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권서의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역사극의 무대는 대체로 일제에 저항하는 영웅 서사, 민족을 배신한 반역 서사, 혹은 폭력이 남긴 끔찍한 비극 서사들로 채워진다. 그러나 <국어의 시간>(오리키 요시 작, 린다전 번역, 하동기 연출, CKL극장, 2025.08.10~08.17)은 그와는 조금 다른 길을 택한다. 이 작품은 한반도 위에서 ‘국어’가 일본어로 강제되던 시절의 일상을 무대로 불러내, 우리가 접했던 방식과는 다르게 비극을 드러낸다. 무대 위 강자와 약자 간 힘의 불균형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로 인해 비롯한 폭력과 참혹함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불균형조차 일상의 공기처럼 스며든다. 그것은 곧, 비극이 일상이 되어버린 풍경이다.

건조하기에 드러나는 질문
<국어의 시간>은 1940년부터 해방 직후, 곧 민족말살정책이 본격화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삼는다.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현장이나 한글신문 폐간을 둘러싼 폭력적인 이미지와 사건들이 무대 위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한글낙서 사건이 벌어지고 인물들과 관객들에게 각인되긴 하지만 비극적 서사의 축이나 폭력적인 장면을 위한 디딤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이 무대 위에 건조하게 제시된다. 이러한 건조함은 단순한 표현방식이 아니다. 폭력이 일상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 그래서 비극을 어떻게 평범하게 둔갑하고 그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둔감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장치이다. ‘사건’보다 ‘생활’과 ‘공간’을 전면에 드러내어 인물들이 보낸 시간을 제시한다.
무대 위를 지배하는 것은 학교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들,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조선인이 겪을 법한 일상들이다. 어떤 조선인은 일본어로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었다. 또 어떤 조선인은 일본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없지만 자식을 위해 집에서도 일본어를 사용해 ‘국어의 집’으로 선정된다. 누군가는 조선어학회의 일원으로, 민족말살정책의 핵심 사건에 가담했지만 무대에서는 미약하게만 비친다.
그들은 그저 살아간다. 그래서 한글낙서 사건은 강점기라는 시대에서 일상의 일부이다. 늘 발생하던 사건이 또 일어났을 뿐이다. 조선어학회 활동도 누군가의 일상일 뿐이다. 그렇기에 무대 위에서 언급은 되지만 주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낸 ‘국어의 시간’은 결코 우리가 감각하는 ‘평범한 일상’과는 다르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낯설고 다른 일상이 건조하게 무대 위에 펼쳐질 뿐이다. 특수성과 일반적인 상황이 교차하는 ‘국어의 시간’. 그 안에는 일본어를 ‘국어’라 인정하되 머리로만 수긍하는 이들과, 온 마음으로 일본어를 ‘국어’라 믿는 이들만 존재한다. 뚜렷한 프로타고니스트도 명확한 안타고니스트도 사라진 자리에서 <국어의 시간>은 우리에게 묻는다. “국어란 무엇인가.”

존재하지만 느끼기 어려운 폭력
<국어의 시간>은 ‘국어의 시간’을 양가적으로 제시한다. 1945년 8월 15일 이전, 극 속 인물들에게 나랏말은 곧 일본어였다. 동시에 그들의 모국어는 조선어, 곧 한국어였다. 어떤 이에게 일본어는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통로였으나 다른 이에게는 자신의 근간을 부정해야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외국어처럼 더듬는다. 이처럼 <국어의 시간>은 일제강점기 한반도 위에서 일어났던 일본어의 강요를 통해, 언어가 생존의 전략이자 동시에 자아를 해체하는 장치가 될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인물들이 경험하는 ‘국어의 시간’은 서로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일본어가 점차 모국어처럼 자리 잡아가는, 제도에 순응하는 시간이었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표면적으로 국어라 불리는 일본어를 끝내 완벽히 체화할 수 없음을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들의 일본어 구사 능력이 유창하든 서툴든 중요한 것은 같다. 모국어는 지워졌고, 일본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언어의 강제는 곧 정체성을 지우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었다. 그 폭력은 피해자 스스로 자신의 근간을 드러내 새로운 것으로 채워넣게 하거나, 그러지 못하면 스스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규철은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일본어는 정신적 혈액’이라 말하며 기꺼이 가미카제 지원에 나선다. 규철은 동화를 통해 자신의 근본을 없애려는 식민 권력의 폭력성을 집약적으로 드러낸다. 그 폭력성은 물리적인 피해도, 정신적인 피해도 없다. 규철은 스스로 식민 권력에 편입되어간다. 일본어가 국어가 된다는 것은 단순한 언어의 변화가 아니라, 조선인의 정체성을 소거하려는 잔잔한 폭력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폭력의 잔해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는 그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국어였지만 이제 국어가 아닌 일본어. 그렇기에 조선어로 ‘만세’를 외쳐야 할 조선인의 피가 흐르는 사람들의 입은 여전히 반자이를 외친다. 이 장면은 국어로 강제된 언어가 남긴 흔적이다. 보이지 않지만 깊이 각인된 폭력의 실체가 드러낸다.

<국어의 시간>은 폭력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여 고통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언어라는 것을 매개로 침잠했던 폭력을 다시 무대 위로 소환한다. 관객은 담담하게 흘러가는 무대의 이미지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기에 더 선명해지는 질문이 있다. 강제로 주입된 언어가 사람들의 일상을 어떻게 잠식하는 것인지, 정체성을 어떻게 흔들 수 있는 것인지, 왜 그것은 해방 이후까지 그 잔해를 남겼는지, 그 당시 조선인들의 마음은 조선인이었는지 일본인이었는지 그리고 스스로 어떻게 인식했을지. 일왕이 항복을 선언했음에도 일본어를 하는 조선인들은 언어가 강제한 무언가의 상흔이다. <국어의 시간>이 무대에서 던진 질문은 역사와 과거를 넘어선 것이다. 언어와 권력, 정체성의 관계속에서 ‘국어’란 무엇이었는지, 지금 우리의 ‘국어’는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