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양갈래머리와 아이엠에프>
윤서현
일시: 2021.4.10.~4.25.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기획: 두산아트센터, 윤미현
제작: 무브온, 윤미현
작/연출: 윤미현
윤미현 작가의 첫 연출작인 <양갈래머리와 아이엠에프>는 1997년 금융위기 시절부터 현시점까지 평범한 이들이 겪어야 했던 일상의 애환을 코믹하면서도 서글프게 담아낸 노래극 형식의 작품이다. 이미 국제기구의 명칭이라기보다는 특정 시대를 의미하는 단어로 자리매김한 ‘IMF’는 한국어식 발음 그대로 ‘아이엠에프’라 표기된 채 ‘양갈래머리’와 만나 묘한 궁금증을 자아낸다. 작품 속에서 이는 치매로 일을 그만둔 어머니가 유일하게 떠올리는 전혀 다른 두 시절-친구들과 제과점에 다니던 소녀시절과 세 아이의 엄마로 전업주부였다가 남편의 실직으로 콜라텍 주방일을 하기 시작한 고된 시절-을 뜻한다. 설탕물 한 그릇 달랑 마시고 밭에 나가 일을 하다 세상을 떠난 친정엄마를 떠올린 어머니는 1년 동안이나 감쪽같이 치매 연기를 했다. 그것이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작품의 제목이 어머니의 기억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면, 사건 전개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각종 외식사업을 거쳐 아파트 수위로 일하게 된 아버지는 15년 전 군 가혹행위의 가해자인 ‘이병장’을 죽이기 위해 찾아온 ‘무주’라는 이름의 젊은이를 만나게 된다. 아버지는 순간의 복수심 때문에 어차피 이기지 못할 싸움에 자신의 소중한 일상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현실적인 충고를 한다. 무주는 그를 ‘꼰대’라고 비난하지만 결국은 부모님과 함께 땅콩과 돼지감자를 재배하는 소박한 삶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영향은 항상 상호적인 것이다. 낯선 젊은이의 억울한 심정이 ‘꼰대’를 각성시킨다. ‘나’의 아버지가 무주에게서 빼앗아 놓은 낫을 들고 갑질 주민 703호의 뒤로 다가서는 장면은 서슬이 퍼렇다.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작품의 제목이 어머니의 전사에 기반하고, 사건 전개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면, 기능적으로 화자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이 집의 장남인 ‘나’이다. 무대화된 공연에서는 인물 각자의 애환이 담긴 테마곡이 부각되면서 인물들 모두가 화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작품이 제시하는 주요시점은 분명 ‘나’, 장남의 시선이다. 제약회사에 다녔던 ‘나’는 남의 병원 화장실 청소까지 해가며 영업을 뛰다가 돌연 한 의사에게 뺨을 맞고는-‘무주’도 뺨을 맞았다-그 길로 영영 집에 들어앉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찍이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던 여동생마저 다니던 직장인 포목점이 폐업 직전이라니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그나마 남동생이 아일랜드에서 소젖을 짜고 있으니 다행인 걸까.
공연의 무대에는 희곡이 제시한 많은 부분들이 생략되어 있다. 집안 가득 산처럼 쌓여있는 재고 상품들, 업소용 튀김기계를 비롯한 도매로 들여온 각종 집기들, 저마다의 속도로 째깍거리는 개업축하 시계들은 찾아볼 수 없다. 아파트 화단과 조그마한 경비실도 마찬가지다. 다만 낮고 길쭉한 하얀 구조의 수조만이 무대 중앙에 놓였다. 산호 모형인지 수중 식물인지 모를 빨간 장식 사이로 아직 뜯지 않은 하얀 메리야스들이 공책처럼 차곡차곡 쌓여있다. 조명을 받아 더욱 밝게 빛나는 이 수조는 희곡에 제시된 대로 횟집용 대형 수조라기보다는 관상용 수족관처럼 보여 무대는 전체적으로 현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긴다. 모든 방이 안 쓰는 물건들로 꽉 채워져 식구들 전부가 거실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나 무언가를 꺼내려고 하면 얹혀 있던 다른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장면들이 연출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상적 풍경을 전달하는 데에는 작가 특유의 핍진한 대사와 배우들의 화술만으로도 충분했다. 오히려 과감한 소품 생략이 대사와 노래에 집중할 수 있는 여백을 제공하는 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사회 부조리를 소재로 다루지만 그것의 원인을 규명하거나 이를 직접적으로 해결해야 할 필요성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이 모든 부조리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서글픔을 무대화한다. 이와 관련하여 음악감독 나실인이 작곡한 6곡의 인물 테마곡이 인상적이다. 잔잔한 기타선율과 함께 시작되는 이 노래들은 인물 감정의 전체적인 흐름을 흐트러뜨리지 않을 뿐더러 가사의 내용 또한 매우 구체적이어서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한국어 가사의 음절수에 맞추어 시시각각 리듬이 달라지는 코믹한 노래부터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긴 호흡의 노래까지, 배우의 노래실력이 좋으면 좋은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인물의 진심이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