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공연창작소 공간X홧김에 박문수 프로젝트 <은의 밤>

전쟁의 이미지는 언제나 압도적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 이미지는 폭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폭력과 그 잔재는 시각적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은의 밤>(백미미 작, 박문수 연출, 2025.06.06 ~ 2025.06.15,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은 무대 활용도를 높이고자 하는 노력이 보이면서도 폭력적인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공간은 비어 있기 때문이다. 공간은 조명이나 배우의 움직임으로 일부 채워진다. 시각적 표현을 넘어선 청각이미지는 신체로까지 전이된다. 이런 이미지들을 따라가다 보면 상상력, 그리고 맞물려 전개되는 상황을 통해 전쟁의 감각이 형성한다.

 

사진제공: 서울연극협회 ©양동민

 

교차하는 서사, 닿지 않던 시간

무대 위에는 두 개의 시공간이 공존한다. 조명이 켜지면 아득한 무대 위에는 이다와 아니타가 보인다. 전쟁 중 눈을 다쳐 앞을 볼 수 없게 된 이다는 눈에 천을 두르고 있다. 그리고 전쟁의 충격으로 정신을 놓아버린 아니타. 이다와 아니타는 서로를 놓치지 않으려고 끈을 통해 서로의 몸을 연결하여 같이 움직인다. 한편, 다른 시공간이 보이면 아들, 딸과 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는 도준과 코라가 보인다.

이처럼 무대 위 서사는 과거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다, 아니타, 탈영병의 이야기와 비교적 현재로 보이는 시간을 살아가는 도준과 그의 가족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이 두 서사는 명확히 분리된 채 병렬적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인다. 두 시공간은 무대 위 전쟁 중이라는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다른 세계관에서 각자의 삶이 이어진다. 그렇게 닿지 않던 시공간은 도준을 통해 만나게 된다.

 

사진제공: 서울연극협회 ©양동민

 

두 서사는 아니타의 변화를 계기로 접촉한다. 앞을 볼 수 없는 이다는 아니타의 임신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함께 지내던 마을 아낙의 비난을 통해 아니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니타는 탈영병에게 강간을 당한 것이었으나 이다는 이 사실을 모르는 척 한다. 그러다 탈영병이 떠나려고 하자, 이다는 그 진실을 본인의 입 밖으로 내뱉는다.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던 이다. 이제 이다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다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이던 아니타는 이제야 비로소 움직이려고 한다. 이다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뱉은, 아니타의 외침. “이다!” 절규와도 같은 아니타의 목소리는 멈춰 선 이다의 삶을 다시 움직이게 하려는 절박한 시도였지만, 총성과 동시에 아니타 자신의 삶을 멈춰 서게 했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 도준.

이 장면의 서사만 본다면 비극적으로만 읽힐 여지가 크다. 그러나 <은의 밤>의 무대는 죽음이 앉은 자리에서 새 생명이 일어나는 아이러니이자 순환을 구축한다. 아니타의 죽음이 도준의 탄생과 교차하는 순간, 도준의 몸은 생과 사의 경계에 선 존재가 된다. 이다는 도준을 안고 한 줄기의 빛을 따라 경계 너머까지 도달한다. 어른이 된 도준은 유골함을 들고 이다와 마주한다. 아니타를 품에 안은 도준이 마주한 것은 이다를 포함한 말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었으리라.

 

사진제공: 서울연극협회 ©양동민

 

빈 공간에 채워지는 무형의 전쟁

<은의 밤>이 상연된 무대는 넓지만 대부분 비어 있다. 입체적인 무대를 구성하기 위한 구조물이 바닥에 깔려있고 수풀을 연상케 하는 다리막이 일부 배치되어 있으나, 무대는 여전히 텅 빈 인상을 준다. 이 같은 공백의 이미지는 전쟁으로 인한 붕괴와 그 잔해로 이어지며, 공간 전반에 황량함을 자아낸다.

전쟁은 어디서 폭격이 떨어질지, 언제 적에게 발각될지 예측할 수 없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그 자체로 공포를 유발하며, 무대를 ‘잠재적 위협이 상주하는 장(場)’으로 만든다. 이로써 <은의 밤>에 구축된 빈 무대는 언제든지, 어떤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 예비 된 공간’이자, 무력함과 긴장감이 공존하는 전장의 축소판으로 기능한다. 동시에 이 공백은 전쟁이 남긴 파괴와 고립의 감각을 환기시키며, <은의 밤>의 무대를 두려움과 불모성이 응집된 장소로 만든다.

이러한 공간은 배우와 조명, 음향을 통해 채워진다. 물리적으로 고정된 형체를 갖지 않은 조명과 음향은 무대 한 켠을 차지하는 방식으로 공간을 메우지 않는다. 그러나 무형의 이미지를 생성하여 분위기의 밀도를 촘촘하게 만든다. 이때 음향은 전쟁의 감각을 환기하는 매체로 작동한다. <은의 밤>에서 음향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지는 않지만, 몇몇 지점에서는 강한 인상을 남긴다. 예컨대, 연속적으로 울리는 총격음은 일정한 리듬으로 전쟁의 공포를 청각적 구조로 구현하여 빈 공간을 압도한다. 또한 전장을 가득 채우는 사이렌 소리는 이전의 상황을 덮어버리며, 평범했던 일상의 흐름을 강제로 단절시키는 전환점으로 작용한다. 전쟁이 일상으로 전환된 시점에서도 사이렌 소리는 여전히 작은 평화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게다가 낮게 깔리는 음향의 울림은 객석까지 전달되어 단순한 청각 효과를 넘어 촉각 텍스트로 작용한다. 이로써 관객이 느끼는 전쟁의 이미지는 시각, 그리고 청각으로부터 발현되는 촉각으로까지 이어진다.

 

사진제공: 서울연극협회 ©양동민

 

‘은’은 <은의 밤>을 관통하는 중요한 상징이다. 은색은 총검, 칼날, 폭발 등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들과 연결된다. 하지만 ‘은’은 단지 전쟁을 위한 무기를 상징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극 중에 등장하는 ‘은색 거울’은 자신을 비추는 도구이면서, 깨지면 가장 날카로운 무기로 변한다. 이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이 마주하면서도 끝내는 부서지고, 결국은 자기 자신을 해치는 이야기 구조와도 닮아있다.

하지만 주목할 점은, 이 파편화된 거울의 조각이 도준의 서사에서는 날카롭게 작용하지 않는다. 파괴와 죽음의 사이를 걷는 도준의 걸음걸이는 비교적 덤덤해보인다. 이는 도준이 거울을 비추는 위치라기보다 그 위를 지나가 삶을 이어가는, 그것을 넘어서지는 않지만 그 다음을 걸어가는 존재로 형상화된다.

<은의 밤> 속 인물들은 삶을 이어가려는 의지와 죽음의 그림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반사와 파괴, 두 가지 속성을 모두 지닌 ‘은’을 통해, 이 연극은 인간이 결국 자기 상처에 의해 스스로 다치게 되는 모습을 그려낸다. 이로써 ‘은’은 나를 스스로 볼 수 있으면서도 파괴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이미지로 작용한다.

 


  • 무료정기구독을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메일을 보내주세요.
  • 리뷰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원고를 보내주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