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우수진 (연극평론가)
제10회 여성연극제 연출가전으로 극단 초인의 <낙월도>(천승세 작, 이상희 각색·연출, 서울연극창작센터 서울씨어터 202, 2025.10.16.~19)가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만선>으로 잘 알려진 천승세의 1973년 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지난 5월 천승세 희곡열전에서 공연되었던 <낙월도×맨발> 중 <낙월도>만 재공연한 것이었다. 초연은 자칫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보일 수 있는 낙월도의 시공간을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연극적인 방식으로 소극장 후암스테이지에서 밀도 있게 그려냈었다. 그리고 내용이 보강된 이번 재공연에서도 배우들의 에너지는 서울씨어터 202의 극장을 가득 채웠다.

강렬한 연극성
무대는 기본적으로 역동적인 빈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공간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장치 없이 배우들이 긴 박스 모양의 구조물들을 직접 움직이면서 장면에 따라 새로운 공간을 끊임없이 창출해냈기 때문이다. 구조물들은 때로 풍어제를 지내는 용바위가 되기도 하고 배우들을 태운 종선배가 되기도 하였으며, 지그재그로 세워져서 마을의 복잡한 골목길을 만들어내거나 그 자체가 연결되어 하나의 길이 되기도 했다.
장면에 따라 구조물들은 연극적인 상징을 만들어냈다. 연극이 시작하면 무대 뒤쪽에서부터 청백이가 소리(唱)를 하며 객석 가운데에 나 있는 통로를 무대 위로 올라간다. 그러면 무대 양옆에서 배우들이 묵직한 구조물들을 힘겹게 밀면서 나와 무대를 가로질러간다. 청백이의 소리와 어슴푸레한 조명, 자욱한 연기가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배우들이 힘겹게 밀고 가는 구조물들은 우리 인간이 짊어지고 가는 피할 수 없는 운명같이 여겨진다. 그리고 극 중에서 귀덕이가 구조물이 만들어내는 가파른 경사 위에서 떨어질 듯 매달려있던 위태로운 장면이나 팥례가 청자도를 피해 구조물 위로 올라가 아이를 낳고 낳은 아이를 빼앗기는 장면 등에서 구조물은 낙월도 여인을 향해 무섭게 떨어지는 육중한 파도와 같은 삶의 위협으로 다가온다.

당신들의 천국
낙월도는 한마디로 세상과 단절된 지옥이다. 바깥세상의 소식은 최부자와 양서방과 같이 가진 자들만 라디오를 가지고 독점하며, 이들은 배와 땅을 가지고 섬사람들의 목줄을 잡고 지배한다. 그렇게 낙월도는 착취와 강간, 인신매매, 자살, 살인 등이 가득한 비인간의 공간이 된다. 특히 여자들은 가장 취약한 위치에서 경제적으로나 성적으로 억압당한다. 최부자와 양서방은 호시탐탐 마을 처녀들을 유린하거나 제물로 바치고, 이를 견디지 못하는 이들은 삶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살기 위해 살인을 한다.
낙월도는 용바위 수신에게 처녀를 바치는 맹목적이고 원시적인 신앙이 지배하고 있으며 바다라는 원초적인 힘을 지닌 자연에 둘러싸여 있는 단절된 공간이다. 하지만 낙월도는 약육강식의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 놀랄 만큼 닮아 있다. 힘 있는 자, 가진 자들이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약한 자, 없는 자들을 일방적으로 강탈하며 삶의 벼랑 끝으로 잔인하게 몰아가는 것이다. 이번 재공연의 에필로그에서 전태일 관련 뉴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 역시 이를 암시한다.

분기하는 생명력
지옥 같은 낙월도 안에도 삶은 존재한다. 그래서 더 이상 지속 불가능해 보이는 삶의 벼랑 끝에서도 삶의 생명력은 용암처럼 솟구친다. 낙월도 안에서 삶은 죽음을 향해 치닫지만, 바로 그 죽음 한가운데에서 삶이 분기되고 생성되는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태어난 낙월도의 생명들이 그렇다. 소실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가진 아이든 사랑하는 남자와 몰래 가진 아이든, 한번 태어난 아이는 부모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준다. 비록 월순은 아이를 빼앗긴 상실을 이기지 못하고 파도에 몸을 던지지만, 팥례와 덕주는 아이의 미래를 위해 목숨을 건 탈주를 시도한다.
주인공인 귀덕은 낙월도의 생명력을 대표한다. 박현숙 배우의 귀덕은 거친 해풍에 단련된 듯 영민하고 대추 씨처럼 단단하다. 귀덕은 양서방이 아버지 제사에 필요한 가라지 두 마리를 주는 값으로 자신의 몸을 취하려고 하지만, 가라지만 받고 끝내 양서방을 따돌린다. 그리고 이 때문에 분이 난 양서방이 귀덕을 처녀 횃불제의 산 제물로 희생시키려고 했지만, 귀덕은 종천과 함께 비바람과 성난 파도를 뚫고 살아 돌아온다. 그럼에도 귀덕은 끝내 최부자의 소실로 들어가지만, 최부자에게 순종하지 않는다. 그는 금기사항인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바깥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월순과 팥례를 대신하여 더욱 독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벼른다. “니미럴. 낙월도고 지랄이고 누군가 또 왕돌을 쳐들어야한다믄 쳐들어야제.” 그리고 귀덕의 외침은 또 다른 낙월도를 살아가는 지금의 관객에게 울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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