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생존자프로젝트 <맆소녀>

글_권서의

 

공연이 시작되기 전, 객석에서 바라본 무대는 마치 동화 속 한 장면 같다. 객석이 어둑해지고 막이 오르면 시작하는 <맆소녀(The Silent One)>(본주 작·연출,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2025.09.06 ~ 2025.09.14.). 그림과도 같은 무대에 요정같은 배우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신비함은 더해진다. 배우들의 연기는 일상의 몸짓 속에 낯선 움직임이 섞이고, 이내 무대는 낯섦이 익숙함을 가로지르는 공간으로 변한다. 배우들의 목소리 역시 평범한 대사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일상적인 대화를 하면서, 동시에 언어의 가치보다 질감과 감각만을 남기는 발화를 겹쳐낸다. 이들의 연기는 평범한 것을 낯설게 하기보다, 관객이 평범함이 평범함이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만든다.

 

ⓒ생존자프로젝트

 

사라진 목소리로 알리는 아이들의 가치

프롤로그 장면에 등장했던 배우들은 본극에서 ‘아이들’로 등장한다. 이들은 어떤 이름으로도 불리지 않으며 극 중 역할 또한 ‘아이 A’ 등으로 일컬어진다. 아이들은 까이의 친구들이자 아동노동에 착취당하는 존재들이다. 노동을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말을 하는 행위와 육체만 남아 있을 뿐,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아이들은 무대 위에서 이름도, 목소리도 잃은 채 노동하는 육체만 남아 있을 뿐이다. 신비롭고 동화 같은 이미지의 프롤로그와 달리, 이어지는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럽다. 하지만 까이가 등장하고, 그가 어떤 인물인지 드러나면서 왜 아이들이 이름도 목소리도 잃은 채 ‘존재’만 하는지 서서히 밝혀진다.

아이들은 혐오 받는 집창촌에서 성매매를 통해 태어났다. 아버지의 얼굴을 알지 못하고 어머니는 계속 성을 팔아가며 생활을 유지한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돌봄과 보호로부터 소외되었고 사회로부터 숨겨져야 하는 존재로 취급될 수 밖에 없다. 드러낼 수 없는 존재들이기에, 한 개인·사람·사회구성원으로서 존엄이나 권리, 역할을 배우기보다 담뱃잎을 상품화하는 생산적인 노동만을 배운다. 그들의 가치이자 단위는 ‘사람 한 명’이라기보다 ‘노동력’이 되고 이름과 목소리는 박탈된 채 육체와 육체를 통해 생산하는 노동력만이 남아 있다.

한편, 제거된 아이들의 목소리와 이름은 ‘까이’의 현실을 읽을 수 있는 매개체가 된다.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까이의 현실은 아이들의 침묵과 결핍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관객이 보는 아이들의 세계가 곧 까이의 현실이다. 관객은 까이가 겪는 고립과 단절을 직접 체험할 수 없지만 아이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감각할 수 있게 된다.

 

ⓒ생존자프로젝트

 

신은 죽었다혹은 신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개발도상국에서 소아과 의료 봉사활동을 하게 된 연영은 까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예민하게 반응한다. 말하지도, 듣지도 못할 뿐 아니라 거인증까지 겪는 까이는 ‘아이’들과 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전혀 다른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연영은 까이를 더욱 주의 깊게 살피는 과정에서 까이가 국가에 국민으로조차 등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더 놀라운 점은 까이에게 엄마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까이의 엄마가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아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까이는 ‘엄마의 아이’라기보다 사회로부터 배제된 존재였다. 이름도, 목소리도, 심지어 국민으로서의 지위조차 잃은 까이의 현실은, 무대 위에서 목소리를 잃은 아이들의 모습과 겹쳐져 더욱 비극적인 의미를 띤다.

아이들은 노동력으로 환산되지만, 까이는 무엇으로도 계산되지 못한다. 그러다 결국 까이는 엄마를 통해 매매혼의 대상으로 팔려가면서 까이는 ‘거래되는 몸’이라는 또 다른 단위로 전락한다. 인간으로 태어났음에도 인격을 부여받지 못한 아이들, 그리고 까이의 운명은 이 무대 위에서 처절하게 드러난다. 결국 이 세계에는 까이를 지켜줄 신(神)은 없다. 살아가고 있지만 세상과 단절된 까이의 세계에서 까이가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 뿐이다.

이러한 의미는 무대 이미지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벽 뒤를 아득히 채우는 달, 그 앞에 놓인 무대를 지배하는 ‘ㄱ자’ 형태의 구조물, 그리고 진공 상태 같은 까이의 삶에 드리우는 빛 한 줄기. 그 빛은 구조물과 그 아래 연영과 까이를 비추며 그림자를 만들고 그림자는 달을 가른다. 이로써 무대이자 힌두교 국가를 아우르는 ‘달’은 한 줄기의 빛으로써 잘려진다. 빛은 까이가 좇아갈 수 있는 희망이 아니라, 오히려 역설적으로 까이가 숨을 붙이고 있는 세상을 가르는 기능으로 작동하며 까이의 세계에는 신이 없다는 것을 이미지를 통해 표현한다. 이는 서사에 포함된 까이의 행동으로도 나타난다.

어느 날부터 누군가가 신성시되는 소에게 불경스러운 행위를 한 후 죽이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그 범인은 다름 아닌 까이였다. 까이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까이에게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까이 자신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 까이에게 쥐어진 것이다. 사회로부터 지워졌으나 사회를 위해 이용되는 까이에게는 신의 개입도, 제도의 보호도, 공동체의 연대도 작동하지 않는다. 까이는 더 이상 누군가의 딸이나 친구, 혹은 국민으로 불릴 수 없다. 그는 오직 스스로를 지탱하고자 몸부림치는, 절대적 고립 속의 존재로 무대 위에 남는다.

이러한 극의 흐름은 관객에게 잔혹한 질문을 던진다. 만약 정말 신이 없다면? 사회가 아이들을 지우고, 제도가 인간을 배제한다면, 혹은 제도가 인간을 배제토록 하여 누군가의 수단으로 전락하게끔 악용된다면, ‘인간’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맆소녀>는 까이의 몸과 침묵을 통해 이러한 질문을 집요하게 환기한다. 구원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냉혹한 메시지, 그리고 그조차 쉽지 않은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무대 위에서 까이는 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사회구조 속에서 행해지는 폭력에서 고립된 모든 이들의 얼굴로 확장된다.

 

ⓒ생존자프로젝트

 

100. 끝이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숫자.

연영이 개발도상국에 소아과 의료로 자원봉사를 나온 이유, 까이에게 더 관심을 가진 이유는 연영의 역사와 매개한다. 연영의 어린 시절은 이미 여러 해 전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연영이 겪었던 폭력의 잔해는 여전히 연영의 삶에 머물러 있다. 그런 연영에게 100이라는 숫자는 단순하고 깔끔한 완결의 숫자가 아니다. 언니가 폭력을 당하던 순간, 가해자는 옆에 있던 연영에게 100까지 셀 것을 강요했고 그 숫자를 다 세면 끝날 것이라 말했다. 연영이 숫자를 하나하나 힘겹게 세어갈 때, 그 시간은 언니를 짓무르는 고통의 시간이었고, 가해자에게는 잔혹한 희열의 시간이었으며, 연영에게는 방관과 도망이 겹치는 시간이었다. 연영의 몸은 소아과의사지만 연영의 세계는 여전히 어린 시절이다.

그런 기억을 안은 채 마주한 개발도상국의 아이들. 아이들은 제각각 누군가가 세어 내려가는 1부터 100까지의 시간을 천천히 통과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놓인 까이. 그의 주위에는 100을 향해 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겹겹이 둘러 있었다. 산발적으로 시작되는 까이의 시간인 1. 그러나 까이의 숫자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까이도 모르는 사이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1. 연영의 눈에는 이 끝없는 반복이 보였으리라. 여전히 어린 시절을 바라보는 연영에게 까이는 뫼비우스 띠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영겁과도 같은 시간을 걸어가는 아이였다.

이 장면을 마주한 연영은 이제 더 이상 방관하지 않는다. 도망치지도 않는다. 그래서 무대의 마지막에 연영이 다시 외치는 100은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 폭력 앞에서의 방관과 도피를 끝내려는 결의이자, 아이들이 겪고 있는 100까지의 시간을 끝내기 위한 몸부림이다. 집창촌이 불에 타들어가며 아이들이 걸어가던 숫자가 빠르게 카운트되고, 마침내 연영의 외침 속에서 터져 나오는 100. 무대의 구조물은 무너져 내리고, 아이들을 숫자 속에 가두던 세계는 붕괴한다.

파괴를 통해서만 비워지는 세계. 그래서 더욱 잔혹하다. 그러나 동시에 관객은, 100의 외침과 붕괴한 무대의 이미지 앞에서 새로운 서사가 열릴 수 있는가를 다시금 묻게 된다. 희망일 것인지, 또 다른 폭력과 방관일 것인지.

 

동화 같은 이미지로 문을 열었던 <맆소녀>. 신비로움으로 시작했기에, 이름과 목소리, 존재까지 빼앗긴 채 노동으로 환산된 육체와 경제적 이윤만 남은 아이들의 현실은 더욱 처절하게 다가온다. 그들에게 평범하지 않은 삶은 곧 일상이고, 그래서 관객이 마주하는 정서적 고립과 비극은 한층 선명하다. 관객은 아이들을 통해 ‘평범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잔혹하게 지워질 수 있는지를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프롤로그의 동화 같은 장면을 채우던 배우들의 연기가 미학과 함께 서사를 압축한, 비극을 품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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