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무의 월간 짤평

공연명: <우투리: 가공할 만한>

관람일시: 2021.04.15.20:00

극장: 선돌극장

<우투리: 가공할 만한>은 내래이터가 극을 이끄는 전형적 (넓은 의미의) 서사극이다. 1, 2, 4, 5의 배우(배역)이 3의 배역을 묘사한다.

배경이 된 시공간은 우화적이다. 우화(allegory)는 현실이 되려고 하는 리얼리즘과 달리 현실 너머의 신화가 되려고 한다. 사태를 단순화, 추상화하여 신화적 상상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우화의 본질이다. 연극에서는 단순화된 사태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단순화 하느냐 하는 기법이 관건이다. 단순화된 사태도 현실에 대한 통찰을 드러내지만, 행위와 미장센이 중시되는 무대에서는 어떤 단순화냐가 더 중요하다.

<우투리: 가공할 만한>은 참신하고 세련된 단순화 과정을 선보인다. ①낯선 이질적인 문장 구사법, ②충격효과를 동반한 독특한 장면 전개술, ③속말과 겉말을 분리하는 코러스 운용법 등. ①은 우화적이면서도 시적인 묘한 느낌을 만들어낸다. 통사구조와 표현어구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일상적이면서도 문학적인, 귀를 간지럽히면서도 긁어주는 청음효과를 만들어낸다. ①은 전적으로 작가의 영역이지만 이를 발화하는 배우들의 능숙한 화술이 전제되었을 때 빛을 발한다. ②는 서사적 흐름을 ‘깨고 잇는’ 연출적 손맛에 달려있다. 시공간적 도약이나 상황의 급격한 전환에서 유용하다. LED조명바가 유연한 강약조절에 큰 공을 세웠다. ③은 자칫 단조롭고 평이해질 수 있는 우화적 서사에 심리적 입체감을 부여하는 효자이다. 겉말과 속말의 차이(=아이러니)를 행위화하는 기법은 시적 여운까지 스미게 한다.

무엇보다 치켜세우고픈 장점은 행위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신체조형술. 특히 간질 발작을 형상화한 동작은 아름다울 지경. 브레히트도 울고갈 세련되고 참신한 21c 서사극!


공연명: <다방>

관람일시: 2021.04.13.20:00

극장: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소극장

말은 몸의 기록이다. 말을 언어중추와 발음기관의 합작품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주 편협한 사고방식이다. 말은 몸의 특정 부위에서 조음되기는 하지만 소리통의 공명과 아랫배의 기운이 동원된다는 점에서 온몸이 관여하는 음성적 결과물이다. 몸과 무관한 말은 없다. 내용이든 형식이든 말은 몸의 상태와 관심을 반영한다. 몸이 하는 일은 항상 말을 거치거나 말에 선행한다. 말은 몸(이 하는 일)의 출발이자 병행이자 결과이다. 그래서 입에 착 달라붙는 말은 그 물리적, 의미적 진동을 발끝까지 전달한다. 말은 온몸의 반응이자 온몸의 반영이다. 말은 무대에서 더욱 더 중요해진다. 그 자체로 의미발생기일 뿐 아니라, 배우의 외적 행위와 맞물려 관객의 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관객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배우의 입을 보며 그 발원지를 확인하고, 그 대사 의미로 상황을 해석하고, 그 말의 진동과 어조에 미적 쾌감을 느낀다. 상황에 맞는 좋은 대사는 관객의 온몸을 훑고(꿰뚫고) 간다.

하지만 <다방>의 언어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하다. 예를 들어, “망하구 안 망하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국수 한 그릇을 주느냐의 여부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지.” 같은 문장은 우리의 언어습관과 동떨어진 표현이다. 번역투이기 때문이다. 율격도 맞지 않고, 호흡도, 통사구조도 맞지 않다. 이런 어색한 번역은 관객의 심장을 뚫고 들어가 온몸을 훑기는커녕 귀에서부터 턱하고 걸려 넘어진다. 말은 현실 감각을 구축하는 가장 강력한 팔레트이다. 허나 <다방>의 말은 현실 축조에 실패한다. 관객의 몸과 마음이 배우의 말(이 구축하는 리얼리티)에 반응하지 않는다. 이런 못난이 표현이 허다하다. 공연의 흐름을 해치고 리듬을 잘라먹으며 눈살을 찌뿌리게 만드는 원흉이다.

어색한 번역은 어설픈 번안과 한 짝이다. 중국 상황을 억지로 한국 역사에 끼워 맞췄더니 곳곳에서 삐거덕거린다. 게다가 논리적 맥락이 부자연스러운 부분까지 있다. 워터슬라이딩에 자갈돌 끼인 느낌…

부적합한 번안의 백미는 과도한 의미부여가 시도된 엔딩. 옛 가족사진을 손에 든 손녀와 최근 역사를 나열하는 뉴스방송의 결합. 작품의 ‘최고과제’가 부실한/모호한 경우, 작가(번안자)는 밀린 숙제하듯 엔딩에 이것저것 때려넣는다. 맥락 없는 과중한 의미들이 나열되고, 관객의 머릿속에는 작품의 본질과는 깊은 연관 없는 엉뚱한 이미지들이 찌꺼기처럼 남는다. 작품의 ‘최고과제’가 암기과목처럼 주입되는 것이다. 작가의 죄책감은 이런 식으로 관객의 미적 통찰력을 훼손한다.

배우들의 유려하고 천연덕스러운 연기가 아니었다면 본전도 뽑기 힘든 공연이다. 몸에 맞지 않는 옷으로 버틸 수 있었던 건 배우들의 유연함과 능숙함 덕분이다.


공연명: <광주>

관람일시: 2021.04.16.20:00

극장: LG아트센터

<광주>는 (결과적으로) 윤선생과 박윤철의 이야기이다. 윤선생은 무장투쟁을, 박윤철은 승복을 주장한다. 이런 대결-논쟁은 낯익다. 이 흔한 대결을 날카롭게 벼리는 비법은 인물의 전형화에 있다. ①타당한 동기부여, ②세계관을 가르는 명징한 대립, ③집단 의지의 총화가 조건이다. 윤선생이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이유는 (구체적으로) 순이 때문이다. 순이가 누군가? 모른다. ①이 부족하다. 윤철의 ①은 무엇인가? 용수의 죽음? 용수는 누구인가? 문수경은 윤철에게 누구인가? 윤철의 ①도 부족하다.

윤선생은 투쟁파의 상징으로 부상하는가? 그 과정은 없다. 윤철 또한 파편화된 의지에 불과하다. 둘 다 ③을 실현하지 않는다. 핵심인물의 형상화가 미약하다. 치명적이다.

작가는 서사의 개인화/개체화를 거부하는 듯하다. 핵심인물을 초점화하지 않고 집단의 서사, 모두가 주인공인 서사를 만들고 싶었나 보다. 결과는 실패. 애초에 불가능한 구상이다.

전체적으로 윤철이 서사의 주동인물이다. 많은 장면은 윤철의 관점에서 투사된다. 그런데 그의 핵심과제는 무장해제/승복이다. 이는 <광주>가 의도하는 ‘처절한 투쟁, 고귀한 희생’이라는 주제에 역행한다. 감정이 쭉 뻗어오르지 못하고 매번 한계에 부딪히는 건 이 역행도 한 몫 한다. 그렇다고 윤선생이 주동인물이 되면 뻔한 도식이 되어버린다. 진퇴양난. 차라리 윤철이 윤선생의 자리를 차지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개심한 첩자가 반란의 우두머리로! 실속 없는 복잡화보다는 집중도 높은 단순화가 더 유리하다.

윤선생과 순이의 관계를 설명하지 않은 이유? 윤철과 수경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이유? 멜로 모티프를 넣기 싫어서일까. 비장한 투쟁이 연애에서 출발할 수는 없으니까. 공적 사명과 사적 감정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멜로는 대중에게 익숙한 감정을 이용해서 극적 파토스에 도달하는 매력적 극작 기법이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독이 되고 약이 된다. 고선웅 연출이야말로 멜로 모티프를 부작용 없이 세련되게 뽑아내는 명수 중의 명수 아닌가.

넘버도 좋고 무대도 좋고 연기도 좋다. 기존 문법과 다른, 연극연출가 고선웅의 색채도 어느 정도는 녹아있다. 그런데도 감동이 없다. 서사가 헛돌기 때문이다.

광주를 상업화한 뮤지컬?: 광주 세대는 역사를 예술로 번역한다. 광주 이후 세대는 예술을 통해 역사를 읽게 될 것이다. 예술이 있어야 광주도 있다. 연극도 있고, 소설도, 영화도, 뮤지컬도 있어야 한다. 없는 게, 적은 게 문제다. 상업화 논쟁은 그 후의 일이다.

상업화보다 더 불행한 건 졸작이다?: 명작은 어느 순간 뚝딱하고 나오지 않는다. 수많은 졸작과 수많은 아류와 수많은 상업화와 수많은 매너리즘과 수많은 실험을 거처야 한다. 수천, 수만의 2차세계대전 서사를 거쳐 <쉰들러 리스트>가 오고 <덩케르크>가 온 것을 보라. 불행은 상업화도, 졸작도 아니라, “없는 게, 적은 게 문제다.”

뮤지컬은 위험하다?: 내가 기억하는 광주 노래는 20년 넘은 곡들이다. 노래 생산이 멈춘 것인가? 이제 광주를 노래할 필요가 없는가? 소설 <레미제라블>이 없었다면 1832년 파리 봉기는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고,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없었다면 소설의 세계화도 없었을 것이다. 광주의 노래를 듣고 싶다. 새로운 감성과 새로운 언어로 써진 광주의 노래를 듣고 싶다. 전 세계인이 광주의 노래를 떼창하는 장면을 보고 싶다. ‘민중의 노래’가 그러한 것처럼.


공연명: <액트리스원: 국민로봇배우 1호>

관람일시: 2021.04.17.15:00

극장: 국립극단 소극장 판

유토피아 SF는 없다. 유토피아적 미래는 초딩 과학사생대회와 대통령선거 때만 (잠시) 존재한다. SF 상상력은 항상 잿빛이다. 미래에 대한 상상을 기르는 것은 불안감과 냉소이기 때문이다. <액트리스원: 국민로봇배우 1호>도 다르지 않다. 여타 SF 서사와 다른 게 있다면 그 불안감과 냉소가 자기 자신(=연극)을 향하고 있다는 것. 몰락할 연극을 보여주는 연극! 바로 여기에 역설이 있다. 이를 자기지시성의 역설이라 불러두자.

몰락할 연극을 보여주는 연극은 좋은 연극인가, 나쁜 연극인가? 좋은 연극이라면 연극은 앞으로 몰락할 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몰락할 연극을 보여주는 연극은 반드시 나빠야 한다. 좋은 연극이라면 이 공연이 전제하는 연극의 몰락이란 오지 않을 것이고, 액트리스원이 간병 앞치마를 벗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나쁜 연극이라면, 그래서 다가올 연극의 몰락은 피할 수 없음을 증명한다면, 구원자 액트리스원이 등장하여 연극을 (일시적으로) 구원하는 서사는 개연성 높은 예언이라 할 것이다.

다시, 좋은 연극이라면 연출가는 미래의 불안감을 땔감 삼아 현재의 관객에게 허풍을 친 것이고, 나쁜 연극이라면 연극몰락을 필연으로 만든 파렴치한이 될 것이다. 허풍쟁이든 파렴치한이든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 연출의 냉소주의이다. 불안감이 기대감이 충만하지 못했을 때의 감정이라면, 냉소는 기대감을 철회할 때의 감정이다. 전자는 얻을 게 남았을 때 생기고, 후자는 잃을 것뿐일 때 생긴다. 전자는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지만, 후자는 자신을 고독하게 만든다.

자기지시성의 역설은 극 안도 지배한다. 좋은 배우를 연기하는 나쁜 배우의 연기는 좋은 연기인가, 나쁜 연기인가. 에피메니데스의 역설: “크레타 사람들은 항상 거짓말만 한다.” 배우 성수연이 3류 배우의 어설픈 연기를 죽을 때까지 연기한다면 그녀는 좋은 배우인가, 나쁜 배우인가? 실감 난 연기에 실감이 나버린 파트너가 칼로 찔렀다면, 그 파트너는 좋은 배우인가, 나쁜 배우인가?

자기지시성의 역설은 정체성의 문제나 자기반성을 유도할 수 있는 기막힌 소재이다. 하지만 공연은 더 이상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지거나 연장하지 못하고 종결된다. 배우의 존재론이든 한국연극의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든 예술가의 실존이든 묵직한 철학적 화두를 제시했다면 걸작의 위용을 갖추었을 텐데 아쉽기 그지없다.


공연명: <정의의 사람들>

관람일시: 2021.04.24.15:00

극장: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해외고전명작을 올릴 때 늘 따라붙는 질문이 있다. 시대와 문화적 배경이 다른 작품을 지금, 여기서 올리는 이유는 뭔가? 이른바 동시대성에 관한 질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우문이다. 시공을 초월한 명작, 인간의 본질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담지한 작품을 ‘고전’이라 부른다. 고전은 영원한 동시대성에 대한 인장이다. 동시대성 질문은 마치 딸기가 왜 빨간지 묻는 것과 같다. 동시대인이 동시대적 인식으로 고전을 무대에 올리는 것 자체가 동시대적이다. 고전의 탄생 맥락과 본질적 의미를 정확히 읽어내는 것이 동시대적 가치이다. 고전의 동시대성은 고전 자체에 있다기보다(고전은 늙지 않는다) 고전을 해석하는 연출가의 문제이다.

물론 번안이나 각색/윤색, 재창작의 필요성이 대두될 때도 있다. 언어의 문제나 가치관의 변화로 인해 텍스트 수정이 불가피할 때이다. 색다른 해석을 선보이려는 연출가의 강력한 미학적 의지도 작용한다. 이때는 수정의 명분이 객관적이어야 하고 그 의도가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고전의 명패를 걸었다면, 그 명패가 머쓱하지 않게 공연과 원작과의 관계가 깊은 상호연관을 빚어내야 한다. 그렇기에 텍스트 수정은 어렵고도 심오한 문제이다. <정의의 사람들>은 바로 그 지점이 결격이다.

원작의 수정은 그 자체로는 훼손이다. 더 나은 대안을 보여줬을 때 훼손은 정당화된다. 훼손을 만회하는 <정의의 사람들>의 카드는 무엇인가?

①칼랴예프 원톱: 원작은 크게 세 부분, 즉 암살의 명분을 설파하는 첫 부분과 칼랴예프의 인간성을 보여주는 두 번째 부분, 칼랴예프가 시련을 이겨내는 세 번째 부분으로 나뉜다. 명료한 기승전결 구조이다. <정의의 사람들>은 수감 중인 칼랴예프의 초췌한 모습부터 시작한다. 암살의 정당성도, 칼랴예프의 인간성도 ‘사후’에, ‘회상’의 프레임을 통해 제시된다. 원작에서 가장 큰 긴장감을 자아내는 암살의 성사여부는 김이 샐 수밖에 없다. 숭고한 자기희생을 앞에 두었을 때 암살단의 논쟁도, 칼랴예프의 사상도, 무엇보다 강경파 스테판과의 변별성도 두드러질 수 있다. 하지만 감옥에 갇힌 칼랴예프의 형상은 병든 고집쟁이에 가깝다. 숭고함도, 인간미도, 영롱한 정신도, 강인한 결의도 찾아보기 힘들다.

②악령: 인간의 행위를 조롱하고 비하하는 악령의 테마는 극의 해석을 심화시킨다는 점에서 유용할 수도 있다. 칼랴에프의 가장 약한 면모를 들추어내면서 인간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주는 장치로서 활용도가 높다. 하지만 <정의의 사람들>에서 악령은 충분한 발언권도 없이 전반부를 낭비하고 있다. 후반부에 세르게이의 악령으로 변하는 모습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대목. 악령은 칼랴예프의 영적 분신이어야 마땅한데, 세르게이 악령이라니…

③지금/여기의 개입: <정의의 사람들> 곳곳에는 우리의 현대사를 암시하는 에피소드들이 ‘잔뜩’ 묻어있다. 안중근, 윤봉길 의사의 에피소드가 끼어 들어가는가 하면, 암살범 안두희, IS자살테러, 팔레스타인 갈등, 촛불vs태극기 논쟁, 전태일, 페미니즘까지 등장한다. 갈등과 대결의 현대사를 개괄하려고 작정한 기세. 아마도 ‘증오 속에는 아무런 행복도 없다’는 칼랴예프의 지론을 증폭시키려 한 듯하다. 하지만 막연하고 모호하기 그지없다. 서사의 흐름을 잘라먹고 들어오는 낯선 기법도 그렇고, 충분한 맥락 제시가 없는 불분명한 메시지도 그렇다. 각자의 정의를 넘어서는 모두의 정의가 얼마나 어려운지 질문을 던지는 방식 같은데, 칼랴예프와 도라는 그 해답이 사랑임을, 인간성임을 명백하게 천명하고 있다. 주인공이 확신한 바를 에피소드로 태클을 거는 방식은 공감하기 힘들다. 특히 안두희와 안중근이 같은 라인에 서는 장면은 참기 힘들다.

<정의의 사람들>의 구상은 원대하다. 원작을 사형수 칼랴예프의 서사로 재구성하여 암살과 그 후를 이원화한 것, 악령을 통해 현실을 대상화하고 칼랴예프의 정신세계를 좀 더 확장하려 한 것, 정의의 반대말은 불의가 아니라 증오/혐오임을 일깨우는 에피소드들, 다층적 현실들을 다성악적으로 배치하려는 시도 등은 인정. 하지만 각 요소끼리 연결성과 밀도를 갖추지 못했다. 이 정도의 스케일이라면 최소 6개월은 연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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