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임야비(tristan-1@daum.net)
소설가, 연출가(총체극단 ‘여집합’), 클래식 연주회 기획가

11월 호에서 루이즈 베르탱(Louise Bertin; 1805~1877)이 스물다섯 살에 작곡한 오페라 ‘Fausto’를 톺아보았다. 이어 천재 작곡가 릴리 불랑제(Lili Boulanger; 1893~1918)가 열아홉 살에 작곡한 대편성 칸타타 ‘파우스트와 헬레나’를 살펴보자.

릴리 불랑제는 유력한 프랑스 음악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르네스트 불랑제는 최고의 작곡가에게만 수여되는 로마 대상(Grand Prix de Rome)을 받은 파리 음악원 교수였고, ‘음악가의 음악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언니 나디아 불랑제는 훗날 저명한 음악 교육자가 되어 피아졸라, 코플랜드, 바렌보임, 마르케비치, 필립 글래스 등 수많은 음악가를 키워낸다. 이렇게 음악으로 가득찬 환경에서 1893년 태어난 릴리 불랑제는 두 살 때 들은 음악을 따라 불렀으며, 알파벳보다 악보를 먼저 깨우친 음악 영재였다. 그리고 열아홉 살이 되던 1913년에 아버지가 수상했던 로마 대상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역대 최연소이자 최초의 여성 작곡가라는 두 타이틀을 한꺼번에 쥐게 된다. 이때 작곡한 작품이 바로 칸타타 ‘파우스트와 헬레나’다.

칸타타 또는 ‘단막의 오페라’라는 형식에서 알 수 있듯 매우 규모가 큰 작품이다. 헬레나 역의 메조소프라노, 파우스트 역의 테너, 메피스토펠레스 역의 베이스 독창자와 3관 편성 이상의 오케스트라가 필요하기 때문에 연주 인원은 100명에 육박한다.
음악의 외관에 못지않게 내용도 장대하다. SF처럼 시공간을 넘나드는 파우스트 2부다. 릴리 불랑제는 외젠 아데니스의 각색 대본에 음악을 붙였는데, 원작의 비극 2부 중 3막에 등장하는 인물만 같을 뿐 내용은 원작과 매우 상이하다. 아데니스의 대본을 짧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호기심과 욕망에 사로잡힌 파우스트가 고대 최고의 미녀 헬레나를 불러내라고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명령한다. 첫눈에 반한 파우스트가 열정적으로 구애하지만, 헬레나는 자신의 아름다움 때문에 죽어 나가는 남자들을 더는 감당하기 힘들다며 애써 뿌리친다. 곤란해진 메피스토펠레스가 파리스의 유령을 불러내어 헬레나를 다시 고대 세계로 납치하게 하고, 이를 막으려던 파우스트는 패배해 헬레나를 영영 놓치게 된다.
괴테 원작 훼손, 철학적 깊이의 부재 그리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텍스트 때문에 아데니스의 대본은 비평가들의 도마 위에서 난도질을 당했다. 하지만 천재 작곡가 릴리 불랑제의 음악엔 호평과 찬사가 넘쳐났다.

악장 구분 없는 음악은 30분 정도인데 전혀 지루하지 않다. 성악의 가사 없이 오케스트라의 울림만으로도 내용이 그려질 정도로 세 인물의 감정선과 사건의 긴장선이 뚜렷하다. 독창자의 노래가 오케스트라 위에 얹는 솜씨와 강약완서를 쥐락펴락하는 관현악법이 다부지다. 음악사에서 20세기 초는 후기 낭만주의와 현대 음악의 길목이지만, 불랑제는 이루어질 현대 음악보단 이루어진 후기 낭만의 정점에 서서 자신의 파우스트를 한껏 펼쳐낸다. 그래서인지 천재 작곡가의 야심작에는 바그너의 힘과 드라마가 꿈틀거리고 드뷔시의 서정과 색채가 반짝거린다.

https://www.youtube.com/watch?v=uVy5SWwRbDQ&list=RDuVy5SWwRbDQ&start_radio=1&t=1865s

비범한 재능을 지녔지만 극도로 허약했던 릴리 불랑제는 25살에 요절한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다. 게다가 너무 짧았기에 남아 있는 작품의 수도 적다. 더 안타까운 점은 그녀의 역작인 ‘파우스트와 헬레나’가 잊히고 있다는 것이다. ‘요절한 천재’, ‘여성 최초 로마 대상 수상’ 등의 타이틀을 다 떼고서라도 이 칸타타는 20세기 초에 작곡된 그 어떤 작품보다 훌륭하다. 게다가 1부 일색인 ‘파우스트 음악화 작품 목록’에서 2부를 소재로 한 귀하디귀한 음악이니 꼭 기억하고 또 챙겨 들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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