 번째 이야기 ‘반성, 문’에서는 진학상담실을 배경으로 이전 장면에 등장했던 여학생 3명과 남학생 3명이 모두 나온다. 이 학생들은 야자 관련 월담 사건으로 교사에게 발각되어 벌을 받고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벌칙, 무릎 꿇고 손들기. 요즘 이런 것을 하면, 신체적 체벌이기에 아동 학대로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연극적으로 필요해서 설정한 장면처럼 보였다. 민지가 등장하여 친구들에게 반성문을 제출하라는 학주(학생주임)인 담임의 말을 전한다. 이렇게 고등학생들은 담을 넘는 데 실패하였고, 이제는 반성문을 써서 통과해야 집으로 가는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무슨 게임의 미션 같은 상황에 부닥친 것이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지우는 어떤 내용으로 반성문을 쓸지 고민하다가, 반성문에서 중요한 것은 노력이라며, 깜지를 써서 제출하겠다고 생각한다. 반면, 민지는 논리정연한 반성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야자에 늦은 이유는 무엇이고, 그 과정에서 어떤 잘못을 했는지를 써서 담임에게 가져간다. 반면, 대건이는 야자하지 말고 집에 오라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았다면서, 잘못한 게 없으니, 반성문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한편, 하진은 반성문을 쓰라는 담임의 의도를 짐작해 보고, 자신들이 잘못한 것을 인정하는 게 핵심이라며, ‘선생님, 잘못했습니다.’라고 단 한 문장만 써서 담임을 찾아간다. 결국, 민지는 탈락하고, 하진만 합격한다. 이런 결과를 보고, 예은이는 하진처럼 잘못했다는 취지로 글을 써서 담임에게 가져간다. 그래서 예은이도 통과한다. 대건이와 민성이가 답을 찾으려고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민지는 아까 썼던 것을 들고 다시 갔다가 이번에는 그것으로 통과된다. 반성문 쓰기 미션에서 통과하기 위해 잘못했다는 내용의 글을 쓰면 될 것 같지만,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글의 내용이나 조건을 담임이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았기에 남은 고등학생들은 계속 갈등한다. 한편, 지우는 다른 학생들이 떠들 때도, 처음부터 대화는 하지 않고 반성문만 열심히 썼다. 그런데, 대건이와 민성이가 다투다가 지우가 쓴 반성문에 물을 쏟는다. 그래서 지우 반성문이 망쳐졌고 그녀는 절망한다. 하지만, 두 친구 덕분에 집으로 갈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대건이와 민성이가 반성문을 다 쓰고, 담임에게 가져갔을 때, 지우의 상황도 말씀드렸기 때문이다.
이런 해프닝이 이어지는 세 번째 에피소드를 보면서 우리 사는 세상, 현실을 상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께 통과된 반성문의 형식이나 내용이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연극 <고딩만담>은 고3 시절은 물론 인생 전반이 정답이 없는 시험과 과제의 연속이라는 걸 대사와 연기로 생생하고 감각적으로 보여준 것 같았다. 희곡과 연출 또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풋풋하고 흥미로웠기에 공연에 푹 빠져서 관람할 수 있었다. 특히, 배우들은 약간 과장되면서도 진실한 연기로 인물의 성격이나 대사에서 개연성과 설득력을 높였다. 자기가 처한 상황과 생각을 자기 성격대로 씩씩하게 풀어가는 고등학생들을 만나고 온 기분이었다.
청소년극을 보러온 관객들
이 공연에서는 부모나 담임 또는 다른 교사 등 어른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고등학생 6명만 등장하였고, 청소년들의 생각과 감각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청소년들의 생각과 감각, 즉 그들의 정체성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관객들은 지금은 가물가물할 수 있는 청소년기 자신의 과거를 대사와 몸짓으로 생생하게 감각할 수 있었다. 청소년기를 지나온 관객들은 이 공연을 보면서, 청소년 시절을 회상하였고, 자신의 현재와 미래도 성찰하였다. 비록 공연에서 보았던 학교의 담은 아니지만, 나는 어떤 담 앞에 서 있었고, 현재는 어떤 담 앞에 서 있는가? 담을 넘다가 걸려서 벌을 받은 것처럼 풀어야 할 문제는 잘 해결하였거나 해결하고 있는가? 앞으로 어떤 문제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반성문을 쓰는 것처럼 고민하고 있을 것 같은가? 이 작품은 이런 종류의 여러 생각을 하면서 자기 삶을 성찰하도록 하는 실마리를 던져 주었다. <고딩만담>처럼 인물의 성격과 대사가 친근하고, 갈등과 결말이 따뜻하며, 설득력이 있는 작품이 앞으로도 많이 만들어지길 기대하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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