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권서의
멕시코 극작가 우도 살세도의 『가객들의 여행』을 원작으로 한 극단 물결의 <돈데보이(Dondevoy): 가객들의 여행>(이하 <돈데보이>)은 1987년 벌어진 사건을 모티프로 만들어졌다. 당시 멕시코인 18명은 더 나은 삶을 향해 미국으로 향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합법적으로 이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고 기차 화물칸에 몸을 실어 국경을 넘고자 했으나 그들이 꿈에 다 다르기도 전, 그들은 질식사하고 만다.
<돈데보이>는 이민자들의 이주 과정과 남겨진 그들의 순간을 그려낸다. 그들이 겪는 반복되는 일상과 그 안에서 꿈꾸는 순간과 찰나의 낭만을 ‘감성 음악극’이라는 형태에 담아냈다. 극단 물결은 인물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감각은 신체로, 순간과 찰나의 낭만은 음악으로 표현하여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는 무대를 만들어 낸다.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걸음은 또 다른 현실로 가는 길
도심의 거리에서 시작하는 <돈데보이>.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가운데 시공간이 멈추면 두 형제의 대화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아메리칸 드림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봉급을 받기 위해 미국행을 결심한다. 화물칸에 몸을 실은 이민자들은 어둠 속에서 노래로 지루한 현실을 견디고, 마을에 남은 사람들 또한 기다림의 지루함을 노래로 달랜다.
한편, 이민자들이 몸을 실은 기차는 고장이 난다. 이민자들을 꿈으로 데려가기 위한 공간은 죽음을 향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결국 이들은 질식사하고 추도 미사 장면이 이어진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무력한 생존. 모든 것이 정리되면 무대는 다시 처음의 분주한 거리로 돌아가고 관객은 새로운 현실을 맞이한다.
한편, 극단 물결만이 지니는 독특한 신체 움직임 표현은 극의 흐름을 압축하여 표현한다. 배우들의 살랑이는 움직임은 어디론가 나아가려 하다 자신의 목을 조른다. 이러한 일련의 시퀀스는 계속 반복하며 현실의 반복을 그려낸다. 이러한 반복은 극 전개를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이 살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낭만은 음악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공간 그 자체로 보여진다.
낭만의 양면, 음악
<돈데보이>는 ‘감성 음악극’이라는 장르를 특징으로, 음악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서사의 중요한 축으로 사용한다. 특히 같은 음악을 서로 다른 장면에 배치하여 하나의 노래가 장면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는 음악을 단일한 감정표현의 수단이 아닌, 해석의 여지를 가진 장치와 역설을 통한 장면의 깊이를 더하는 요소로 확장시킨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은 초반부와 말미에 반복되는 여자 코러스들의 노래다. 초반에 등장하는 “기도해요”라는 가사의 노래는 먼 길을 떠나는 이민자들의 여정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민자들이 질식사 한 후 같은 노래가 나올 때, 그 의미는 죽은자들을 위한 기도로, 그 의미가 달라진다. 반복되는 음악 안에서 희망은 슬픔으로 바뀌고 관객 또한 그 변화에 따라 감정의 무게를 달리 느끼게 된다.
같은 노래의 반복이 아닐지라도, 음악과 장면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의미가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다. 기차가 멈춘 뒤, 화물칸에 갇힌 사람들이 모스코가 자신들을 속였다고 생각해서 모스코를 폭행하는 장면은 음악 없이 본다면 이민자들의 단순한 분노 폭발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무대 위에 성가대 음악이 흐르면서 그들의 행동은 단순한 복수의 의미를 뛰어 넘게 된다. 성가대 음악 안에서 행해지는 폭력은 이민자들의 꿈을 막은 모스코를 처벌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한다는 듯이 보이며 그들의 행동이 정당한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돈데보이>는 장면과는 결이 맞지 않는 음악을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세밀한 층위를 만들어낸다.
한편, “시간을 때우려 노래를 불렀다”는 미키의 말처럼, 극 중 인물들은 그들 앞에 직면한 영겁의 시간을 견디기 위해 노래를 부른다. 이민자들과 마을에 남은 사람들에게 노래는 단순한 오락이나 분위기 전환을 위한 것을 넘어 현실을 잠시 벗어나기 위한 것, 곧 낭만의 통로로 기능한다. 그들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마치 그들이 직면한 공간과 시간에서 벗어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민자들은 여전히 기차 화물칸에 있고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이민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짧은 노래가 끝나면 짧았던 희망과도 같은 낭만도 끝나고 그들이 마주한 현실은 더욱 잔인해진다.
유리천장, 투명한 화물칸
이민자들이 몸을 실은 화물칸은 매우 좁아, 넓은 무대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무대 자체는 굉장히 넓지만 이민자들에게 허락된 공간은 좁고 폐쇄적인 철장 구조물뿐이다. 이민자들은 그 안에 빽빽하게 모여 마치 닭장 속 닭과도 같다. 드넓은 공간이 있음에도 나아가지 못하는 이미지는 그들의 현실과 한계를 공간의 대비로 나타낸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유리천장’을 떠올리게 한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이들을 막고 있는 것이 천장뿐만이 아닌 사방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위로도, 옆으로도 나아갈 수 없고 사방은 그들을 가로막는 유리벽과도 같다. 이러한 구조물은 단지 공간을 제한하는 것을 넘어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고자 몸을 던진 이민자들이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또 다른 굴레에 갇힌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제한된 공간은 이민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무대의 다운스테이지에 그어진 철길은 스타트라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 철길을 절대 넘어서지 않는다. 그 철길을 따라 걷긴 하지만 옆으로만 움직일 뿐, 그 길을 결코 넘어서지 못한 채 언제나 같은 자리에 머문다. 철길은 단지 이동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남겨진 사람들이 넘을 수 없는 경계이자 삶의 굴레로 기능한다. 특히 철길은 장면에 따라 사다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물들은 그 사다리를 눈앞에 두고도 결코 오르지 못한 채, 영겁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동의 가능성을 지닌 오브제와 이동하지 못하는 인물들이 교차하면서 ‘그저 일상’을 살아가던 인물들은 강한 비극성을 지니게 된다. 결국 <돈데보이>의 인물들은 기차 안이든 마을 바깥이든, 넘어서지 못한 채 ‘나아감’이라는 말이 멀리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에필로그는 다시 일상의 거리에서 시작한다. 반복되는 장면은 표면적으로는 같은 이야기의 순환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의문스러운 인물이 등장함으로써 그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그 자체로 정체나 퇴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안에는 늘 새로움의 가능성이 깃들어있다. 비록 삶이 멈춰 있는 것처럼, 혹은 무의미한 반복으로 느껴져 그것이 비극처럼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여전히 운동이 있고 변화의 흐름이 존재함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