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위에 세워진 정의라는 우상, 혹은 그 강박증에 대하여.

– 서울시극단 <정의의 사람들> –

오재균

ⓒ서울시극단

(2021. 4. 23 관극)

1949년에 쓰여 이미 마르고 닳도록 읽히고 공연된 알베르 카뮈의 <정의의 사람들>…. 그 원작에 대한 이야기는 최대한 하지 않으려 한다. 원작 텍스트에 대한 내용이나 평론, 그밖에 필요한 정보들은 이미 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넘쳐나도록 얻을 수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니까(원하신다면 인터넷이라는 녀석을 이용해 보시길).

‘지금, 여기’ 라는 모토로 새롭게 서울시극단 예술 감독으로 부임한 연출가 문삼화의 <정의의 사람들>은 그 모토에 걸맞게 극작가 김민정의 각색을 앞장 세워 ‘재창작’이라는 타이틀로 카뮈의 원작을 당당히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러한 연출의 의지는 극의 시작부터 무대 위에 자명하게 그려지기 시작한다.

강렬한 비트의 음악과 더불어 빠른 템포의 장면 전환을 통해 시간과 공간, 시대와 국가를 뒤섞은 각종 정의에 대한 인간들의 아비규환을 보여주는 영상물이 지나가고 나면, 무대 위에는 감방의 벽과 몇 그루의 커다란 자작나무(작품의 배경이 러시아에서 일어난 세르게이 대공 암살 사건임을 상기할 때)만이 이곳이 감옥의 안과 밖임을 상징하며 무대 뒤를 차지하고 서있을 뿐, 거의 대부분의 공간은 비워져 있다. 마치 낡은 감옥이 무너지고 부서진 오래된 공터와 같이 보이기도 하는 이런 무대 디자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센스 있는 관객이라면 그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하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바로 광장이다.

광장이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그곳은 비어있는 공간이다. 그곳은 비워져 있기에 또한 수많은 이야기들로 채워진 공간이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휴식을 취했고, 누군가는 그곳에서 춤추고 뛰어 놀았으며, 누군가는 투쟁했고 대면했고 외면했다.

다시 말해서 광장이란, 기본적으로 그 본질이 규정되어 있지 않은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무엇이든 주장할 수 있고 무엇과도 뒤섞일 수 있다. 그렇기에 광장은 모두의 공간이며 또한 누구의 공간도 아닌 것이 된다.

‘재창작’이라는 각색의 과정을 거치면서 연출가는 바로 이러한 광장의 의미와 이미지를 작품의 전면에 부각시켜 ‘모두가 정의 내리고 싶지만 누구도 정의 내리기 어려운’ 정의의 정의를 정의하려는 듯이 보인다.

알베르 카뮈의 작품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문학적으로는 그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철학적으로는 니체의 사상에 그 기반을 이루고 있다.

김민정 작가의 각색 과정을 거쳐 ‘재창작’된 이번 작품은 니체의 여러 핵심 사상 중 ‘영원 회귀 사상’ 에 그 초점이 맞춰진 듯(의도했든 아니든) 보인다. 또한 신의 죽음과 함께 더불어 탄생한 근대의 여러 이데올로기들도 모두 우상으로 간주하는 니체의 생각이 작품의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곳곳의 장면들 속에 일관되게 포진되어 있다.

ⓒ서울시극단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워진 칼리야예프의 고뇌는 시인이자 혁명가로서의 한 개인의 고통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극이 진행되어 가면서 감방이 무너져 사라지고 나무들이 늘어나듯,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앞으로도 끊임없이 반복될 미래의 상황들과 마주하면서 인류 전체의 고뇌로 확장되어간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재창작된 <정의의 사람들>은 그 방향성을 틀어버린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역사 속을 살아가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부조리를 사색하고 성찰하기보다는 지금 현시대 속을 살아가며 외치는 ‘각자의 정의’를 나열하고 싸움 붙이면서 과연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너희들이 정의내릴 수 있느냐는 조롱 섞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마치 사랑하는 자만이 경멸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서울시극단의 <정의의 사람들>은 ‘정의로운 사람들’ 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정의에 속해 있는 사람들’ 이라는 해석이 맞을 것이다.

작품은 광장으로 뛰쳐나온 사람들이 외치고 있는 각자의 정의 또한 어쩌면 우리들이 강박적으로 묶여있는 하나의 우상에 불과하지는 않은지, 대타자에 의해 생성된 하나의 고정관념에 지나지는 않는지, 그래서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는 정의를 외쳐대면 외쳐댈수록 점점 더 공허해지는 것은 아닌지를 씁쓸하게 물으며 막을 내린다.

원작의 묵직한 고전성을 현시대적으로 쉽고 재밌게 재해석하기 위해 애쓴 연출가를 비롯한 팀원들의 노력에 큰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무언가 허전하다. 그 이유는 뭘까? 무엇이 빠졌을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마도 역시 원작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비록 끊임없이 허무하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긍정하며 끊임없이 바윗돌을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굳건한 모습을 애잔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을 말이다.

그리고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 한 말 속에도 그 답이 있지 않을까 싶어 덧붙여 본다.

“정의는 은둔을 요구하며, 분노 보다는 슬픔을 허용하고, 자신을 주목받는 자리에 올려놓음으로써 얻게 되는 모든 쾌락을 아주 조심스럽게 피하도록 처방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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