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여행자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글_권서의

 

 

극장 문이 활짝 열려 있다. 극장에 들어서려는 순간 바로 앞에 있는 커튼이 가로막는다.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 관객이 마주하는 첫 번째 이미지이다. 잠시 멈칫했다가, 커튼 옆으로 난 샛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무대 위에 또 하나의 무대가 있다. 그 무대는 하늘하늘한 반투명 커튼에 둘러싸여, 마치 베일에 감춰진 것 같다. 공연 시작 5분 전, 배우들이 그 커튼 밖을 유유히 거닌다. 그들은 긴 포니테일 머리에 수염을 붙인 모습으로, 여성의 몸 위에 남성성을 덧입은 분장을 하고 있다. 남성성을 강조하려는 분장이지만, 여성성을 억지로 지우지는 않았다. 오히려 여성의 몸에 수염을 더해 더 에너제틱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배우들은 말 없이 그 공간을 걷다가, 무대 안으로 들어간다. 배우들의 움직임을 눈여겨 보고 있으면 <시라노 드 베라주라크> (에드몽 로스탕 작, 이대웅 연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2025.04.26 ~ 2025.05.06.)가 시작한다.

 

사진제공 : 극단여행자 ©윤현태

 

부여된 공간과 형성한 공간

극장에 들어서는 순간, 관객은 다른 문을 맞이하고 다른 차원의 문턱을 지난다. 그 길목을 지나가면 무대 중앙에 또 다른 무대가 있어, 차원이 중첩된 공간을 마주한다. 극장에서 제공한 무대 영역, 그 가운데에 창작진들이 구축한 무대. 배우들은 그 사이를 거닐다가 커튼 안으로 들어간다. 극이 시작할 듯한 그 찰나에 배우들의 실루엣이 커튼을 통해 보인다. 이러한 구조는 이곳이 ‘극장’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객석에 앉은 관객들로 하여금 지금 앉아있는 공간이 ‘연극’을 보고 있는 공간임을 그 자체로 설명한다.

공연 시작 직전, 연보라색이 감도는 극장 안과 배우들의 실루엣이 공존하면서 만드는 공간의 분위기는 마치 중세 유럽을 떠올리게 한다. 극장임을 알려준 것과 다르게 마치 중세 유럽을 체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자아낸다. 그러나 극이 시작하면 공간이 알려준 대로 끊임없이 이 곳은 극장이며 ‘내’가 앉은 곳은 객석임을 알려준다.

배우들의 대사는 리드미컬하게 발화되어 일상의 대화라기보다 시를 낭송하거나 웅변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 위에 음악이 덧입혀지면서 배우들의 목소리와 박자감은 공간 전체로 확장된다. 게다가 막이 바뀔 때 마다 “ACT 1” 등의 대사로 알려주는 것, 극 중 맡은 배역의 이름이 없어서 ‘no name’이라 하는 것, 걸을 때 ‘저벅저벅’이라는 의성어 자체를 소리로 내는 것처럼 지문을 말하는 것 등은 이 공연에서 사실주의 연극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러한 무대 언어는 텍스트 자체를 무대 위로 끌어 올려, 창작극이 아닌 ‘원작 텍스트의 연극적 구현’임을 알려준다. 이러한 장치가 과잉되면 관객에게 부담스럽게 전달될 수 있다. 그러나 극단 여행자는 ‘연극’에 기댄다. 관객 또한 ‘연극’이라는 장치를 통해 그 부담감을 한 번 우회하여 전달받는다.

극단 여행자의 이러한 무대언어구사 방식이 새롭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균형감있게 구성되었다. 고전적인 메타연극의 구조에 음악성과 동시대적인 연기, 배우들의 에너지와 앙상블이 어우러지면서 관객이 다른 방식으로 극예술을 감각하게 한다.

 

사진제공 : 극단여행자 ©윤현태

 

교차하는 정체성

무대 위 배우들의 의상은 전반적으로 서양 복식 형태를 따르면서도, 그 재질과 디테일한 요소에서 한국적인 요소를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배우들이 착용한 모자는 우리나라의 갓을 연상시키며, 겉옷과 간혹 등장하는 두루마기는 한복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서양 의복 형식에 한국 전통 소재를 결합한 시도는 17세기에 집필된 원작에 조선의 정서와 그 결을 반영하려는 의도로 읽히며 공연 전반에 걸쳐 전통성이 은은하게 보인다.

이러한 시도는 음악과 움직임에서도 드러난다. 무대 전체를 채우는 배경음악은 서양 클래식이지만, 배우들이 직접 연주하는 장면에서는 한국 전통 악기가 사용된다. 특히 싸움 장면에서는 검무를 연상시키는 동작이 더해져 조선시대 이전의 무신 이미지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처럼 소재, 음악, 몸짓 등에 전통적인 요소가 가미되면서 서양 중세를 배경으로 한 무대에 조선의 정서가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배우들의 신체 표현 또한 이러한 미학적 흐름을 이어간다.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은 여성 배우들이 연기하며, 콧수염을 붙여 남성 캐릭터를 수행하지만 긴 머리는 포니테일로 묶어 그대로 드러낸다. 이는 남성으로 완전히 전환하거나 위장하려는 방식으로 읽히기 보다, 하나의 몸 안에 남성과 여성의 정체성을 공존시키는 시도로 보인다. 배우들은 남성의 언어와 에너지를 구현하면서도 여성의 신체를 감추지 않기 때문에 성별의 경계는 분리되거나 전이되지 않고 유동적으로 공존한다. 극 중 유일하게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유지한은 인물은 록산으로, 그 외 인물은 록산과의 대비 속에서 상대적으로 ‘남성적인 느낌’이 더해진다. 이로써 무대는 성별의 이분법을 넘어, 복합적이고 유연한 젠더 감각이 작동하게 된다.

이 같은 신체 표현은 공간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와도 유기적으로 맞물린다. 극장 안 조명은 화려하면서도 색감이 옅어 전반적인 무대의 질감을 부드럽게 만들어내며 무대 중앙에 보이는 커튼과 배우들의 의상에 드러나는 은은한 광택은 그 감각을 더욱 섬세하게 만든다. 이러한 공간 속에서 공연 전반에 울려 퍼지는 여성의 목소리는 무대의 질감, 시각이미지와 자연스럽게 융화된다. 모든 배역을 여성 배우가 맡은 연출가의 선택은 단순한 젠더 전복이나 실험을 넘어, 무대가 보여줄 수 있는 감각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확장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배우의 몸과 공간, 시각과 청각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무대연출은 감각을 통해 정서를 섬세하게 불러일으킨다.

 

사진제공 : 극단여행자 ©윤현태

 

햇빛을 반사하는 달, 시라노의 대사를 반사하는 크리스티앙

정교하게 직조된 무대의 질감은 공간미를 넘어, 원작의 인물 구도와도 유기적으로 맞닿는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무대 출입구 쪽,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작고 둥근 달이다. 극이 막바지에 이르면, 문과 마주한 반대편 커튼이 열리며 훨씬 크고 밝은 또 하나의 달이 등장한다. 두 개의 달 사이에 위치한 무대는 시라노, 크리스티앙, 록산의 관계를 드러낸다. 말주변이 부족한 크리스티앙은 시라노의 언어를 빌려 감정을 전하고, 볼품없는 외모를 가진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의 외모라는 빛을 받아 자신의 진심을 크리스티앙에 반사하여 전달한다. 록산은 두 남성의 결핍이 서로의 장점으로 반사되며 형성된 감정의 교차점에 놓여있다.

 

극단 여행자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익숙한 이야기 구조 속에 시선의 결을 비틀고 공간의 감각을 섬세하게 만들어내며, 배우의 몸을 매개로 동서양과 성별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든다. 극단 여행자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형식을 통해 다시 한번 사유할 수 있는 장치들을 찾을 수 있는 작품이다. 무대는 질감을 통해 감각을 만드는 공간이 되고 그 안에 배우들은 대사와 신체표현을 통해 리듬을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원작이 가진 정서와 서사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시라노’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치지 않고 어떻게 들려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집약되어 하나의 작품으로 나아간다.

 


  • 무료정기구독을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메일을 보내주세요.
  • 리뷰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원고를 보내주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