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공연비평] 극단 작은 소리와 동작 <한왕, 바람... 노래가 되다>

글_이우정(평론가)

 

侯準既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 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조선의 제후 준이 왕이라 칭하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준은 자신의 근신과 궁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달아나 한지韓地에 거처하며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하였다. 그 뒤 준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의 한인韓人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

《삼국지 위서》 오환선비동이전

 

 

극단 작은 소리와 동작(이하 극단 작은 소.동.)의 공연 <한왕, 바람… 노래가 되다>는 기자조선-단군왕검으로부터 내려온-이 한반도 내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조선 후기 국학자들의 ‘삼한 정통론’에 근거한다. 이는 유교적 올바름에 뿌리를 두고, 기자조선의 적통인 준왕이 쫓겨 내려가 마한의 군주가 되었으므로 기자조선-고조선-의 맥은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이다. 조선 초의 역사서 《동국통감》에도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서 개국하여 마한馬韓이라 불렀었는데, 백제 온조가 즉위함에 이르러 드디어 그를 병합하였다. 지금 익주益州에는 고성古城이 있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기준성箕準城이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마한이 백제가 된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여기에 백제 무왕이 익주益州로 천도하려고 했던 점, 고구려에서 기자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과 신라의 최치원이 고조선의 8조법을 의미하는 기자의 팔조지교八條之敎를 언급했다는 이야기도 더해진다. 이것으로 보아 한반도 내에 존속했던 왕조로서의 고조선, 즉 기자조선에 대한 인식은, 비록 현재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더라도 오랜 역사적 믿음으로 실재했음을 알 수 있다.

특정 공연의 리뷰에서 이렇게나 한참을 고대사에 대해 서술하고 부연해야 하는 까닭은 이제까지 ‘고조선의 역사’를 공연에서 다룬 사례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조선과 관련된 극화라면, 단지 ‘단군신화’ 같은 상징과 신화의 언어 수준에서 활용되는 정도였을 뿐, 역사적 사실-또는 역사적 사건- 자체가 적극적으로 연극 무대에 수용되지는 않았다. 이는 당연하게도 해당 역사가 현재를 기준으로 너무 먼 시간의 거리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직접 전하는 사료가 남아 있지 않음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고조선의 역사란 후대에 와서 유추된 기록 또는 타국의 기록에 의존하게 될 수밖에는 없으니 말이다. 이 공연을 구성하는 창작진의 손품과 발품이 여타 역사 소재의 극보다 더 많았으리라 짐작되는 부분이다. 부족한 사료와 오랜 세월을 뛰어넘는 이미지를 그려내야 하는 부담스러운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극단 작은 소.동.은 <한왕, 바람… 노래가 되다>(익산 예술의전당 대공연장 | 2025.8.22.~23.)로 고대사의 조각을 무대에서 되살리는 시도를 하였다.

 

 

지역과 역사를 지킨다는 의지

극단 작은 소.동.은 전라북도 익산시를 근거로 하는 소위, 지역 극단이다. 30여 년 동안 많은 부분 한국 창작극을 공연해 왔다. 동시에 지역적 소명 의식을 가지고 극단이 자리한 익산이라는 지역과 지역의 역사성을 최대한 반영하는 공연을 무대화한다. 2009년, 서동과 선화공주를 찾는 극을 시작으로, 세계유산축전 익산주제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인화동의 독립운동을 다룬 <시간의 금고, 인화동의 숨결>, 익산 미륵사 창건 설화를 바탕으로 한 <무왕의 꿈> 등을 잊지 않고 올렸다. 이러한 노력과 의지를 다지는 극단 작은 소.동.이 2025년에 길어 올린 것은 일제강점기보다도, 백제의 중심지였던 삼국시대보다도 이전인 ‘고조선’의 이야기다. 이는 극단이 근거 지역인 익산에 보이는 의지와 진심으로 읽힌다. 앞선 고대사 언급 중 ‘준왕이 한지韓地에 내려와서 한왕이 되었다’에서 ‘한지韓地’가 바로 이 지역, 익산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조선계 세형동검이 바로 익산에서 발굴됨에 따라 한韓을 주도하던 세력과 고조선의 직접적인 계승 혹은 강력한 영향 관계를 가질 것이라는 고고학적 추론이 증명되기도 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하는 극단의 소재 선택은 우리의 고대사와 정신을 현재의 역사에까지 자부심있게 이어놓기 위함이구나를 깨닫게 한다. 극단 작은 소.동.의 공연 <한왕, 바람… 노래가 되다>는 이 맥락 위에 적확하게 놓여있는 것이다. 그렇게 지역성과 역사성을 탐구하고 수호하는 의지로써 발굴한 고대사의 탁월한 소재가 이 공연의 최우선적 의의가 된다.

 

모호함, 그 속에서 좌표 찾기

의미있는 소재와 좋은 의도, 굳은 의지가 분명히 드러남에도 공연에는 모호한 지점들이 공존하여 아쉬움을 남긴다. 우선, 이 공연은 장르가 다소 명확하지 않다. 후원 인사들의 축사에는 이 공연을 ‘연극’이라고 칭하지만 연극이라 하기에는 극의 많은 부분에 -뮤지컬이나 음악극이 그러한 것처럼- 극을 위해 새롭게 작곡된 음악이 동원된다. 물론 연극에서도 삽입곡 등을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나, 극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음악을 몇몇의 배우들이 소리하고 노래하는 것을 보면 뮤지컬이나 음악극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마도 고대의 (연)극은 극과 음악, 그리고 언어와 춤이 유동적이고 복합적이어서 구분되지 않는 상태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든 의문은 어쩌면 근대까지 와서 형성된 장르적 분류의 편견일 수도 있겠으나, 총체적인 것이라고 한다 해도 그것은 각 요소가 합리적으로 교직하였을 때 유효한 것이다. 하나의 장르가 다른 장르에 핑계나 변명으로 기능하지 않아야 함에도 <한왕, 바람… 노래가 되다>에는 일반적인 연극이라 하기에는 음악으로 인해 지체되는 부분이 많고 뮤지컬이나 음악극이라고 하기에는 음악의 수와 양이 빈약-공연시간 전체에 대하여 총 12곡-하다. 이 노래를 뮤지컬 넘버들처럼 부르는 인원이 다소 한정되어 있고 간혹 코러스, 합창으로 활용되니 확실한 음악극, 또는 뮤지컬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뮤지컬의 음악은 연극의 삽입곡 이상의 역할을 가진다. 한 곡 내에서 사건이 빠르게 진행되기도 하며 등장해야 할 대사를 대신하기도 한다. 그러한 부분이 포착되는 이 공연을 다시 연극으로 돌려놓고 보아 살피면 노래가 차지하는 부분만큼 서사의 흐름이 결손되어 있다. 이는 막 사이사이에 성실하게 끼어드는 암전과 함께 드문드문한 장면을 만들어내고 만다.

한 가지 더 가늠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이 극이 고조선의 지역적 이주와 정통성을 다룬 일종의 ‘역사(소재)극’이란 점이다. 김성희에 따르면1) 한국 역사극은 전반적으로 1990년대를 기점으로 거대 담론으로서의 역사를 탈피하여 주변화된 개인이나 일상, 풍속을 그리는 미시 서사로의 변화를 겪는다. 현재의 역사극은 포스트모던의 영향을 받은 다양하고 새로운 스토리텔링 방식을 보이는 흐름에 있다는 것이다. 허나, <한왕, 바람… 노래가 되다>는 이러한 현재적 역사극 흐름에 역행한다. 거대 담론을 말하는 변화 기점 이전의 역사 서술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꼭 맞는 구성 방식을 굳이 극이 따라가 취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극이 표현하고자 하는 목적에 달린 것일테니 말이다. 그러면 결국 이는 이러한 서술 방식이 고조선의 역사를 관객의 인지와 감각에까지 잘 닿게 해 주었는가에 대한 문제, 그것이 공연에서 충분하게 표현되었느냐의 문제로 전이된다.

 

 

과제로 남은 것들

그런데 <한왕, 바람… 노래가 되다>는 안타깝게도 글 첫머리에 인용한 ‘위만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기자조선의 준왕은 한지로 내려와 한왕이 된다.’는 역사서의 몇 문장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저 거대 담론을 시간순으로, 준왕이 주인공인 채 평이하게 펼쳐 놓는다. 시간 순차적인 서술은 극적인 높낮이를 낮추며 단조로운 템포를 만들어낸다. 때문에 준왕의 고조선 세력이 한韓을 침략한 외부인들을 전쟁으로 격파하고 준왕의 인품과 능력에 감화된 한韓 백성의 왕이 되는 것이 그다지 극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극적 진폭과 개연성을 제시할 가능성은 극에 충분히 내재하고 있지만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다. 예를 들면, <한왕, 바람… 노래가 되다>에 등장하는 ‘전쟁’이 그런 것이다. 극 중 ‘전쟁’ 장면은 극의 첫머리에 한 번, 클라이막스 직전 위기의 순간에 다시 한번 등장한다. 이 두 장면이 극적 진폭을 이끄는 스펙터클의 기능을 충분히 해 주었어야 했다. 전쟁의 스펙터클을 무대에 구현하는 방식을 빠르게 떠올리자면, 사람과 물량의 대량 공세가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한왕, 바람… 노래가 되다>에는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적, 인적, 물적 자원이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럼에도 전쟁 장면의 스펙터클, 전쟁의 트라우마를 느낄 만큼의 감각적 표현은 잘 드러나지 못했다. 그 어떤 전쟁 장면에도 극적 낙차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쟁 장면은 준왕의 상황을 절박하게 설정하고-첫 장면에서 위만과의 전쟁- 지도자로서 백성을 살피며 고민하는-한의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참전하는 것에 대한- 장치로 기능하지 못한다. 연쇄적으로 준왕은 고민과 선택에 대한 동력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며, 이에 관객의 감정 전염은 약화된다. 이 부분에서 몇 년 전 공연되었던 국립창극단 <패왕별희>의 전쟁 장면은 시사점을 남긴다. 창극 <패왕별희>에서는 꽤나 나이가 많은 10명 미만의 창극단원이 등장해 한나라와 초나라의 전쟁 장면을 모두 처리했다. 들고 있는 깃발을 크게 돌려가며 무대의 허공을 채우느라 애썼고 여기에 배경 영상을 더했다. 무엇보다도 전쟁 장면의 스펙터클을 구현하고 무대를 꽉 찬 감각으로 이끌어낸 것은 몇 명 되지 않는 나이 든 배우들의 부지런하고 절도있는 움직임이었다. 반면에 인원이 훨씬 많은 <한왕, 바람… 노래가 되다>의 전쟁 신은 그런 감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움직임이 곡선을 그리고 정적이며 강조되지 않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북을 살폈더니, 안무가는 안무와 동선을 놀이판으로 구성했다고 언급한다. 그러고는 특히 K-컬쳐의 바람을 일으켰던 OTT 시리즈 <오징어 게임Squid Game>의 놀이판 대형을 참조했다고 한다. 시리즈 제목인 <오징어 게임>이 놀이의 이름인 것은 맞지만, 한류와 소위 K-컬쳐 붐을 만든 <오징어 게임>은 그 이름을 차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놀이라는 것은 잔혹극의 소재가 될 뿐, <한왕, 바람… 노래가 되다>에서 가져야 할 화합和合과 대동大同이라고 할만한 놀이의 대형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시리즈에서 보여주는 놀이의 대형은 고립孤立이자 대결對決이며, 분열分列에 가깝다. 이 시리즈가 세계인의 기호에 맞아 떨어져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은 놀이 그 자체가 아니라 오락성이 잔혹함으로 바뀔 때 파생되는 기묘한 감각 때문이었다. 이 같은 무리한 선택은 발굴된 고대사와 지역성, 그리고 그 확장성을 K-컬쳐의 붐과 무리하게 연결하려는 생각이 앞서 생겨난 것은 아닌가 짐작해 본다. <오징어 게임>은 해당 공연에 적절한 레퍼런스가 아니다. 놀이의 대형을 활용하고 싶었다면 실제의 놀이와 놀이판의 원형 그대로를 살피면 된다, 굳이 1차로 변형, 가공된 무보舞譜를 활용할 필요는 없다.

 

 

소재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고조선이 우리 지역의 역사였어!’ 라는 괜찮은 발견에 뒤이은 ‘성급함’ 때문이다. 즉 다시 말해, 소재에 집중한 나머지 소재를 가지고 이후 이어나가고 풀어야 할 것을 진중하게 고민하여 찾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것이 대부분 동시대의 공연들이 가진 소재주의의 함정이다. ‘무엇’이나 ‘누구’에 방점을 찍는 극이 아니라 누가, 무엇을 ‘왜 하는가’,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 서술하고 전달해야 함을 간과한다.

‘모든 공연이 반드시 어떠한 입장과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가’라고 반론할 수 있다. 물론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어떻게’와 ‘왜’가, 그리고 제작진의 의도가 빠져있거나 슬며시 지워진다면 공연은 암전으로 분절된 장면 전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렇게 하릴없이 늘어놓아진 장면을 개연성있게 엮고 의미를 불어넣는 것이 무대 공연과 극의 작업이 아니던가. 그저 뚝뚝 끊기는 채로, 멋들어진 소재를 놓아두기만 한다면 유튜브 지역 홍보물과의 차별점은 무엇일까.

지역을 역사화하고 자긍심을 높이는 것 같은, 다소 정치적인 방식으로 공연을 활용할 수도 있음을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극의 구성과정에서 고조선의 준왕이 마한으로 와 한韓왕이 되었다. 라는 단순한 한 문장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면 어떠한 역사적 사실도 영향력을 상실한다. 장과 장 사이를 암전으로 성실하게 끊어내고, 장면과 장면 사이 노래와 동선으로 도려내진 빈틈을 공연에서는 충분히 메워내지 못했다. 이를 채울 방편으로 ‘각 집단의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진다’ 정도의 상상력만 있는 가운데,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지, 정작 중요한 연결과 연상작용은 관객에게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관객이 가져가야 할 것이 오로지 ‘익산에 살고 있어서, 고조선의 후예라서 행복해요’ 정도의 감수성이라면 그 좋았던 소재의 미덕도 가려질 수 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한다.

벤야민은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 것을 뜻할 뿐만 아니라 역사는 구성의 대상이며 지금 시간에 충만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2) 그러니 공연화 한 <한왕, 바람… 노래가 되다>는 소재만 탁월하게 눈에 띄는 지금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준왕은 북쪽으로부터 온 바람이다. 마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바람일 것이다. 그 바람은 모든 것을 앗아갈까 두려운 대상일 수도 있고, 시원하게 현재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소도의 제사장이 반복해서 말하는 ‘바람이 분다’라는 구절은 아마도 이런 의미가 담겨 있을테다. 극에서는 그다지 의미가 실리지 않았던 이 은유는 그저 잰체하는 노랫말처럼 흩어져 버렸다. 그러니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극단 작은 소.동.의 공연 <한왕, 바람… 노래가 되다>는 익산에서 불어야 할 역사극의 새로운 바람이자 동력이 될 수 있다. 다만, 의미를 확실하게 하고 틈을 메우며 강조점을 정확히 찍어낸다면 말이다.

 


1) 김성희, 「역사극의 탈역사화 경향: 역사의 유희와 일상사적 역사쓰기」, 한국연극학 제48호, 2012, 51~84쪽

2) 벤야민, 발터. 『발터 벤야민 선집5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역, 서울: 도서출판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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