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35회 거창국제연극제

글_이은경(연극평론가)

 

1989년 ‘시월연극제’로 출발한 거창국제연극제(이하 연극제)가 올해로 35년이 되었다. 축제공화국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역에 수많은 공연예술축제가 존재하지만 35년 동안 독창적 정체성을 지키며 관객과 지속적으로 만나는 축제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자연과의 친화, 제도적 경직성으로부터 해방된 새로움의 추구’를 지향하는 아비뇽페스티벌을 벤치마킹한 연극제답게 ‘자연, 연극, 인간’을 핵심 화두로 한다.

 

 

자연 속 공간성이 가장 큰 자산

연극제도 변화와 부침이 있었다. 축제 초기에는 지역 교사들이 활동하던 극단 입체와 경남지역 연극단체 중심으로 운영되었지만 1993년 해외 2개 단체를 초청하면서 ‘거창국제연극제’로 확대되었다. 10주년이 된 1998년부터는 공공지원을 받고, 축제 공간을 수승대로 옮기면서 야외극축제로서의 성격을 갖추었다. 하지만 사)거창연극제육성진흥회와 거창문화재단 간의 연극제 상표권 분쟁과 코로나로 인해 4년 동안 이중개최 되거나 중단되는 파행을 겪기도 했다. 2022년 첨예했던 갈등을 해결하고 재출발한 연극제에는 1만 5천여 명의 관객이 참여하여 연극제에 대한 기대가 여전함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연극제 운영주체인 거창문화재단 사무국장(한인배)과 연극제 예술감독(한갑수)이 공모를 통해 새롭게 선임되면서 올해 연극제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연극제는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 수승대 일원에서 이루어진다. 주변에는 덕유산, 금원산 등 명산이 위치한다. 이 연극제가 다른 축제와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바로 자연친화적 공간성이다. 돔 형태의 축제극장, 수승대 계곡 내에 위치한 수변무대, 수승대 랜드마크 거북바위가 그대로 보이는 거북극장, 대나무 숲이 에워싼 대나무극장, 500년 된 고택 구연서원, 휴식하기 좋은 잔디광장 등 자연과 어우러진 다양한 무대는 극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열린 공간에서 연극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음악, 무용극, 서커스 등 대중적 소통을 고려한 다양한 공연이 이루어진다. 일상에 틈입하는 게릴라성 공연도 진행된다. 수승대를 찾은 관광객도 자연스럽게 연극제를 접하기에 일상과 환상이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공간이 열린다는 것은 공연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기본적으로 프로시니엄극장의 형태를 유지하더라도 열린 공간이 주는 자유로움은 기존 실내극과 다른 관극 경험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공간적 특성이 바로 연극제의 가장 큰 자산이다.

 

 

예술성과 대중성이 어우러진 작품들

올해 연극제는 지난 7월 25일(금)부터 8월 3일(토)까지 10일간 개최되었다. 프로그램은 국내외 공식참가공연, 국내외 프린지공연, 국내 경연참가공연으로 나뉘었는데, 7개국 57개의 단체가 총 76회의 공연을 진행했다. 올해 가장 돋보이는 특징은 초청작의 예술적 수월성이 분명하게 제고되었다는 것이다. 대표적 연극상을 수상한 코너스톤 <요새는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그, 윷놀이>(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 공놀이클럽 <말린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 창작조직 성찬파 <반쪼가리 자작>(서울연극제 대상).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 <오버더떼창:문전본풀이>(부산국제연극제 K-Stage 우수상) 등의 작품과 지역 공공극단의 작품(강원도립극단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 충북도립극단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 외에도 서울 극단인 사다리움직임연구소 <한여름 밤의 꿈>,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나와 할아버지>, 극단 벼랑끝날다 <그래도 조이풀>과 지역 극단인 극단 걸판 <앤ANNE>, 극단 입체 <인공신장실>. 큰들문화예술센터 <오작교 아리랑>, 극단 벅수골 <숲을 지키는 사람들>(2025 경남연극제 금상작)이 국내초청작이었다.

외국초청작은 전쟁의 참화를 피해 기억 속 기타 소리를 따라 집을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대만 더불씨어터극단 <돌아가는 길>, 노부부를 통해 삶의 의미를 성찰케 하는 안데르센의 동명 원작을 공연화한 불가리아 크레도씨어터 <영감이 하는 일은 언제나 옳아요>, ‘전쟁, 죽음, 고립, 무관심’에 관한 짧은 우화로 구성된 오브제극인 벨기에 가르 상트랄극단 <작은 우화들>1)이다. 이처럼 우수한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았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놀라웠다. 낮 시간대에는 대중성이 강한 서커스, 벌룬쇼, 마임퍼포먼스 등 소규모 버스킹 공연을 배치해 일상을 깨뜨리는 극적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축제성을 강화했다. 인구 6만이 채 안되는 작은 도시의 연극제에서 ‘바로 현재’ 우리 연극을 대표하는 작품들을 만끽할 수 있었다.

기존의 연극제는 대중적인 문화관광축제인지, 예술성 중심의 공연예술축제인지 경계가 모호했다. 하지만 올해는 연극제가 예술축제라는 방향성을 분명하게 제시했다. 지역 특산물이나 역사(인물)를 앞세우는 문화관광축제는 지역마다 많다. 하지만 천혜의 자연과 어우러진 야외극축제이면서 예술성을 지향하는 연극제는 국내에 유일하기에 분명한 차별성이 있다. 이러한 방향성이 지속적으로 강화되어야 지역축제에서 벗어나 연극제의 궁극적 목적인 세계적 축제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열린 공간과 관객이 공연에 미친 영향

필자는 공식초청작 대부분을 이미 서울과 지역에서 관극했고, 연극제에서 재관극한 작품은 큰들문화예술센터의 <오작교 아리랑>과 공놀이클럽의 <마른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이었다. 그렇기에 야외공연장이 실제 공연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관객의 반응은 어떠한지에 집중하게 되었다. <오작교 아리랑>은 <견우와 직녀> 설화에 우리의 남북분단 현실을 더해 창작한 마당극이다. 1983년 창단된 이후 진주를 기반으로 연극마을을 조성하고, 마당극에 매진하고 있는 전문단체의 인기 레퍼토리답게 단체의 역량이 집약된 공연이었다. 공연장은 16세기에 세워진 구연서원이었는데, 전통연희에 적합한 공간이다. 우아하고 단아한 구연서원 뒤로 펼쳐지는 거대한 나무 군집 속에 밤하늘이 보이고, 서원 앞 오른편에는 붉은 꽃이 핀 커다란 고목이 서 있다. 구연서원 앞에는 가설무대가, 무대 앞 마당에는 객석이 놓여서 자연스럽게 구연서원의 그림 같은 풍경을 배경으로 공연이 이루어진다. 풍물, 춤, 노래 등 전통연희의 놀이성을 극대화하면서 배우들의 과장되고 희화화된 양식적 연기, 극적 분위기를 쥐락펴락하는 라이브 연주가 어우러져 객석의 반응이 뜨거웠다. 특히 관객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고,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의도적 연출을 통해 마당극의 신명을 풀어낸다. 버나돌리기 퍼포먼스, 혼례의식 퍼포먼스 등을 통해 전통을 현재로 소환하여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공간운영은 고민이 필요하다. 마당극의 핵심 미학은 관객과 등장인물이 어우러지고,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적극적으로 무너지면서 발생한다. 여전히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는 프로시니엄 공연장처럼 운영하여 마당극의 매력이 온전히 살아나지 않았다. 전통연희에 기반한 공연의 경우, 가설무대를 세우지 말고 구연서원 잔디마당에 원형무대를 조성하여 관객과의 난장으로까지 이어진다면 관극체험은 훨씬 강렬할 것이다.

 

 

<마른고추와 복숭아향 립스틱>은 예술적 수월성은 이미 인정받은 작품이지만 지역관객에게 어떻게 수용될 것인지가 궁금했다. 트랜스젠더 소재로 가부장이데올로기의 폐해와 차별‧혐오문제를 비판하는 주제의식과 젠더프리 역할놀이의 형식이 지역관객에게는 낯설 것이고, 저녁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더운 날씨 속 가설좌석에서 2시간에 가까운 공연시간을 견디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대나무극장을 가득 메운 300여 명의 관객들은 4명의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극놀이와 시의성 있는 주제의식에 적극 호응했다. 공연 후에는 ‘흥미로웠다’‘새로웠다’‘재밌었다’ 등 긍정적인 감상평을 토로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연장은 대나무극장이었는데, 가설무대 뒤로 대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숲이 있고, 좌석이 숲을 마주하고 위치하기에 외부와 분리된 극적 환상이 자연스럽게 조성된다. 이 작품은 실내공연 그대로 옮겨왔는데, 실내극장(아르코소극장)에서의 공연보다 넓어진 공간으로 인해 등장인물들의 작은집이 상징하는 편협성·폐쇄성이 오히려 잘 드러났다. 물론 조명‧음향과 같은 디테일에서는 섬세함이 덜했지만 열린공간의 힘은 이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컸다.

 

 

K-연극축제가 되기 위한 노력은?

야외극축제의 숙명은 자연이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 능력 밖의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연극제도 최근 수년간 폭우로 인해 애써 준비했던 공연이나 개‧폐막식이 취소되기도 했다. 올해도 폐막식 임박해서 호우경보가 내린 상황에서 안전상의 문제를 고려하여 폐막식과 축하공연이 취소되었다. 이러한 결정을 구인모 거창군수가 안내했을 때, 관객이 보인 태도에서 연극제에 대한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창군 외곽에 위치하는 수승대까지 빗길을 뚫고 찾아와 축하공연을 기다린 관객들은 갑작스런 행사취소에 분명 아쉬움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불만‧이의를 제기하는 대신 격려의 박수로 주최측을 위로하고, 바로 자리를 정리한 후에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려운 상황을 이해하는 성숙한 관객은 이 연극제의 발전을 견인할 가장 큰 동력이다. 그렇기에 관객이 연극제의 주체가 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먼저 거창군민의 주체적 참여를 유도하고, 거창 관련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 거창군민이 운영의 서포터 이상의 역할을 하여 축제의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는 기획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초청작 모두가 1회 공연이라 지역 관객의 문화수혜 기회 제공에 한계가 있고, 거창군 연극생태계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어렵다. 그렇기에 지역민과 젊은 연극인들과의 협력으로 커뮤니티공연을 창작하여 참여 지역민들을 연극애호가 및 연극제 홍보단으로 육성해야 한다. 또한 연극제 자체에서 지역콘텐츠를 활용한 기획작품을 제작하는 것도 차후에 고민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국내 유일 연극전문 공립학교인 거창연극고 재학생들과 전문연극인들이 협업하여 청소년극을 창작한다든가, 청년연극인의 레지던시를 운영하여 지역콘텐츠와 결합한 이동형 이머시브 연극이나 ‘장소특정연극(Site-specific Theatre)’을 기획·제작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모색할 수 있겠다.

 

 

그리고 개‧폐막 축하공연은 연극제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작품으로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올해 음악과 무용이 어우러진 개막 퍼포먼스나 뮤지컬 갈라쇼 중심의 폐막식은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는 있겠지만 연극제의 지속적인 발전에 기여하기는 어렵다. 점차 이 연극제의 지향점이나 당해연도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을 창‧제작(또는 초청)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또한 연극제 개최 시기에 대한 적극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계속되는 폭염에 올해는 예술가 및 관객에 대한 서비스가 강화되었다. 공연진을 위한 냉방 대기실을 제공하고, 안개 샤워터널을 공연장 주변에 설치하며, 부채 등의 피서용품을 나눠주고, 워터밤 타임을 운영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더위는 예술가와 관객 모두에게 부담이다.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기후위기는 더 심각해지고, 7·8월은 폭염에 불안정한 날씨가 지속돼 연극제가 파행되는 것도 반복될 것이다. 특히 호캉스나 캠핑카 여행 등 피서방식도 다양화하여 수승대의 관광객이 예전에 비해 줄고 있다니 굳이 혹서기를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올해 연극제에는 질식할 것 같은 더위와 상대적으로 부족한 공연 환경에도 불구하고 공연마다 관객이 넘쳤다. 연극제에 대한 지역민의 열의와 자부심은 놀라울 정도였다. 난해한 실험극에도 기꺼이 기립박수를 칠 만큼 공연 자체를 즐기는 분위기였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거창군에서 연극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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