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이은경(연극평론가)
고려시대 전반에 관한 내용을 정리하여 편찬한 역사서 『고려사』에 도무지 비판거리를 찾을 수 없는 성군으로 기록되고, 조선의 세종대왕과 비견되는 고려의 제8대 왕 현종이 현재로 소환되었다. 삼천포시와 사천군의 통합으로 탄생한 사천시 30주년을 기념하여 극단 장자번덕의 가무백희악극 <와룡, 고려를 깨우다>(정가람 작, 이훈호 연출, 2025.12.11.~12., 사천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가 공연되었다. 이 작품은 먼저 현종이 유년 시절을 보낸 풍패지향(豊沛之鄕: 왕조의 본향 또는 발상지를 일컫는 말) 사천시의 역사적 의미와 공동체의식을 강조한다. 이에 더해 불우한 현실을 극복하고, 국난 극복의 성군이 되는 현종의 성장담을 통해 역경에 굴하지 않는 주체적 의지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이번 공연은 현종의 일대기가 순차적으로 전개되기에 먼저 간략하게 그의 삶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현종의 아버지는 안종(安宗)으로 추존되는 왕욱(王郁)이고, 어머니는 제5대 경종(景宗)의 왕비였던 헌정왕후였다. 경종의 사후 헌정왕후는 궁에서 나와 사저에 살면서 삼촌인 왕욱과 정을 통하여 임신한다. 근친 간의 불륜죄로 왕욱이 사수현(泗水縣, 현재의 사천시)으로 유배를 가고, 헌정왕후는 출산 직후 후유증으로 죽는다. 부모 없이 유모 손에 자라는 어린 왕순(王詢, 훗날의 현종)을 불쌍히 여긴 제6대 성종이 아버지 근처에서 살라고 왕순을 사수현으로 보내면서 부자가 재회한다. 이곳에서 5년 동안 지내면서 아버지에게 교육받고, <작은 뱀>이라 시를 남기기도 했다. 아버지까지 유배지에서 병사하자 그는 매우 불안정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견제 대상이 되어 강제로 승려가 되고, 여러 번의 살해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며 결국 ‘강조의 난’을 거쳐 극적으로 왕위에 오른다. 즉위 당시 왕권은 취약한데 호족·외척세력은 강하고, 거란과의 전쟁 위기까지 겹쳐 입지가 매우 불안정했다. 하지만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여 내우외환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이자 국가체제를 잘 정비하여 고려의 전성기를 연 왕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추억을 잊지 못했던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 사수현을 사주(泗州)로 승격시킨다. 현재 사천시는 현종과 연관된 와룡산, 부자상봉길 등의 문화콘텐츠를 개발하고 있으며, 이 작품도 이런 맥락에서 제작된 지역 브랜드공연이다.

광대들의 놀이와 신명으로 복원되는 입지전적 영웅담
경남 사천시를 대표하는 극단 장자번덕은 창단 초기부터 전통연희의 현대화와 지역 콘텐츠의 개발을 정체성으로 하는 ‘가무백희악극’을 지향하고 있다. 공연 리플렛의 설명에 따르면 “‘가무백희의 다채로움과 악극의 음악성과 대중성이 더해져 극단 장자번덕식 뮤지컬·마당극”이 ‘가무백희악극’”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기존의 마당극보다 전통연희와 음악의 비중이 커진 공연형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대는 매우 미니멀하다. 뒤에는 좌우로 긴 3단 계단이 놓여있는데, 제일 높은 계단참은 각성, 권력, 사랑 등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는 공간이다. 무대 중앙에는 고대 상형문자를 연상시키는 문양의 옷들이 걸쳐있는 옷걸이 형태의 개폐·이동형 가림막이 위치한다. 가림막이 여닫히면 새로운 시공간으로 전환되고, 객석에서 보이지 않도록 의상·오브제의 변환이 가능하다. 무대 좌우 양 끝은 악사석인데 전통악기와 양악기가 대비되어 위치한다. 무대를 통해 이 공연이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의도한다는 점을 예상케 된다. 프로시니엄 극장에서의 공연이지만 광대들의 역할놀이와 서사극적 연출을 통해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무너진다. 극적 환상과 실제 현실의 의도적인 혼재로 인해 관객은 현실과 역사의 간극을 상상력으로 채우게 된다. 그렇기에 과거에 갇히지 않고 현재를 계속 인식할 수 있다.
<와룡, 고려를 깨우다>는 전통연희와 연극을 직조한 액자식 구성인데, 전통연희의 핵심인 놀이와 신명의 에너지로 관객과 소통하는 데 중점을 둔다. 공연은 풍물패의 길놀이로 시작된다. 광대들은 라이브 연주하면서 객석을 통해 무대에 오르고, 한바탕 버나돌리기, 상모돌리기 등의 놀이판을 벌인다. 이들은 「“2025 연등회 맞이 전국 놀이패 경합대회” 맥(脈)」에 참가한 극단 장자번덕의 광대들이다. 이들은 경연주제 ‘결(結)’에 맞춰 사천시 30주년을 기념하여 시민들을 하나로 맺어주기 위해 고려 현종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한다. <결결결자로 시작하는 말>을 노래하는 것으로 본 공연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데, ‘함께 맺는 결’이란 주제어를 통해 사천시민의 공동체의식을 자연스럽게 강조한다. 광대들의 재담은 랩처럼 ‘메기고 받는’ 형식으로 진행되기에 쉽게 관객과 어우러지며 호흡하게 된다.
광대들이 <어이야 자차, 함께 가보자>를 노래하며 극중극이 시작된다. 사건은 현종이 어떻게 왕이 되었으며, 연이은 거란의 침입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핵심 사건은 사료를 따르지만 민중을 표상하는 광대의 시점에서 그의 삶이 설명되기에 민중이 원하는 지도자상, 즉 불굴의 의지로 행동하며 책임지는 군주의 모습이 강조된다.

이번 공연의 연출 콘셉트는 전통과 현재, 동서양의 이질적 요소들을 융합해서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얼마나 다양한 요소들이 각각의 장면 속에 재해석되어 배치되어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관극 포인트이다. 예를 들어 헌정왕후 태몽장면에서는 가면극의 노장과장·양반과장을 접목하여 지위고하를 막론한 남성들의 관음증적 태도를 풍자한다. 헌정왕후가 오줌 누는 모습을 훔쳐보려고 돌 등의 사물을 연기하는 양반·노장·내시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동시대 관객이 현종의 출생을 근친 간 불륜이란 도덕적 문제로만 판단하지 않도록 꿈과 현실을 넘나들고,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을 교차시켜 보여준다. 오줌으로 바다가 되는 장면은 무대 전체에 흐름의 파장을 만들기 위해 푸른 천을 활용한 퍼포먼스로 전개된다. 또한 와룡산에서 성장하는 왕순은 조종 인형으로 등장하여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생존조차 어려운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누이 헌정왕후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성종이 말을 타고 달려가는 장면은 말머리 오브제를 활용한 신체움직임으로 풀어내고, 광대들이 함께 어우러져 판을 벌일 때는 신명의 전통 춤사위가 펼쳐진다. 현종의 출생장면에서는 승무가, 세태 풍자 장면에서는 전통 가면을 활용한 마임이 더해진다. 이처럼 각 장면의 의미에 따른 극적 표현이 매우 다양하고 풍부하게 연출된다.
영상도 적극 활용된다. 현종에게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자들이 있는 산, 언젠간 용이 될 자들이 사는’ 와룡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절치부심하며 미래를 준비한 곳이다. 와룡산 절에 기거할 때, 작은 뱀 새끼를 보고 “약초 밑에 도사리고 앉아 있는 작고 작은 저 뱀/온몸에 붉은 무늬 찬란히 번쩍이네/언제나 꽃밭에만 있다고 말하지 말라/하루 아침에 용이 되기란 어렵지 않으리라”라는 시 <작은 뱀>을 남겼다. 와룡산의 기운을 받아 용으로 승천하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이 장면에서 작은 뱀이 용이 되어 승천하는 과정을 영상 이미지로 보여준다. 와룡산이 왕순을 깨어나게 했다는 제목의 의미를 강조하는데 유효하다. 다만 거란과의 전쟁을 다룬 후반부 영상은 대부분 설명의 기능에만 머물러 아쉽다.
그리고 다양한 동서양 악기의 라이브 연주는 극적 분위기를 제고한다. 가야금, 장구, 큰북, 바라, 대금, 징, 신디사이저, 드럼, 우드블록, 윈드차임 등 연극 공연에서 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동서양 악기가 연주된다. 위기의 순간에는 대북과 드럼의 리듬으로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사건의 전환에는 징을 울려서 극적 흐름을 반전시키며, 가야금과 장구의 선율에 신디사이저의 경쾌함이 더해져 해학적 분위기가 조성된다. 연주 체계가 다른 악기들의 앙상블을 조율하기 쉽지 않았을 터인데, 전혀 이질감 없이 적절한 순간에 잘 배치되어 듣는 즐거움이 컸다. 이번 공연에서 풍부한 음악성은 관객과의 소통에 유효했는데, 이전의 단체 공연들에서도 음악은 매우 중요한 표현방식이었다. 그렇기에 극단 장자번덕의 특장점은 동서양 음악의 정치한 조율이라고 해도 좋겠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연출은 천추태후 장면이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천추태후가 거대한 형상으로 등장한다. 화려한 붉은색 상의에 무대 바닥에까지 길게 늘어진 노란 장치마를 입고, 붉은 색 부채에 흰색의 부분 가면을 쓴 천추태후의 그로테스크함은 관객의 시선을 장악한다. 그녀는 제일 높은 단 위에서 아래를 내려보는데, 그 아래 바닥에 그의 아들 제7대 목종이 존재한다. 권력욕의 표상인 치마를 목종에게 씌워 움직이지 못하게 한 것으로 이들의 권력관계가 전경화된다. 천추태후와 김치양 역시 치마에 감싸여 무대에서 사라지는 데, 이는 그들의 몰락을 상징한다. 권력의 허망함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목종의 죽음으로 이어지면서 왕순이었던 현종이 권력의 속성을 깨닫고 각성하는 계기를 보여준다.
현종이 고려의 진정한 왕으로 거듭나는 순간은 거란과의 3차 전쟁을 통해 드러난다. 거란의 허락 없이 목종을 죽이고 현종을 세웠다는 것을 구실로 쳐들어온 1·2차 침입에서는 고려가 패배했지만 3차 전쟁은 고려인 모두가 합심하여 방비한 덕분에 대승을 거둔다. 이 장면에서 계단 위에 존재하던 현종이 ‘왕관을 내려놓고 머리띠를 동여매고 지휘봉을 들고’ 무대 아래로 내려와 패배감·무력감에 절망하고 있는 백성들과 직접 만난다. 위계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위치에서 선 현종은 백성들에게 ‘드높은 기상으로 다시 새 고려를 세우자’고 설득한다. 행동하는 군주로 인한 민중의 변화는 대형 깃발 퍼포먼스로 표현된다. 크고 작은 깃발을 휘두르며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군무는 웅장한 음악이 더해져 고려의 웅혼한 기상을 느끼게 한다. 거란의 10만 군사를 전멸시킨 귀주대첩의 승리는 무대를 채운 거대한 천의 물결로 표현되는데, 홍화진의 강물이 거란군을 휩쓸어간 역사적 사실의 반영이다. 이는 단순한 승리의 역사가 아니라 왕·신하·백성이 함께 지켜낸 민족적 자존의 상징적 사건이기에 공연에서도 매우 심혈을 기울여 연출된다. 바로 이어지는 연등회 등춤은 ‘백성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현종이 불교의 힘으로 민심을 모았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이로써 고려가 진정한 주권국가로 새롭게 자리매김했기에 현종이 태평성대의 기반을 다진 ‘중흥지주’라고 평가되는 것이다.

산만한 구성은 정리, 장면의 디테일은 살아나야
광대들의 유쾌한 역할놀이, 극적 분위기를 조율하는 매력적인 소리와 노래,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우는 서사, 풍부하게 장면을 채우는 재해석된 전통연희 등 공연의 시청각적 매력이 크다. 하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브랜드 공연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보완되어야 할 점도 있다. 먼저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펼쳐놓기보다는 주제에 맞게 재구성해야 한다. 현종이 왕이 되기 전의 상황은 자세히 설명하다가 왕으로서 업적을 낸 거란과의 전쟁은 내레이션이나 영상 자막을 통한 설명으로 급하게 전개된다. 가장 중요한 현종이 어떠한 왕이었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왕이 되기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연작 공연으로 제작하거나, 왕으로서 업적에 집중하고 이전의 전사는 간략하게 광대들이 설명하는 정도로 축소하는 것을 고민하면 좋겠다. 현종의 삶이 워낙 극적이어서 헌정왕후와 왕욱의 사랑, 천추태후의 간계에도 굴하지 않았던 왕순의 용기와 지혜, 백성들의 믿음을 얻지 못한 현종의 불안감, 강감찬 장군과의 신분을 초월한 이해와 우정 등등 현종을 소재로 한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 중심인물 현종이 잘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그의 행적이 주로 설명이나 무대 뒤의 전언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현종의 진면목이 제대로 구현되는 방향으로 서사를 정리해야겠다.
무대디자인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옷들이 걸려있는 가림막은 다양한 역할로 활용된다. 문·벽이 되고, 변신을 위한 가림막이 되며,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데도 활용된다. 이 정도의 구분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기에 굳이 물리적으로 보여줄 필요는 없다. 서사극적 연출에서는 의상·소품의 변환도 의도적으로 노출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가림막이 오히려 배우들의 동선이나 공간구성에 방해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내레이터 역할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광대들이 돌아가며 내레이터의 역할을 겸하는데, 특히 현종 역의 박수빈은 악사로서 소리와 연주를 하다가 배우로 등장인물을 연기하고, 다시 내레이터 역할까지 종횡무진 활약한다. 그러니 현종의 존재감이 약화된다. 최소한 악사와 배우의 역할은 구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설명을 위한 내레이션과 영상자막이 혼재하는 것도 혼란스럽다.
장면의 디테일을 잘 살려야 한다. 연습 기간이 짧아서 어려움이 컸다고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움직임이나 장면구성이 산만하고, 장면 간의 연결도 매끄럽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많은 인물들이 동시에 등장할 때는 중심인물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각각의 움직임이나 표현방식에 통일성이 부여되어야 하겠다. 귀주대첩 장면의 대형 깃발 퍼포먼스에서는 깃발의 사이즈와 움직임이 커서 뒤에 위치한 인물들이 가려졌다. 행동하는 군주 현종의 면모가 강조되어야 하는데, 깃발이 먼저 보인다. 처음에는 임팩트 있게 무대 전면에서 깃발을 흔들지만 이어서는 위치를 바꾸어 등장인물 뒤나 옆에서 깃발이 휘날려 중심인물의 행동이 잘 보여야 한다. 그리고 왕순을 인형으로 표현한 것도 인형의 움직임이 섬세하게 조율되지 못하고, 익숙한 조정 인형이어서 아쉬웠다. 다양한 전통연희의 매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우리 그림자극 <만석중놀이>의 만석중인형으로 대체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왕이 되기 전 스님으로 절에서 생활하고, 왕이 된 후에는 불교를 육성했던 현종의 배경을 고려한다면 연등회에서 연희되었던 <만석중놀이>의 인형을 오브제로 활용하는 것이 더 유의미할 것이다.

고려 현종은 개인적으로 교과서를 통해 접했지만 어떤 왕이었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번 공연을 보면서 이렇게 극적인 영웅담의 주인공을 왜 제대로 알지 못했고, 우리 연극은 주목하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극단 장자번덕의 이번 공연은 우리가 잊고 있던 현종을 현재로 소환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갖게 하고, 우리의 전통연희가 동시대 관객에게 얼마나 소구력이 있는지 확인케 한 것으로도 유의미하다. 현종은 멜로, 스릴러, 전쟁, 가족, 종교, 환타지 등 다양한 관점의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인물이다. 지역브랜드로 가두지 말고, 우리 연극에서 새롭게 주목하는 역사콘텐츠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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