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공연비평] 극단 예도 <거제도>

연극이 꺼내 온 도시의 기억, 극단 예도의 <거제도>

글_최영주(연극평론가)

 

  1. , 거제도!

거제도 방문은 내게 첫 경험이었다. ‘왜 지금껏 이곳을 찾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품은 채 네 시간에 걸친 여정을 시작했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을 실감하며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예상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섬이란 고즈녁하고 자연친화적이라고 여겼단 막연한 생각과 달리, 거제도는 고층 빌딩과 정비된 도로, 깔끔하게 정돈된 해안 마을들이 어우러진 활기찬 도시였다. 대한민국 유일의 자치도시라는 말이 실감났다. 특히 다양한 동남아 출신 외국인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점은 이곳이 국제적인 산업 도시임을 실감하게 했다. 조선 산업이 기간산업이라는 사실도 이 도시의 현재를 설명해주는 듯하다.

저녁에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소재로 한 공연 <거제도>를 관람할 예정이었기에 공연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먼저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을 찾았다. 거제시는 과거의 역사적 경험을 유적공원 형태로 도시 공간 속에 보존해두고 있었다. 이곳에는 당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던 17만 명의 공산 포로들과 미군정 간의 상황이 시각예술 설치물로 재현되어 있었다. 미디어를 통해 접해왔던 이야기가 현장의 설명과 어우러져 입체적인 서사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대 산업 도시로서의 거제도’가 과거 한국전쟁기의 포로수용소 기억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그리고 공연 <거제도>는 그 연결 지점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을까? 이 공연이 단순한 지역 소재극을 넘어서, 지역의 기억과 현재의 정체성을 어떻게 입체적으로 소환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 제공: 극단 예도

 

  1. 극단 예도

36년의 역사를 지닌 극단 예도의 생명력이 새삼 흥미롭다. 연극 관련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탄탄한 서울에서도 4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극단의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극단 예도는 ‘예술의 섬’이란 의미를 담고 1989년 고등학교 교사이던 최태황이 지인 여섯 명을 모아 동아리모임과 같은 작은 극단으로 출발하였다. 최태황은 이번 공연 <거제도>에 노인 역할로 출연 중이다. 창단 당시의 단원들 일부가 극단에 남아 그 동안의 세월을 버텨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예도에는 70대에서 20대 사이의 세대를 아우르는 35명의 단원이 활동하고 있다. 그 규모가 만만치 않다. 현재 예도는 거제문화예술화관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정극을 주로 하면서 한 해 평균 5-6편의 공연을 올리고 있다.

예도가 지역의 대표 극단으로 성장할 수 있던 것은 다양한 연극상을 수상하고, 이를 됫받침하는 다양한 지원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2007년 <흉가에 볕들어라>로 경남 연극제 대상과 연출상 연기상을 거머쥐었고, 같은 해 전국연극제에서 금상과 연출상, 연기상을 수상하였다. 2012년 <선녀씨이야기>은 극단에 대한민국연극제 단체대상(대통령상)을 선사하기도 했다. 연극 <거제도>는 27회 경남연극제 대상과 제27회 전국연극제에서 금상을 수상하면서 서울까지 그 입소문이 난 터이다. 현재 예도는 1991년 입단하여 34년의 세월을 극단과 함께 해온 이삼우가 대표이자 연출가로 극단을 이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오래된’ 극단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극단이라는 점일 게다. 예도는 단지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지역의 역사와 공동체적 서사를 무대로 가져와 동시대 관객과 소통하는 실천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역 극단의 존재 이유이자, 동시에 가장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극단 예도의 궤적을 찾아보니 두 가지 특성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극단의 공연사가 번역극이 아닌, 창작극 위주로 전개되어 왔다는 점이다. 굳이 창작극만을 추구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지만, 그 같은 사실은 극단이 발표해 온 과거의 공연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선녀씨 이야기>(2012년 전국연극제 대상), <나르는 원더우먼>(2018년 대한민국연극제 금상), 노동자의 이야기를, <꽃을 피게 하는 것은>(2019년 대한민국연극제 대상), <달호수를 찾아서>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공연을 통해 가족의 해체나, 노동자 문제, 교육 문제, 그리고 환경 문제 등 한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술의 공적 역할 역시 진지하게 챙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뮤지컬 <거제도>는 이러한 과제에 대한 또 하나의 응답으로 읽힌다. <거제도>가 예도의 레퍼터리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2009년 초연 이후이다. 10년이 넘은 여정을 거치고서 2025년 지역대표예술단체 지원사업 선정을 통해 대극장용 창작 뮤지컬로 재탄생한 것이다. 예도로서는 지난 5월 무대에 올린 <0.75 청년시대>에 이은 두 번째 대형 뮤지컬이다. <0.75 청년시대>는 올해 11월 서울 구로창의아트 홀의 공연을 앞에 두고 있다. 두 뮤지컬 모두 지원사업 선정을 통해 제작된 것이다.

 

사진 제공: 극단 예도

 

  1. <거제도>-텍스트에서 무대로

이번 공연 <거제도>는 2006년 손영목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2009년 초연된 연극 <거제도>를 거쳐 2025년 만들어졌다. 원작 『거제도』는 18장으로 구성된 장편 소설로 역사의 기록에서 누락된 인물들을 소환하여, 전쟁포로와 피난민, 그리고 그 공간에 살았던 거주민의 세 겹의 서사를 품어낸다.

소설에서 플롯의 초점은 1951년 2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있었던 포로들의 일상이다. 사실, 수용소 안에서 벌어진 폭력과 통제, 미군정의 시선, 포로들의 처절한 삶 등은 쉽게 다루기 어려운 주제이다. 서술자는 수용소에서 있었던 폭동과 폭력에 대해 서술하며 구체적인 인물들을 호명하며 현장에 대한 처절한 증언을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작가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댄 여타의 전쟁 서사와 달리 친공포로 뿐 아니라 반공포로 역시 폭력과 학살에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포로수용소는 전쟁 포로와 피난민, 거주민의 세 겹의 서사가 만나는 하나의 접점이랄 수 있다.

이삼우가 재구성한 대본은 세 겹의 서사 가운데 전쟁 포로들에 대한 생략하고서 포로수용소로 인해 겪게 된 거제도민의 삶의 변화를 옥씨네 가족사를 초점으로 있다. 이로 인해 공연은 거시적인 국가 차원의 관점 대신에 전쟁과 미군정이 어떻게 일반 개인들의 삶을 왜곡하고 파괴하는 지에 집중한다. 공연은 마을 사람들이 “달팽이처럼 느리던 마을”에 파도가 싣고 온 “검은 괴물”을 발견하며 시작된다. 전쟁이 만들어낸 포로수용소는 조상 대대로 일구어 온 땅을 빼앗아 옥씨네 가족을 생존의 나락으로 내몰았고, 아들마저 전쟁터로 끌어들인 뒤 장애를 남기고서야 섬으로 돌려보내준다. 이런 와중에 유난히 똑똑한 큰딸 상은이 피난민 사업가 임덕현을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며 가족은 모처럼 웃음을 되찾고 희망을 갖게 된다. 그러나 상은이가 신혼 여행길에 남편 앞에서 미군으로부터 몹쓸 짓을 당하고 고향을 뜨면서 희곡은 비극적인 반전을 맞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실성기가 심해지던 엄마 이옥례가 정신을 붙잡지 못하고 집을 찾아 수용서로 뛰어들고 총에 맞아 죽는 시점에서 옥씨네 가족은 비극적 파국을 맞는다. 이상우가 갈무리한 플롯은 농사와 어업을 생업으로 살아온 거제도 사람들이 전쟁포로수용소의 건립을 기점으로 겪게 된 사회적 변화와 혼란을 배경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옥씨네 가족들이 겪는 비극을 집중력 있게 그려내고 있다. 역사에 기반한 장편 소설이 완결된 비극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사진 제공: 극단 예도

 

  1. 뮤지컬 <거제도>의 미학적 성과

연극에 익숙한 관객으로서 일반적인 뮤지컬의 구조는 비교적 단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뮤지컬의 전형적인 구성은 보통 선과 악의 극명한 갈등, 운명적인 로맨스, 그리고 감초 역할을 하는 코믹 캐릭터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요소들은 기승전결의 뚜렷한 흐름 속에서 주인공이 시련을 극복하거나 희생을 통해 사회적 정의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음악은 극의 주제를 강조하고 관객의 감정을 이입시키는 데 기여하며, 춤은 시각적 스펙터클로 관객의 오감을 자극한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뮤지컬은 ‘대중’ 예술로서의 속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뮤지컬의 전형적인 문법과 비교할 때, <거제도>는 그 틀에서 벗어나 있는 작품이다. 이는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연극을 거쳐 뮤지컬로 확장된 제작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 소설, 연극, 뮤지컬이라는 각기 다른 장르의 특성이 융합되며 이질적인 형식이 발생한 것이다. 즉, 소설, 연극, 뮤지컬이라는 매체 간의 전환은 장르적 경계를 허물며 독특한 미학을 만들어낸 것이다.

<거제도>에서 중심 갈등은 인물 간의 대립보다는 외부 사건에서 기인한다. 주인공 옥치조가 맞서는 것은 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만들어낸 생존의 위기다. 그는 인내심 있고 가족을 지키는 선한 인물로 보이지만, 실제로 사건을 주도하거나 극복해내는 행위자는 아니다. 서사를 이끄는 주요 사건들은 그의 선택보다 역사적 현실에 의해 제공된다. 한편, 인물들 중에서 능동적으로 상황에 반응하며 성장하는 인물은 그의 딸 상은이다. 옥치조가 거제도의 역사적 현실을 상징한다면, 상은은 그 역사가 드라마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상은이 미군에게 성폭력을 당하는 장면은 이 공연의 플롯의 흐름을 극적으로 바꾸는 반전이자 파국을 초래하는 사건이 된다. 서두에서 상기가 나래이터로 등장하여 한 말, 이 공연이 그의 아버지 옥치조에 관한 이야기라고 설명하였지만, 사실 이 공연의 중심인물은 상은이라고 할 수 있다.

상은이 식구들 몰래 일을 시작했던 다방 장면은 어디서 본 듯하지만, 연출가는 이 장면의 진부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희극적으로 접근하면서 오히려 그 진부함을 유희한다. 또한 상은은 비극적 플롯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덕현과 함께 유쾌한 장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중년의 남성이 젊은 여성에게 순정을 바치는 설정은 연극적 전통 속에서 코믹하게 소비되며, 이 장면을 연기한 이영은 배우는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강조한다. 이들의 로맨스는 환상적인 이상향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따스함을 전달하며, 이러한 정감은 이후 비극적 전환(상은의 미군에 의한 피해, 옥례의 죽음)을 더욱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거제문화예술회관의 많은 관객은 이미 소설이나 연극을 통해 이 이야기를 접했거나, 혹은 지역의 역사적 사실로서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공연에 대한 열정적인 반응은 아마도 내용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거제도의 과거가 공적인 공연을 통해 재현되고 담론화된다는 사실에 대한 감흥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이번 공연은 지역성과 예술성을 결합한 데서 의미를 갖는다.

연극 <거제도>에서 각색, 연출, 연기를 도맡아 진행했던 이삼우는 이번 뮤지컬에서는 연출에만 집중하며 과감한 시도를 감행하였다. 그는 음악 감독 박수빈, 안무 감독 고재경과 협업하며 장르적 전문성을 확보했고, 이 과정에서 효율적인 협업 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뮤지컬은 음악과 춤이 하나 되어 찰나의 미학을 구현하는 예술이다. 음악은 정서를 자극하고, 춤은 그 음악을 몸으로 번역하며 무대 위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거제도>에서도 음악과 춤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며, 과거의 이야기를 현재의 몸짓과 감정으로 변환해 관객에게 전달한다.

작곡을 맡은 박수빈은 이전에도 예도 소속으로 작품에 참여했으며, 이번 공연애서는 본격적으로 뮤지컬 양식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무대는 서구 팝과 클래식, 한국 가곡, 군가, 전통 음악 등 이질적 장르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며, 장면마다 다양한 리듬이 어우러져 생동감 넘치는 무대를 완성한다. 한편 마임 아티스트이자 안무를 맡은 고재경은 장면에 맞는 안무뿐 아니라, 배우들의 신체를 통해 조형적인 미장센을 구성한다. 상징적 무대 장치와 배우의 움직임이 어우러지며 공간을 시각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은 연극적 감성을 뮤지컬 무대에 성공적으로 이식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비록 주요 배역은 전문 뮤지컬 배우들이 맡았지만, 예도 단원들은 오랜 연기 경험을 바탕으로 조연으로서의 존재감을 발휘하며 무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전문 배우들의 가창력은 물론, 예도 단원들의 노래와 춤 실력 또한 돋보였으며, 고재경의 연출은 뮤지컬 무대에서도 연극적 감수성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해 공연의 미적 완성도를 높였다.

 

사진 제공: 극단 예도

 

  1. <거제도>, 지역 공연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다

거제시의 지역 극단 예도가 선보인 뮤지컬 <거제도>는 지역 예술계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이뤄냈다. ‘지역대표예술단체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지원을 받은 이번 공연은, 지난 15년간 단원들이 꾸준히 쌓아온 경험과 헌신이 고스란히 녹아든 무대였다. 스토리와 음악, 무대 연출 등 모든 요소에서 기대를 뛰어넘는 완성도를 보여주며, 관객들은 극장을 나서는 길에 마치 축제를 다녀온 듯한 만족감을 느꼈다.

이 공연은 특히 전쟁포로수용소라는,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잊혀졌던 지역의 역사를 생생하게 소환하는 데 성공했다. <거제도>는 소설을 원작으로 하되, 옥치조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함으로써, 관객에게 전쟁의 기억을 단지 하나의 ‘사실’이 아닌 ‘삶의 이야기’로 다시 전달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당시 농어업 전통 사회에서 현대 도시 사회로의 전환기의 공간이 경험한 공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한 관객이 “거제 사람이면 다 봐야 하는 거 아냐?”라고 말했듯, 이 공연은 지역 정체성을 환기시키는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처럼 느껴졌다. 관객들은 공동의 기억을 되살리는 이 공연을 통해, 각자 흩어져 있던 개인의 기억과 지역 사회의 역사 사이의 연결고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공연은 단지 과거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 이 도시에 살아가는 다양한 시민들에게 ‘공동체로서의 감각’을 일깨운다. 특히, 과거 거제가 겪었던 아픔과 성장의 역사를 예술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산업화와 국제 해운도시로의 발전 과정에서 단절되었던 지역의 정체성과 다시 접촉하게 만든다. 이는 단지 토박이 시민뿐 아니라, 직장이나 생계 등 다양한 이유로 이곳에 정착한 외지인들에게도 의미 있는 경험으로 다가간다.

그들에게 거제도는 이제 단순한 ‘생활의 터전’이 아니라, 이 땅의 사람들이 함께 겪었던 역사적 순간을 공유하는 ‘공동의 공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한다. 그 공간에서 공연은 예술의 형식을 통해 정서적 연대와 장소적 소속감을 만들어냈다. 뮤지컬 <거제도>는 지역 예술이 단순한 ‘문화행사’를 넘어, 지역 사회의 기억과 정체성, 공동체의식을 연결하는 중요한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지역 공연예술이 나아갈 방향에 있어 소중한 사례로 남을 것이다. 또한 거대 산업 도시가 어떻게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예술을 받아들이고 생성적인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전범이 될 법하다.

 


  • 무료정기구독을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메일을 보내주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