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이은경(연극평론가)
에드워드 올비가 “20세기 드라마 출현은 전적으로 체홉에 의해서이다.”라고 격찬한 체홉은 우리 연극계가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사랑하는 작가이다. 하지만 우리 연극에서 체홉의 진면목을 제대로 보여준 공연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 특히 그의 희곡 중 <갈매기>는 체홉 스스로 ‘연극예술의 원칙에 맞는 점은 하나도 없는 작품’이라고 말한 것처럼 가장 수수께기 같은 희곡으로 평가된다. 그의 작품 특징은 극적 사건 없이 일상의 풍경을 그대로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그저 먹고, 마시며, 사랑 타령하고, 날씨와 연극에 관해 떠든다. 오히려 극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니나와 뜨리고린의 동거, 아이의 죽음, 뜨리고린의 배신, 뜨레플레프의 작가 등단이라는 2년 간의 이야기는 간단한 설명으로만 환치된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침묵, 사이 등 드러나지 않은 행간의 의미이다. 그렇기에 이전에 공연되었던 수많은 <갈매기> 공연들에 대한 평가는 단순하게 줄거리 전달에 머물렀는지, 아니면 행간에 숨겨진 서브텍스트를 발견했는지에 따라 극명하게 갈렸다. 충북도립극단의 신작 <갈매기>는 분명 후자로 평가할 수 있는 공연이다.

2층 무대의 상징적 활용, 엇갈린 관계의 시각적 연출
원작 <갈매기>는 한적한 호숫가 쏘린(이병철 분)의 영지에 모인 사람들의 현실과 이상의 충돌을 보여준다. 이곳의 인물들은 어느 멜로드라마보다 복잡한 애정의 삼각관계로 얽혀 있다. 뜨레플레프-뜨리고린-니나, 니나-뜨리고린-아르까지나, 니나-뜨레플레프-마샤, 뜨레플레프-마샤-메드베젠꼬, 아르까지나-도른-뽈리나, 아르까지나-도른-뜨리고린, 도른-뽈리나-샤므라예프 등 관계도를 그리기도 힘들 정도로 복잡한 애정관계로 인해 갈등이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충북도립극단의 <갈매기>는 원작에 내재된 인물들의 엇갈린 관계와 내면의 전경화, 아이러니한 장면연출을 통해 모든 등장인물에게 생생한 성격을 부여한다.
인트로 장면에서 뜨레플레프(오영석 분)가 무대 이층에서 전자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전자기타 연주는 공연 내내 암전이나 장면 간의 브리지 음악으로 활용되어 극적 분위기 형성에 적극적으로 일조한다. 능숙하고, 과장된 연주로 내면의 열정을 보여줄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매우 소극적인 연주로 그의 위축된 심리를 표현한다. 대부분 공연 끝나면 바로 커튼콜이 진행되는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공연이 끝난 후 암전 상태에서 꽤 긴 시간 동안 죽음을 알리는 생명유지장치의 ‘삐’ 소리가 청각을 자극한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성찰케 하는 의도적 연출이다. 이처럼 진부한 예상을 배반하는 독특한 전개가 공연에 대한 집중력을 키운다.

1층의 오케스트라 피트 주변에 니나(이다해 분)를 제외한 나머지 등장인물들 모두 나와서 움직임 없이 앉아 있다. 이들의 시선은 완전히 엇갈려서 서로 마주 보는 인물들이 없다. 마샤(박선혜 분)와 메드베젠코(김태균 분)는 첫 대사를 위해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일어나 움직이며, 다른 인물들은 연극 공연을 위해 모두 퇴장해달라는 뜨레플레프의 요청을 받고서야 일어나 무대 뒤로 퇴장한다. 이러한 서사극적 연출을 통해 이 공연이 몰입이 아닌 무대와 객석 간의 객관적 거리를 의도했으며, 인물 간 엇갈린 관계를 시각적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기에 도른(문창완 분)의 “어째서 모두가 이렇게 예민할까! 왜들 이렇게 다 예민해! 세상에 사랑이 왜 이리도 많아. 저 호수가 사랑의 마법이라도 부렸나 보다.”라는 대사의 의미가 잘 살아난다. 마법의 호수에 취한 인물들은 현실감각을 잃어버리고, 감정에 휘둘리며, 소통되지 않는 관계에 매달린다.
흰 장코트를 입은 뜨레플레프의 전자기타 연주로 시작된 극단 백수광부 <갈매기>와 유사한 인트로이지만 이층 무대로 인해 완전히 다른 의미를 제시한다.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이층 무대는 공연의 콘셉트를 살리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2층으로 확장된 무대는 상하의 높이감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엇갈린 애정 관계를 엇갈린 시선으로 포착하여 인물 간의 관계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층간의 물리적 거리감은 심리적 거리감으로 환치된다. 이층에 존재하는 뜨레플레프와 아래층에 존재하는 인물들과의 물리적 거리는 뜨레플레프의 심리적 거리감을 상징하기에 그의 소외와 고독이 강조된다. 그만이 2층에 위치하는 것도 현실을 딛고 있지 않는 불안정성을 은유한다. 그리고 극적 공간은 호숫가 공연장에서 영지의 실내 공간, 뜨레플레프의 작업실로 이동하는데, 빠른 무대전환으로 완벽하게 구분되는 공간성을 보여준다. 흰색으로 통일된 무대세트는 스크린의 역할도 수행하여 조명 각도에 따라 인물들의 그림자가 일렁인다. 계속 변화하는 그림자의 크기와 움직임은 인물들의 불안정한 내면을 상징한다. 이번 공연처럼 무대의 의미가 강조되는 경우가 많지 않기에 참으로 흥미로웠다.
그리고 이전 공연들에 비해 등장인물의 욕망과 결함이 잘 드러난다. 뜨레플레프의 모성결핍과 열등감, 니나의 애정욕과 허영심, 아르까지나(이채윤 분)의 애정욕과 이기심, 뜨리고린(이기복 분)의 성공욕과 우유부단 등 각 등장인물의 성격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데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뜨레플레프 고통의 원천은 모성결핍이다. 그는 “나는 고독해, 날 따스하게 감싸줄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어. 마치 동굴 속처럼 추워.”라는 직설적 표현을 통해 내면의 상처를 노출한다. 3막에서 니나가 떠나고, 자살하기 직전의 마지막 순간에 “정원에서 누가 니나를 보고 나중에 어머니에게 이르면 곤란할 텐데. 틀림없이 어머니는 괴로워하실 거야….”라는 고백을 한다. 그가 니나에게 기대한 것은 어머니가 주지 않는 위안과 사랑이다. 열등감으로 인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그는 어머니의 관심을 끌기 위해 질투심을 자극하고, 자해하는 미성숙한 인물이다.

등장인물의 내면을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이번 공연에서 새롭게 해석된 장면이 있다. 예를 들어 뽈리나(홍정연 분)와 도른이 질투에 대해 대화하고 있을 때, 주변에서 꽃을 꺾고 있던 니나가 도른에게 꽃을 건낸다. 그러자 뽈리나가 “어머, 참 예쁜 꽃이에요! (집 근처에서 작은 소리로) 제게 그 꽃을 주세요! 제게 그 꽃을 달라구요!” 하면서 받은 꽃을 막 잡아 뜯어 길옆에 버린다. 과장된 행동으로 그녀의 질투심이 적극 표출된다. 니나와 뜨리고린이 죽은 갈매기 옆에서 서로에 대한 호감을 표시하고, 결정적으로 니나가 뜨리고린에게 자신이 걸고 있던 메달을 건낸다. 이때 2층에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뜨레플레프가 둘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는 그 총구를 자신에게 돌려서 총상을 입는다. 앞서 갈매기를 죽인 총을 두 사람에게 겨누는 것은 질투와 분노를 드러낸 것이고, 결국 자해한 것은 자신이 갈매기처럼 될 것을 예상하는 자기파괴적 행동이다. 아르까지나 일행이 모스크바로 떠날 때, 그녀가 하인들의 인사를 받자 야코프(류명한 분)에게 “요리사에게 1루블 줬으니까 세 사람 나눠 가져요.”라고 강조한다. 돈에 대해서 인색하면서 생색내기 좋아하는 성격이 드러난다. 이처럼 인물의 내면 행동과 극적 상황이 적절하게 연계되어 개성의 생명력을 불어넣은 점이 돋보인다.

모든 등장인물의 성공적인 성격 구축, 극적 의미 확장
이번 공연에서 인상적인 것은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들의 존재감을 키운 것이다. 톰 스토파드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죽었다>의 창작의도처럼 이 작품의 모든 등장인물에게는, 심지어 대사가 한마디도 없는 도른의 간병인 올가(이유진 분)에게도 명확하게 존재 의미가 부여된다. 특히 마샤, 도른, 야코프는 이번 공연을 통해 적극적으로 재해석된 인물이다. 마샤는 유명한 대사 “제 삶의 상복이에요. 전 불행하거든요.”으로 인해 주로 무기력하고 불행한 인물로 그려졌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감정에 솔직하고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현실인식이 강한 주체적 여성으로 그려진다. 술과 담배를 거침없이 즐기며, 뜨레플레프를 향한 사랑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희망 없는 꿈에만 매달리지 않고 현실적인 선택을 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마샤에 대한 재해석이 요청되는 동시대 변화를 이번 공연에서 잘 수용한 것으로 보였다. 도른도 감정을 절제하며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는, 유일하게 합리적인 현실주의자로서의 면모가 잘 전달된다. 뜨레플레프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진보적 지식인이며, 아르까지나를 사랑하지만 희망 없는 사랑에 매달리는 대신 감정을 절제하며, 뽈리나의 구애도 적절하게 정리하는 생동감 있는 인물로 보였다.

하인을 모든 사건의 관찰자로 부각시킨 점도 흥미롭다. 체홉은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이라고 했지만 대부분의 공연에서 하인들의 존재감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하인들의 존재가 중심인물과 선명하게 대비되며 묘한 이질감을 조성한다. 특히 야꼬프는 희극적 이완의 역할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욕망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순간에 존재하는 의미심장한 인물이다. 예를 들어 총상 입은 뜨레플레프를 아르까지나가 치료하다가 서로 갈등하며 싸우는 과정에 식탁 위의 포크, 나이프 등이 모조리 바닥으로 떨어진다. 야꼬프가 말없이 식기들을 주우며 식탁을 정리하는 동안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아르까지나와 뜨리고린은 격렬한 사랑싸움을 벌인다. 아르까지나는 위선의 가면을 벗어던진 채 뜨리고린에게 무릎까지 꿇으며 매달린다. 애증의 한복판에 위치한 야꼬프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일을 어떻게든 수행하려고 처절하게 노력하는데, 이러한 모습이 아이러니한 웃음을 자아낸다. 특히 과장되게 자신을 연기하던 아르까지나와 뜨리고린이 욕망으로 나약해진 민낯을 드러내고, 시니컬한 비관주의자 뜨레플레프가 모성을 갈구하는 어린이 같은 모습을 보이는 그 순간을 생생하게 목격하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야꼬프이다. 살아있는 갈매기와 박제된 갈매기 모두를 무대 위에 등장시키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아르까지나 일가의 감정에 휘둘린 낭만적 모습과 하인들의 현실적인 모습이 대비되면서 계급·자본과 같은 사회문제가 환기된다. 작품 행간에 배치된 현실성이 강화되면서 극적 의미가 확장된다. 등장인물의 존재감이 커진 것은 배우의 세심한 연기력이 큰 동력이겠지만 이들에게 행동할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한 연출적 의도가 더해졌기에 가능했다.

동시대성 강화와 정제된 감정 연기 필요
공연 첫날 관극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연기앙상블을 다듬을 필요가 있다. 연기 콘셉트가 감정과잉이 아닐까 할 정도로 아르까지나, 뜨레플레프, 니나까지 공연 내내 흥분상태로 보인다. 몸에 힘이 들어가서인지 대사 하면서 양손을 많이 움직여 시선을 뺏는 바람에 인물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뜨리고린도 손의 움직임이 유달리 많아서 연기가 정제되지 않고 산만하게 보였다. 이 배우들은 앞선 <한 여름밤의 템페스트>에서 대극장 무대를 장악하는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주었기에 이번 배역을 어떻게 재창조할지 기대가 컸는데, 기대에 충분히 부응했다고 하기 어렵다. 긴장과 이완의 리듬감을 살려야 인물에 대한 공감이 제고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뜨레플레프의 자살은 무대 뒤의 총소리로 암시된다. 그가 자살하는 순간 이층 발코니 탁자에 앉아서 카드놀이 하는 다른 인물들의 즐거운 모습이 소리가 소거된 채 행동으로만 보인다. 오히려 시청각적으로 요란하게 연출되면 삶과 죽음의 의미가 선명하게 대비될 것이다.

그리고 익숙한 니나가 아니라 동시대적으로 재해석된 니나였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녀는 나약한 인물이 아니라 욕망의 결과를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성장하는 여성으로도 충분히 해석 가능하다. 니나는 뜨레플레프에게 “우리가 무대에서 연기를 하건 글을 쓰건 상관없이 중요한 건 명예도 아니고 성공도 아니고 또 제가 상상하고 있던 것도 아니고 다만 견뎌내는 능력이라는 걸 나는 알았어요. 이젠 알았어요.”라고 밝힌다. 허영심 가득한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진짜 견디는 능력을 깨달은 자의 자기성찰로 표현되면 좋겠다. 그래야 자식이 죽고, 사랑에 버림받고, 여배우로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뜨레플레프에게 돌아가는 안전한 방법을 선택하는 대신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그녀가 온전히 이해된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도 니나는 여전히 비련의 여주인공이다. 선병질적이고, 유약하며,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적 인물로 표현된다. 개인적으로 니나와 아르까지나는 동일한 인물처럼 느껴져 니나가 나이를 먹으면 아르까지나처럼 되지 않을까 상상하곤 한다. 이들의 연결고리를 찾아보는 것도 니나를 새롭게 해석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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