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극단 <태풍>

 

글_백승무(연극평론가)

 

국립극단의 공연 <태풍> 팜플렛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언어적 깊이와 상징을 현대적 감각으로 되살려내는 번역”. 과연 그런가? 이 작품에는 “청하건대”, “하늘이여” 같은 구식 번역체 표현이 즐비하다. 이런 표현만 있다면 하나의 문체로 인정할 법하다. 하지만 그 번역체가 일상어와(혹은 “현대적 감각”과) 뒤섞여 있다. 종잡을 수 없는 번역이다. 번역 어투는 화술을 결정한다. 어떤 배우는 번역체 특유의 화술을 구사하는 반면, 어떤 배우는 일상적 화술을 구사한다. 이런 비일관성은 생선가시처럼 공연감상을 불편하게 한다.

 

사진 제공: 국립극단

 

어투와 화술은 무대의 정서 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 특히 이런 큰 무대에서는 대사도 잘 안 들리고 배우 표정도 잘 안 보이기 때문에 편안하고 정확한 듣기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일관성 없는 어투와 화술은 듣기를 방해한다. 듣기에서부터 관객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 직관성이 부족한 번역도 듣기의 장애물이다. 기억나는 한 사례: 세바스찬의 대사 중 “The devil speaks in him”을 “뱃속에 악마라도 든 거야?”로 번역했다. 이런 문장이 관객의 귀에 직관적으로 쏙 들어올까? 그리고 세바스찬은 원작의 화해 정신에 도통 용해되지 않는 인물이다. 이런 어조가 그에게 어울릴까?

 

사진 제공: 국립극단

 

팜플렛은 이렇게 말한다. “무대는 폭풍의 잔해가 아니라, 새로운 이해와 관계가 태어나는 자리로 변모”할 것이다. 과연 그런가? 걷기 불편하고 움직임을 제한하는 이 초록 동산은 배우에게 어떤 “새로운 이해와 관계”도 제공하지 못한다. 무대는 미적 가치 못지않게 배우 연기의 원활함도 중시해야 한다. 초록 동산은 배우의 몸을 구속하고 방해한다. 동선도 가로막고, 멀뚱멀뚱 서있게 만든다. 배우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보장하지 못하는 저 울퉁불퉁한 경사가 “듬성듬성 풀이 자라는 황무지 같은 이 섬”을 “사랑이 꽃피는 낙원”으로 변신시켜줄 거 같지는 않다. 경직되고 억제된 배우의 몸에서 사랑은 피어날 수 없다.

무대 전체의 일괄 조명도 배우 연기에 집중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유토피아 같은 낯선 풍경은 좋지만, 배우를 주목하지 못하게 만든다. 구겨진 천 조각 배경도 배우 미장센을 망치고 있다. 후면 색 조명 때를 제외하고, 무대 배경은 배우를 돋보이게 하질 못한다. 어디를 서도 배우 미장센은 아름답지 않다.

 

사진 제공: 국립극단

 

팜플렛은 “그녀의 용서는 세상을 되살리고,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시키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힘”이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참 어려운 일이다. 한 사람의 용서가 과연 세상을 되살릴 수 있을까? 불원지간의 망가진 관계까지 소생시킨다고? 무엇보다 관객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강력한 우주적 힘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과연 그런가? 프로스페라는 끓어오르는 복수심과 너그러운 용서 간의 큰 심리적 격차를 보여주지 못했다. 끓어오른 적도, 모든 걸 내려놓은 적도 없다. 용서는 함홍광대(含洪廣大), 즉 포용(含)의 용기와 너그러움(洪)의 여유, 넓은 지혜(廣)와 패기 찬 결단(大)의 결정체이다. 프로스페라에게서 그걸 보지 못했다. 그걸 얻으려 애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것을 표현하려는 안간힘을 보지 못했다. 그것에 도달했을 때의 맑고 청경한 연기를 보지 못했다. 물론, 발성도, 화술도 동의하기 어려운 그의 ‘독백’ 앞에서 “아름다운 소리”나 “연극의 마법”은 언감생심임은 말해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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