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떨리는 정산 체험기

글_오세곤(극단 노을 예술감독)

 

우리나라 교수들은 대부분 잠재적 범죄자들이다. 연구비를 쓰면서 규정에 맞추느라 이런저런 편법을 저지르지 않는 교수는 아마도 무척 드물 것이다. 연구비 카드는 학교 반경 몇 킬로미터 이내에서만 써야 한다. 또 주말에도 못 쓰고 밤 10시 이후에도 쓸 수 없다. 1인당 얼마 이내라는 조건으로 식사는 할 수 있지만, 술은 안 되는 건 물론이다. 하긴, 연구하라고 준 돈으로 술을 마시는 건 안 되는 게 맞을 법도 하다. 그러나 연구는 주말에도 하고 밤에도 한다. 더욱이 혼자가 아니고 연구원 자격의 대학원생들과 함께할 때도 많다. 그래서 편법이 동원된다. 가장 흔한 게 선결제라는 방법이다. 밤 10시 전에 미리 결제하는 것은 너무 흔한 일이고, 아예 평상시 허위 결제로 액수를 쌓아 놓고 수시로 쓴 만큼 삭감해 가는 방식도 있다. 학교 앞 식당 등에는 아마 그렇게 교수별 출납 장부를 비치하고 있는 경우도 꽤 많을 것이다.

기억하기로 30년 전쯤만 해도 연구비는 일종의 생활 보조금이었다. 그 돈으로 생활비 걱정 좀 덜 하며 연구에 집중해서 논문이든 저서든 결과물만 제출하면 됐지 따로 정산 같은 절차는 없었다. 물론 결과물 제출이라는 최소한의 의무마저 안 지키는 이들도 더러 있었을 것이다. 허술한 제도를 악용하거나 어느 정도의 불이익을 각오한 경우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약속 위반을 방지할 최소한의 제도적 보완은 필요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연구비 신청서에 복잡한 항목들을 채우게 한 뒤 그대로 사용했는지 까다롭게 검증하는 것이, 또 위에서 거론한 카드 사용처럼 엄격한 규정을 강요하며 잠재적 범죄자를 양산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제도 보완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올해 내가 거주하는 지역 문화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아 공연을 하였다. 지원액은 700만 원이었다. 최대 800만 원까지 신청 가능한 예술활동 지원 사업이었는데 700만 원을 받았으니 많이 받은 셈이다. 그러나 과연 700만 원으로 연극 제작이 가능할까? 제대로 작품을 만들려면 적어도 2개월은 연습을 해야 한다. 배우는 2명뿐인 작품이지만 연출, 조연출, 무대감독은 배우들과 거의 내내 함께해야 한다. 거기에 조명과 음향 오퍼도 상당 기간 함께 호흡을 맞춰야 한다. 또 무대장치도 상당히 까다롭고, 의상과 소품도 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야 한다.

공모 요강에서 인건비는 1인당 80만 원 이하로 책정하라 한다. 뭐, 그런 규정이 없어도 그보다 한참 낮게 책정할 수밖에 없으니 그대로 따른다. 고용보험료도 도대체 무슨 실효성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시키는 대로 책정한다. 대관료 등등으로 항목을 채워 신청서를 제출했고 운 좋게 선정이 되었다.

공연까지 거의 3개월을 쏟아부어야 하는데 인건비는 고작 몇십만 원이다. 열정과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전에 지원금으로 공연한 경험자로부터 유료로 하면 복잡한 과정이 추가된다는 말을 듣고는 사실인지 확인할 에너지도 아까워 그냥 무료 공연으로 한다. 덕분에 원작자에게 지불하는 저작권료는 다소 줄었지만, 결국 참여자들에게는 예술적 목숨이 연장됐다는 의미 외에는 거의 보상을 할 수 없게 된 셈이다. 그래도 열심히 준비해서 공연을 했고, 관객들의 좋은 반응도 확인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정산이라는 무시무시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출결의서, 이체증, 세금계산서, 증빙 사진, 사업자등록증, 비교 견적서, 원천징수 서류 납부서(신고증, 지방세/국세 완납증 등), 원천징수 내역서, 계약서, 개인정보 동의서, 신분증, 통장사본 등등의 끔찍한 서류 작업을 해야만 한다. 이런 서류들을 재단 담당자의 지시에 따라 PDF 파일로 제출하면 얼마후 메일로 수정 지시가 내려온다. 공연할 때보다 더 가슴을 조이며 메일을 읽고 스스로 지진아가 된 듯 여기며 서류를 보완하고 PDF 파일을 보내기를 반복한다. 그리고는 드디어 직접 방문하여 실물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정산보고서와 함께 통장거래내역서, 결과보고서, 설문조사서, 사업물기록동의서, 홍보물 원본, 지출증빙자료 등을 순서대로 정리해 제출하라고 한다. 이에 대한 점검이 끝나고 문제가 없으면 마지막으로 그동안 발생한 은행 이자 46원을 반납하라는 메일이 온다. 역시 지시대로 따름으로써 기나긴 과정이 끝난다.

이렇게 공연보다 100배, 1000배 어려운 정산을 마치고 나면 간담회에 참석하라는 지시가 다시 내려온다. 생각 같아서는 간담회 때 정산 절차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고 싶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지는 두고 보아야 한다. 우선 과연 이 항의를 들을만한 책임자가 그 자리에 올지가 불확실하다. 아마도 담당자에게는 아무리 따져봐야 자신은 정해진 대로 했을 뿐이라는 답변만 돌아올 것이다. 아니, 어쩌면 말한 사람이 무색하게 망신만 당할 수도 있다. 예술인들은 왜 받을 줄만 알았지 그에 따른 정당한 절차는 소홀히 하느냐고 준엄한 질책이 날아올 수도 있다. 1박 2일로 시간을 준다면야 토론을 하든 교육을 하든 어떻게 해보겠지만 한두 시간 동안 여럿이 모여 돌아가며 발언하는 간담회에서 무슨 깊은 얘기가 가능하겠는가?

지원금이 700만 원이 아니라 7000만 원이라면 자세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혹시 대표가 참여자들에게 갈 인건비를 착복하지는 않았는지, 어떤 부분의 비용을 과다 책정한 뒤 슬쩍 돌려서 공연과 관계없는 엉뚱한 곳에다 쓰지는 않았는지 등을 살펴서 만약 부정이 드러나면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700만 원이라면 공연을 한 것으로 충분히 입증이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소액 지원에 대해 별의별 정산 자료를 다 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분명 심각한 낭비이다. 예술인도 힘들고 담당자도 힘들다. 만약 제도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면 제도를 고쳐야 한다. 법이든 조례든 당장 개정해야 한다. 그런데도 어쩔수 없이 복잡한 과정을 고수해야 한다면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정산이라는, 예술 행위가 아닌 일로 예술가들이 모두 어려워한다면 그걸 도와주는 것도 지원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이렇게 까다롭고 복잡한 정산 절차가 재단의 대표나 팀장 등 책임자의 판단에 의한 것이라면, 또는 담당자의 불필요한 완벽주의 때문이라면, 그들은 예술 지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예술은 수많은 실패를 무릅쓰는 무모할 정도의 집요함과 고도의 집중력, 또 극도의 예민함을 필요로 하는 분야이고, 그래서 예술가는 예술 이외에는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무능력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우리 헌법에서 특별히 예술가를 법적 보호 대상으로 명시한 것도 그런 특성 때문일 것이다.

예술은 국가와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 요소인데 그것을 담당하는 예술인들은 일상의 삶에서부터 취약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 일상에서 낙오하거나 예술을 포기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는 게 헌법의 취지가 아니겠는가? 아마도 중앙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나 각 지역의 문화재단과 같은 예술지원기관의 설립 목적은 이러한 헌법 취지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부디 진정한 예술 지원이란 무엇인지, 예술 지원 기관의 책무는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고 그에 맞는 실천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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