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차성환(연극평론가)
<엔드 월(End Wall)-저 벽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하수민 작/연출, 대학로극장 쿼드, 2025.09.10.~09.28.)는 2021년 4월 평택항에서 청년노동자 이선호 씨가 300kg짜리 컨테이너에 깔려 숨진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작품이다. 실제 사건에 대한 충실한 참조 덕분에 이 극은 노동현장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핍진성을 단단히 확보하고 있다. 산재 사망사고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노동현장의 문제를 고발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분명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이선호 씨를 애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서려 있다. <엔드 월>은 오늘날의 불법적인 노동현장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이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부당하게 목숨을 잃은 노동자를 위한 진혼곡이다.
무대 위에는 일부 분해된 컨테이너가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가로로 놓여있다. 이 배치는 무대에 입체감을 부여하면서 무언가 돌출되어있는 불안감을 전해 준다. 무대 왼편 뒤에는 고공 크레인이 서 있다. 무대 전체 뒷면에는 서로 겹쳐진 채 움직이는 서너 개의 거대한 사각 강철판이 위압감을 준다. 무대는 항만 공사장의 노동현장을 잿빛의 거친 질감으로 생생하게 구현하고 있다.

청년노동자의 죽음을 추적하는 기억의 재생
한국 불교의 전통에서 보면, 죽은 자가 구천을 떠도는 것은 지상에 한이 남아 있어서이다. 이 한을 풀어줘야지 천도(薦度)를 할 수 있다. ‘아성’의 영혼이 컨테이너 근처를 쉽사리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죽음이 미심쩍기 때문이다. 그냥 어쩔 수 없는 사고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던 사고였기 때문이다. ‘아성’은 이곳에서 재생되는 1분 전, 10분 전, 16분 전 기억을 더듬으면서 자신의 죽음에 숨겨진 진실을 추적한다. ‘아성’은 또 다른 산재 사고의 희생자 ‘무명’의 영혼과 만나 각자의 기억 속을 들여다본다. 여기에 러시아 사할린에서 온 한인 노동자 ‘고래아저씨’의 하루 전 기억이 공유되면서 ‘아성’의 죽음에 관한 결정적인 이유를 찾아낸다. ‘아성’과 ‘무명’, ‘고래아저씨’의 기억이 맞물리면서 이들 사이에는 어떤 연대가 이루어진다.
‘아성’은 넉넉하지 않은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지방대를 휴학하고 아버지가 일하는 항만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는 중이다. ‘아성’의 기억 속, 고교 동창 친구들은 그런 그에게 ‘착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모두 함께 언젠가 해외여행에 갈 꿈을 꾸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원청 팀장이 컨테이너 ‘끝 벽’ 아래 나무 조각을 주우라는 부당한 지시에 ‘고래아저씨’가 항변하다가 큰 갈등이 생길 조짐이 보이자 ‘아성’은 그 사이에서 중재를 나선다. 사실 ‘아성’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어서 두렵기도 하지만 큰 다툼을 막고자 시키는 대로 ‘착하게’ 따른 것이다. ‘고래아저씨’도 ‘아성’에게 ‘착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착하다’는 것은 좋은 말이 아니다. 이 세계에 그대로 순응하고 따른다는 얘기이다. ‘착하다’는 노동 현실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요구에 ‘침묵’으로 반응하게 한다. 공사장의 안전규정과 절차는 무시되고 이로 인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을 말단 하청의 노동자(일용직, 외국인 노동자 등)에게 떠넘기는 구조가 결국 ‘아성’을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이다. ‘아성’은 자신이 그 부당함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성’은 반복되는 기억의 리플레이를 통해 ‘침묵’을 깨고 우리가 보고 싶었던 바다를 가로막은 저 벽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끝 벽’을 향한 몰입감의 부족, 익숙한 문학적 수사학
‘무명’이 그 의미를 찾고자 하는 엄마의 빈자리가 곧 ‘아성’의 침묵과 공명한다는 이야기는 연결지점이 끝까지 모호하고 다소 설명적이어서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는다. 과거 기억의 특정 장면으로 회귀해서 비밀을 추적하는 구성이라면 마지막에 그 비밀이 명확히 밝혀졌을 때 이야기의 쾌감을 경험할 수 있다. ‘무명’과 엄마의 이야기가 극 속에 여러 번 삽입되면서 ‘아성’의 메인 서사를 산만하게 만든다. 물론 ‘무명’과 ‘고래아저씨’와 같은 노동자 개개인의 아픔과 고통을 드러내는 것은 노동자의 연대를 암시하는 피날레를 위한 영리한 빌드-업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무명’의 사연이 길어지면서 ‘끝 벽’의 비밀을 추적하던 서사는 속도감이 처지고 서서히 동력을 잃어간다. 120분이라는 러닝타임도 부담감이다. 죽은 노동자의 영혼이 그 장소를 떠나지 못하고 기억으로의 여행을 통해 죽음의 비밀을 추적한다는 매력적인 설정이 빛이 바랜 이유이다. ‘무명’의 개인 서사를 복잡하지 않게 단순하고 선명하게 처리했다면, 마지막 ‘끝 벽’을 향해 몰아치는 ‘아성’의 의지와 정념이 무대 위에 더 크게 남았을 것이다.
‘아성’은 등장인물과 말할 때도 대화한다기보다는 소리를 지르는 방식을 보인다. 물류 항만 공사장의 큰 소음이 그에게 이런 화법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성’이 극의 후반부에 발화하는, 약간은 관념적이고 문학적인 대사는 ‘아성’이라는 청년노동자의 핍진한 신체성에서 살짝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결국 노동현실에 대한 고발과 노동자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노동자와의 연대를 촉구하는 메시지는 문학적인 발화를 통해 마침표를 찍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리고 ‘아성’이 일렬로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 맨 뒤 사람 등에 손을 올려놓고 숨을 불어 넣는 시늉을 하자 그 숨은 연쇄적으로 앞의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사람들은 마치 새 날갯짓을 하듯이 꿈틀거리고, 이 장면은 저 벽을 넘어 자유와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희망을 암시한다. 침묵이 벽을 넘어야 한다는 마지막 ‘아성’의 대사는 문학적이고 낭만적이다. 아쉽게도 여기 ‘리얼한’ 현실 대신에 새가 되어 ‘벽’ 너머로 날아가야 한다는, 익숙한 문학적 수사학에 자리를 양보한다. 항만 공사장의 사실적인 노동현장에서 출발한 극이 결말에 이르러 청년노동자의 죽음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분노의 향방,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
그리고 남는 문제가 있다. 노동자의 죽음은 노동현장에서 특정 개인의 부당한 지시로 벌어지는 것일까. 극 속에서 안전점검을 나온 원청 직원은 원청과 하청의 복잡한 얽힘이 곧 노동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과 그에 따른 ‘손해비용’에 대한 법적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구조라는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결국 ‘아성’의 죽음은 노동 현실에 편재된 신자유주의 자본의 질서 속에서 발생하는 구조적 폭력에 의한 것이다. 안전을 위한 정비와 조치를 묵과하는 것은 노동자의 목숨보다도 경제적 이윤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원청과 하청 직원 모두 이 구조 속에서 똑같이 착취당하는, ‘나무 조각’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분노해야 할 것은 이러한 노동 현실의 사회적 구조이다. 여기까지는 옳다. 이후 극은 원청 팀장과 원청 시설 점검 직원이 하청 일용직 노동자 ‘아성’과 외국인 노동자 ‘고래아저씨’에게 부당한 지시를 내리는 장면과, 하청 직원이 원청 팀장에게 잘 보이려는 장면에 대한 묘사를 통해 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음을 보여준다. 분노의 향방이 괄괄한 원청 팀장과 야비한 원청 시설 점검 직원으로 살짝 옮겨지면서 노동 현실의 구조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 제기가 희석된다. 물론 극 속에서 노동 현실의 구조를 악용하는 원청 소속 직원과 같은 이들에 대해 우리는 분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분노는 원청과 하청, 일용직 노동자 사이에서 부유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노동 현실의 구조 자체를 겨냥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노동’으로 채워져 있다. ‘아성’의 동창 친구들은 기억 속에서 항상 춤을 추고 신나게 파티를 벌이지만 어딘가 경쾌하지 않다. 이들의 춤은 이루지 못한 꿈 대신에 애써 신나 보이려 하는 힘겨운 ‘노동’으로 비쳐진다. 기억 속 인물들이 펼치는 정지 동작과 슬로운 모션 또한 힘든 ‘노동’이다. 항만 노동자들이 지게차를 다루는 것을 배우들이 재기발랄한 마임의 ‘노동’으로 묘사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극 중간에 배우들의 신체 움직임을 활용한 코믹 릴리프가 몇 차례 나오지만 무거운 분위기를 바꿀 만큼 웃음을 불러오기에는 다소 역부족이었다.
<엔드 월>은 노동 현실에 산재한 부조리와 모순을 상세히 파헤치면서 죽은 청년노동자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우리는 노동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노동 현실의 구조에 의문을 가져야 한다. <엔드 월>은 우리가 이 ‘끝 벽’ 앞에서 오래 머물고 질문하고 연대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촉구하는 연극적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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