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임진희 <할머니의 언어사전>

글_박병성

 

지난해 두산아트랩에 선정되어 소개된 <할머니의 언어사전>은 작가이자 연출인 임진희가 할머니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을 극화한 작품이었다. 작가의 할머니는 언어를 배우기 이전에 청각을 잃었지만 정식 수어를 배우지 않았다. 대신 소리와 움직임, 표정을 담은 자신만의 언어로 소통해왔다. 두산아트랩 공연은 할머니의 언어를 탐구하는 임진희와 동료들의 이야기를 세미 다큐 형식으로 무대화한 것이다. 올해 공연(2025년 8월 14일~17일, LDK)은 두산아트랩의 공연을 기반으로 하되 할머니의 언어를 관객들과 함께 찾아가는 형식으로 변화시켰다. 전시와 인터뷰 영상 감상, 할머니의 언어를 모티브로 한 움직임 공연, 할머니 감각 경험하기 등 다양한 형식으로 관객들이 직접 할머니의 언어를 감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머시브 형식으로 재탄생한 공연

LDK는 한남동에 위치한 2층 단독주택을 개조한 공간이다. 마당이 있는 2층집이었는데, 1, 2층이 다양한 공간으로 나뉘어져 이머시브 공연을 하기에 적합했다. 40여 명의 관객들은 모두 네 그룹으로 구분하여 두 그룹씩 1층과 2층을 번갈아 이동하며 작품을 경험하였다.

필자는 2층 공연을 먼저 경험했다. 제일 먼저 마주한 공간은 할머니의 물품들을 직접 살펴볼 수 있는 전시였다. 작은 꽃무늬 패턴의 옷 스케치, 앙증맞은 모자, 스카프 등 소녀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할머니의 물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의 할머니는 꽃을 좋아하고 감정 표현이 적극적이신 유쾌한 분이셨다고 한다. 물건 속에서 그 성품이 자연스레 느껴졌다. 이후 전보람의 움직임 퍼포먼스를 감상했다. 할머니가 언어를 표현하는 동작에서 모티브를 얻은 움직임 퍼포먼스였다. 할머니의 언어를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퍼포머의 몸을 통해 주관적으로 변주하여 할머니의 언어에 닿고자 한 시도였다. 할머니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퍼포머의 움직임에서 할머니 언어를 간접적으로나마 감각할 수 있었다.

 

 

이어 배우들이 할머니의 언어를 찾아가며 고민을 풀어내는 극이 펼쳐졌다. 할머니의 언어법을 퀴즈식으로 관객과 풀어가거나, 배우들이 할머니의 입장이 되어 여러 번의 상황극을 선보였다. 상황극이 거듭될수록 할머니의 입장에 가까워지기 위한 장치가 더해졌다. 할머니를 맡은 배우가 헤드폰으로 소리를 차단하고, 다른 배우들까지 소리를 내지 않고 소통하는 식이었다. 할머니가 처했을 상황을 상상하며 그의 언어에 닿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로 할머니의 언어에 닿는 것은 불가능했다.

2층의 관람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오면 가족들의 인터뷰 영상을 관람하고, 다양한 감각을 청각으로 연결시키는 체험을 하였다. 가족의 인터뷰를 통해 할머니가 표현하는 방식을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할머니의 언어에 대한 인터뷰였지만 할머니 개인의 역사와 성품, 그리고 인터뷰이와의 관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결국 한 사람의 언어를 알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이었고, 언어는 타자와의 소통이 목적이므로 관계성이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부엌 공간으로 이동해서는 촉각과 후각을 청각과 연결시키는 경험을 나누었다. ‘듣는다’는 것은 독립된 감각이 아니며 시각과 후각, 촉각 등과 연결된 개인의 경험치가 축적된 감각임을 새삼 깨닫게 했다. 그리고 모든 관객들이 모여 할머니의 언어를 찾아갔던 배우들의 과정을 소재로 한 세미 다큐 형식의 연극을 관람하며 공연이 마무리되었다.

 

 

언어 탐구가 남긴 것

한 개인의 지극히 개인적인 언어 탐구는 처음에는 사적인 목적에서 비롯되었으나, 보편적인 깨달음으로 확장된다. 말(언어)은 소리뿐 아니라 표정이나 움직임, 맥락 등 복합적인 요소로 전달된다. 할머니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할머니의 동작보다 맥락과 표정, 소리의 고저 등 일반 대화에서는 부수적인 것들이 더 중요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할머니의 경우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진정한 소통 행위에서 말은 오히려 부수적일 때가 더 많다. 눈빛, 표정, 떨림 등이 직접적인 말보다 더 진정한 의미를 전한다.

촉각을 청각으로 연결시키는 체험은 청각을 인지할 때 소리의 떨림만으로 인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예컨대 부엌의 차가운 스테인리스 조리도구에 가만히 손대면 서서히 온기가 퍼지며 밥 그룻이 떠오르고 밥 짓는 소리가 연결되기도 한다. 이처럼 청각은 시각과, 후각, 촉각 무엇보다도 개인이 쌓아온 무수한 사적 기억들과 연결된다. 할머니의 언어를 탐구하는 과정은 듣는 것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이었다.

할머니의 언어를 과학자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객관적으로 접근하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과정은 할머니 개인의 삶을 배제하고는 이해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언어는 그 사람의 역사와 이해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자칫하면 연극이 할머니와 주변 사람들의 관계에서 누적되어온 상처와 아픔, 기쁨과 슬픔을 담은 개인사로 치환될 위험이 있다. 인터뷰에서 가족들은 할머니의 언어를 회상하며 개인적인 아픔과 상처를 드러낸다. 작가는 극이 이러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하며 전시와 체험, 클래스, 연극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할머니의 언어를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데 집중하려고 했다.

 

 

할머니의 언어를 찾으려는 탐험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실험이다. 우리가 아무리 할머니에 다가가려고 해도 할머니의 상황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으며, 할머니의 누적된 감각과 경험치가 그의 언어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지극히 사적인 궁금증에서 시작한 연극 <할머니의 언어사전>은 할머니의 언어를 찾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 과정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할머니의 언어사전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올바른 의사소통에 대한 의미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완전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하겠지만 올바른 소통은 타자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동반되었을 때 좀 더 온전해질 수 있다. 소셜 네트워크의 발달로 상호간 의사사통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에 사람과 사람이 온전히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연극은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연극은 할머니를 느낄 수 있는 전시와 움직임, 퍼퍼먼스 등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관객과 함께 할머니의 언어를 찾아간다. 그 닿을 수 없는 실험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진정한 의사소통의 의미이며, 사람과 사람의 관계의 소중함이다. 연극은 관객들의 다양한 참여를 통해 그러한 의미를 스스로 느끼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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