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명: <노인과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관람일시: 2021.05.07.19:30
극장: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제목을 보고 무리다 싶었다. 감히 저 명작 영화와 견주겠다고? 오마주든 패러디든 결과는 실패일 거라 예단했다. 그리고 그 예단은 보기 좋게 엎어졌다.
웃음이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연극이 자아내는 웃음은 근엄함과 진지함을 뒤집고 주류와 중심을 해체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다. 로마의 떠돌이 광대와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거리극 광대는 연극이 시대와 계급을 초월한 범민중적 언어임을 증명했고, 중세 막간극은 종교적 엄숙함을 이완시켜주는 당의정이었다.
코로나 시대의 웃음은 삶의 고난을 돌파하려는 연극인의 자화상이고, 피로에 지친 관객을 위한 위로의 불꽃놀이이다. <노인과 여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출구 없는 이 고통의 터널에도 축제의 콘서트가 펼쳐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고맙고 장하다. 희극은 비극보다 더 위대하다! (Comedy is greater than tragedy_Christopher Fry)
1948은 흔한 캐릭터지만 1995는 낯설면서도 참신하다. 저항만 하던 관습적 캐릭터에 비하면 얼마나 능동적이고 힘이 넘치는가! 단, 기성(남성) 주인공을 흉내내는 매력이 아니라, 새로운 행위양식/형상이미지를 창조하는 캐릭터로 발전하길 바라(는 건 무리일까)…
서바이벌 암살 미션 후 다시 서로를 죽이는 미션은 중복이다. 서사 흐름상 둘을 합쳐야 한다.
공연명: <허길동전>
관람일시: 2021.05.08.19:00
극장: 씨어터 쿰
스타니슬랍스키는 배우 혼자 관객의 주의를 붙들어 둘 수 있는 시간은 조용한 장면에선 1분, 흥미진진한 장면에서도 7분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그 짧은 주의 시간을 지속화하기 위해 배우는 온갖 표현수단(=연기요소)을 동원한다. 하지만 그 표현수단이란 게 한계가 있으므로 결국 반복해서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어떻게든 관객은 익숙해진다. 그래서 배우는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표현수단을 아껴뒀다가 결정적 순간에 사용해야 한다.
<허길동전>은 2시간 가까이 계속 높은 텐션을 유지한다. 배우들은 반복해서 소리를 지르고 칼을 휘두르고 눈을 부라린다. 강약 교체운이 아니라, 강강강약이 이어진다. 비슷한 스타일의 공연으로 <태>와 <부자유친>이 있다. 하지만 이 공연들은 단순하면서도 선명한 갈등구도, 관객의 상상력을 증폭시키는 다양한 에피소드 배치로 무대의 텐션을 따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허길동전>은 높은 텐션의 논쟁만 이어진다.
‘강’에선 대사의 논리성보다는 감정의 격정이 앞서기 마련이다. 고음에선 발음도, 섬세한 감정 표현도 어렵다. 관객도 그 격정을 따라가기 힘들다. 연출의 신호에 따라 억지로 텐션을 높였다가 허망하게 김이 새면 더 이상 따라가지 않게 된다. 목에 칼을 대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표현하는 장면도 어림잡아 다섯 곳 이상이다.
광해-허균-이이첨의 삼각관계는 이미 극 초반에 드러났다. 구도와 관계는 써먹은 카드이다. 그렇다면 그 구도의 역동성이나 개별 인물의 심리적 파동이 뒤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 구도와 관계가 별다른 변화가 없다. 패턴의 반복. 지루할 수밖에. 허균과 이이첨의 대립은 역사성을 살려 에피소드화 하는 게 나을 것이다. 구체성 없이 막연하게 자유론자vs원칙주의자의 대결로 탈역사화하니 소재가 살아나지 않는다.
서정적 음악, 코러스의 다양한 재능, 배우들의 열정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절구통과 석등의 상징적 배치, 색다른 의상도 기발하다. 좋은 작품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런 왕조사, 남성서사, 권력투쟁을 다룰 때 여성 배역을 어떻게 배치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주요 관객이 20-30대 여성임을 잊어선 안 된다.
공연명: <이단자들>
관람일시: 2021.05.08. 15:00
극장: 아트원씨어터 3관
환경오염에 대한 주인공 해문의 주장은 이렇다: 지구온난화의 원인은 환경오염이 아니다. 온난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환경주의는 대기업의 상술인바,) 다수가 속고 있는 비과학적이고 극단적인 주장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과연 그런가? 해문의 자기규정 논리를 보자.
갈릴레이는 이단아이다.
이단아는 다수에 저항한다.
고로 나도 이단아이다.
동일 형식의 오류이다. 다수의 상식에 반한다는 형식이 내용의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형식이 동일하다고 내용까지 동질적인 건 아니다. 갈릴레오는 옳았지만, 해문은 옳지 않다. 과학적 데이터만 중시하는 해문이 얼마나 많은 환경오염 데이터를 무시하는지 따질 필요는 없다. 해문은 설정일 뿐이니까.
작가가 환경주의를 폄하하는 방식은 노골적이다. 환경주의는 철없는 젊은이들의 객기로 치부되거나 과격한 비이성적 집단의 광기로 처리된다. ADHD, 결벽증을 앓는 따뜻과 조울증, 공황장애를 앓는 현우가 전자이고, 납치를 저지를 정도로 과격하고 비겁한 비밀결사 ‘정용지용’이 후자이다. 특히 현우의 극단적 환경 애착은 가부장에 대한 저항의 한 방편으로서 애정결핍적 증상으로 취급된다. 또 다른 환경주의자 안데이빗 교수는 환경보호를 사칭하여 공금횡령을 저지른다. 환경주의가 과학이냐 광기냐 하는 논쟁은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된다. 양쪽 다 똑같다는 양비론과 혐오감을 부추긴다. 진실은 실종되고 추악한 논란만 남는다.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이다.
후반부에 가면 환경주의 논쟁은 사라지고 따뜻한 가족적 멜로드라마가 도래한다. 현우는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환경론자를 반박하는 저격수가 될 뿐만 아니라 신념을 버리고 석유를 사용한다. 사랑만이 유일한 대안이고 해결책이다. 결핍은 메워졌고 현실론이 주인이념이 된다.
작가의 주장은 간명하다. 환경주의도 상업자본주의의 상품에 불과하며 이기주의와 탐욕, 무지에 오염된 허상일 뿐이라는 것. 불확실한 미래의 불안감에 벌벌 떨지 말고 바로 지금/현재를 사랑하라. 본 적도 없는 북극곰을 걱정하기보다는 바로 옆의 가족을 더 사랑하라(해문이 들고온 북극곰은 자신의 직장을 앗아간 환경주의에 대한 조롱이다).
작가의 이념적 편향과 별개로 희곡에 유머와 위트는 다분하다. 낭만적 블랙코미디로서는 손색이 없다. 하지만 유머의 맛도 살지 않고 코믹한 상황도 웃음을 유발하지 못한다. 리듬은 단조롭고 흐름은 경직되어 있다. 타이밍은 정교하지 않고 표현력은 미약하다.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깔끔하고 정갈한 무대는 탁월하다. 검정 포탈을 세우고 무대 내부는 흰색으로 마감했다. 천장까지 덮어 공간적 집중도를 강화했다. 블라인드 칸막이로 공간적 깊이를 준 것도, 동선을 좌우로 단순화한 것도 좋은 발상이다. 전체적으로 인물의 행위를 돋보이게 해주는 무대이다.
공연명: <다른 여름>
관람일시: 2021.05.11.20:00
극장: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최치언 작가는 가상vs현실, 허구vs실재, 연극 안vs연극 밖을 존재론적으로, 유희적으로 다루는 영역에선 독보적이다. 뫼비우스띠처럼 이분법적 구분이 모호한 경계지대는 최작가의 혼종적 상상력이 발아하는 습지이다. 이 주제를 공유하는 작품 일군은 예브레이노프와 피란델로를 제외하면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현상이다.
<다른 여름>은 기법 차원에서, 연출술 차원에서는 이 장르를 계승/발전시키고 있다. 하지만 극작술 차원에선 명백한 후퇴이다. 해리성 인격장애 증상에 대한 병리적 진단은 (의사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극의 진행에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다. 고곽대의 발원통에 대해 “병신 쪼다 오줌싸개”란 (집단 따돌림성) 별명이 언급되기도 하고, 패널티 스로우의 실패로 인한 심리적 좌절 등이 예상되지만, 어느 것도 확정하지 않고 있다. ‘발원통-징후-증상’의 인과관계는 고곽대에 접근하는 핵심 통로이지만, 그 길은 막혀있다.
<다른 여름>은 범죄가 과학적으로, 심리적으로 밝혀지는 범죄수사극 문법을 따르고 있지만, 결정적 지점에선 장르 문법을 위반한다. 고곽대의 범행이 폭로되는 지점. 계속 도망치라고 형사가 비꼬자 고곽대는 고백을 시작한다. 그토록 기대했던 진실에 도달했다는 어떤 쾌감도 없이. 화재 원인은 이도저도 아닌 미스테리.
고곽대가 화재날 자신의 인격장애를 극복했다면, 그간 형사 일행의 활동은 뭐란 말인가? 이 모순의 책임을 관객의 무지에 떠넘기면 비겁한 거다.
장면과 대사의 반복은 극의 긴장도를 높이는 데에도, 여운의 농도를 높이는 데에도 실패한다. 일상성이 제약된 이러한 시적 구성(비약, 반복, 리듬이 그 지표이다)은 사건과 인물의 치밀한 설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치밀성이 없다면 범죄극도, 심리극도 될 수 없다.
경기와 공연의 병치는 아이디어가 번쩍이는 대목. 감초 감독, 꼬장꼬장한 심판도 극의 이완을 돕고 긴장도를 조절하는 첨병들이다.
경기장 무대는 참신하긴 한데, 굳이 불편한 의자에 관객을 앉힐 필요가 있었을까? 무대는 왜 돌지?
공연명: <생활풍경>
관람일시: 2021.05.15.15:00
극장: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초연에 비해 풍자의 강도와 코믹함의 농도도 높아졌다. 리듬, 타이밍도 정교해졌다. 갈등 라인도 논리성이 보강되었다. 초반 PPT 사용도 효과적이었고,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낸 점도 좋다. 고민과 땀이 많았다는 증거이다. 반면 ‘손에 손잡고’가 빠진 점과 장애인 모방장면이 추가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극장 밖에는 장애인 이동권투쟁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혹자는 현실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 예술적이냐고 묻는다. 질료(현실)가 예술화되는 정교한 프로세스를 보지 못한 탓이다. 이 작품은 예술형식 중 가장 정교하고 복잡한 교향곡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에게나 허락된 게 아니다. 연극이 다큐냐, 라고 따지는 이도 있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학교 가는 길>을 보라. 현실의 질료를 그대로 차용한 다큐영화가 드라마영화에 비해 예술성이 떨어지는가?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극적일 때, 예술가는 현실 그 자체를 질료로 활용하기도 한다. 거리의 쓰레기를 모아 예술작품을 만드는 미술가나 일상의 한 장면을 포착하는 사진가가 그러하다. 문제는 그 현실의 질료를 현실감을 훼손하지 않은 상태로 어떻게 예술적 프레임 속으로 호출, 가공하는가이다. 바로 예술적 구성의 문제이다. <생활풍경>은 예술적 구성에 있어서 음악적 형식이라는 신기원을 보여준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원천 특허이다. 내용은 신문도, TV도, 영화도 채울 수 있다. 하지만 형식은 오직 연극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연극이 자신만의 형식으로(=연극적으로) 존재증명을 할 때 연극은 생존할 수 있다.
그래서 작년 초연 공연에 대해 이렇게 썼다.
“님비현상에 밑줄 치지 않고도, 지난 신문 기사를 뒤적거리지 않고도, 오직 공연만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때문에 <생활풍경>은 멋진 공연이다. 이처럼 완벽한 심포니를 본 적이 없다. 완벽한 소리의 향연이고, 협화음과 불협화음이 치열하게 격돌하는 완벽한 연주이다. 여러 성부의 복잡다단한 대위법적 충돌과 격렬한 대조는 말할 것도 없고, 각 성부의 독자적이면서도 협업적 진행은 한국연극이 맛본 적 없는 진수성찬이다. 이런 완벽한 심포니적 구성은 한국연극의 성취이자 지평이다. 코로나 시절에 이렇게 정교한 초 단위의 장면구성과 마이크로 미학화가 가능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한계를 넘나드는 배우들의 에너지도 국보급이다. 지금 ‘신세계’는 한국연극사를 집필하고 있다.“
공연명: <붉은 낙엽>
관람일시: 2021.05.20.
극장: 아트원씨어터 3관
독특한 극작술이다. 딸이 유괴된 엄마가 주인공일 법한데, 그 지인 가족이 무대를 채운다. 아들과의 소원한 관계,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의 숨겨진 비밀, 외도한 것으로 의심받는 아내 등 평범해 보였던 에릭의 가족은 걷잡을 수 없는 파멸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파멸의 종국은 에릭이 아니라 형과 아들로부터 도래한다. 이 또한 독특한 대목이다.
가족이 몰락하고 관계가 파괴되는 명백한 비극인데, 엔딩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혼자 남겨진 에릭, 그리고 결혼을 앞둔 에이미의 방문. 다시 시작하겠다는 질서회복의 의지. 비극은 어떤 잔여 없이 감정을 모조리 파멸에 소진하는 완전연소를 추구한다. 에릭은 다시 시작할 명분도, 기회도, 기력도 사라졌다. 십수 년이 지난 후의 엔딩은 비극 감정을 흔드는 묘한 정서를 유발한다. 이것도 독특한 극작술 경험이다.
원작 소설이 어떻든 각색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범죄추리극의 묘미를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극작술적 시도를 놓치지 않았다. 수사극이나 가족극에서 흔히 범하기 쉬운 ‘수다’(사건진행을 지체시키고 갈등과 대립에 과도하게 심취하기)를 최소화했고, 필수정보를 내상 없이 전달하는 법도 없었다. 각색의 정석을 보는 듯하다.
각색의 탁월함을 증폭시킨 배우의 저력과 연출의 정교함도 빼놓을 수 없다. 배우들은 절도와 절제를 장착했고, 연출은 리듬의 조절과 의미적 방점 설정에 정교함을 입혔다. ‘연출적 색깔’에 욕심이 날만도 한데, 에릭에게 무대의 지휘권을 전임한 것은 용기에 가깝다.
에릭의 연기는 최상급이다. 하지만 너무 진지하고 지적인 것은 감점이다. 에릭은 자신의 비극적 결함(hamartia)을 드러내야 하지만 저음과 차분한 동작, 고뇌하는 듯한 정의로운 표정으로 파탄의 화근이 자신에게 있음을 계속 숨긴다. 너그러운 아빠, 혹은 어머니를 사랑한 아들, 형을 보살피는 다정한 동생, 아내를 존중하는 남편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지, 불신, 의심 – 화근은 에릭에게 있다!
밀폐된 공간이라 변용이 어려운 점, 무대 천장이 낮아 후방 관객의 시야가 제한적인 점도 옥에 티이다. <수정의 밤>이나 <왕서개 이야기>에서도 공간은 연출의 구상과 어울리지 않았다.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다.
공연명: <타자기 치는 남자>
관람일시: 2021.05.22.15:00
극장: 한양레퍼토리씨어터
형원: 삼청교육대에서 6개월 넘게 지옥을 경험한 아이. 총상 후유증으로 다리를 전다. 그 아이가 문식을 찾아와 가장 큰 고통으로 복수를 하겠다며 자신의 팔목을 긋는다. 그의 고통과 그의 분노와 그의 복수심이 별다른 설명 없이 극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청송교도소에 수감되었다는 전언. 그가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교도소에서 ‘교도’되어야 할 명분은 무엇인가? 형원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면, 교도소행은 명백한 오류이다.
문식: 누가 뭐래도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그의 내적-외적 행위는 드라마의 중추이다. 하지만 성격적 개연성과 필연성이 충분히 여물지 않았다. 개연성이란 군부독재 하에서 비겁하게 처신하던 나약한 지식인 이미지의 연상 가능성이고, 필연성이란 학교를 그만둔 일, 형원에게 해야할 사죄, 경구를 말리는 일 등 피할 수 없는, 외면할 수 없는 결단의 논리성이다. 그의 고뇌와 시련, 갈등, 통증이 전달되지 않는다. 공감의 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반의 흥미진진한 진행이 형원의 등장 이후 급격한 리듬 혼조를 겪다가 후반부에는 뒤죽박죽 엉켜버린다. 인물간 관계도 피상적이고 깊이가 부족하다. 좀더 날카롭고 벼리고 다듬어야 한다.
초반 15분의 천연 웃음은 귀하디귀하다.
공연명: <정글>
관람일시: 2021.05.22.19:30
극장: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예술이란 무엇인가?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다. 숭고한 신념이나 고귀한 사상을 전할 때, 승리의 감격이나 희생의 비장함을 보여줄 때, 요절복통의 웃음이나 기막힌 반전을 선사할 때, 기묘한 볼거리나 놀라운 재간을 과시할 때, 우리의 마음은 움직인다.
<정글>은 난민의 울분과 고난, 그들 간의 갈등과 대결, 자원봉사자들의 헌신과 배려를 보여준다. 애처롭고 절박한 현재의 문제이고, 19-20세기 역사까지 성찰하게 만드는 묵직한 주제이다. 다급한 고함, 서둘러 뛰어가는 발소리,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설정, 서정적 음악, 섬세한 조명 등 무대 표현방식은 다양하다. 하지만 마음이 움직이질 않는다. 관객과 (자주) 등을 지는 무대구조도 그렇고, 국적까진 몰라도 자봉단과 난민의 구별조차 힘든 인물형상화 방식, 불분명한 발음으로 인한 이름 혼동(고성 발화는 느리고 불분명한 법이다) 등 난민의 고난에 다가가기 힘들게 하는 요소들이 많다. 좋은 내용이, 땀내 나는 제작진의 노력이, 무엇보다 배우들의 고군분투와 연출의 고뇌가 빛을 발하지 못하는 듯하여 안타깝다.
기나긴 도버해협처럼 무대와 객석의 거리도 멀기만 하다.
공연명: <미스터쉐프>
관람일시: 2021.05.24.19:30
극장: 동숭무대 소극장
희곡은 문학literature이고, 연극은 예술art이다. 전혀 다른 분야이다. 무대화는 문학을 예술로 옮기는 번역이자 (재)창작이자 가공이다. 어떤 예술가는 문학의 맛을 그대로 무대에 옮기는 게 장땡이라고 착각한다. 희곡의 재현에 집중했다 등의 발언. 천만에! 문학은 문학이고, 예술은 예술이다. 예술가는 예술의 원리를 준수해야 한다. 문학의 맛은 문학작가들한테나 줘라~
<미스터쉐프>는 문학이 어떻게 무대화되는지 보여준다. 문학텍스트가 어떻게 연극텍스트로 번역되는지, 문자언어가 어떻게 행위언어로 (재)창작되는지, 구멍난 텍스트가 어떻게 생생한 육감의 형상으로 가공되는지 잘 보여준다. 코미디라면 저렇게 형상화하는 거다. 그래야 (문학이 아니라) 예술이다. 연극의 맛을 요리할 줄 아는 거다.
시종일관 선욱현의 웃음과 윤상호의 재능을 만질 수 있다. 저렇게 연출가와 배우의 미적 가공이 지각되어야 예술이다. 희곡을 줄줄 읽는 오디오북 공연은 저리 가라~
단, 스케일이 문제. 이 희곡은 <서로의 장단점을 용해시키는 커플의 탄생>에 그칠 게 아니라, <고난을 극복한 한 커플의 좌충우돌 성공기>까지 나아가야 한다. 2인극페스티벌 출품작의 스케일은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웃음이 따뜻함과 건강함을 확보하지 못할 때, 공허해진다. ‘커플의 탄생’ 단계에선 따뜻함과 건강함이 생성되지 않는다.
공연명: <자본2>
관람일시: 2021.05.24.19:30
극장: 동숭무대 소극장
‘뉴스타파’는 2013년부터 수십 차례 조세도피처 관련 보도를 이어오고 있다. 특히 2017년 애플비와 아시아시티에서 유출된 파일 보도에는 영국 여왕부터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 푸틴 대통령 친인척까지 포함된 거물급 세계 지도자들의 역외거래 내역뿐만 아니라, 한국인 유명인사 또한 195명이나 연루되어 큰 충격을 주었다.
<자본2>는 ‘파나마 페이퍼스’와 ‘파라다이스 페이퍼스’ 사건을 토대로 글로벌 자산관리회사의 불법 조세도피 행각을 고발한다. 이야기는 세 줄기로 진행된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를 중심으로 비밀자료를 입수-분석-보도하는 다큐성 라인과 역외탈세전문가 로사 교수 일행의 모저 폰타나 잠입기 드라마, 그리고 시리아 난민의 고난 라인.
<자본2>가 표방한 다큐드라마는 다큐의 정보전달력, 논리정연성에 드라마의 흥미진진함, 긴장감을 결합한 형식이다. 다큐와 드라마의 장점이 결합하여 시너지를 발휘하면서 다큐보다 더 다큐적이고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것을 기대한다. 하지만 <자본2>는 새로운 정보발굴보다는 기존 정보의 재가공에 머물 뿐 아니라, 드라마 요소 또한 단순하고 허약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정보발굴이 필수적인 건 아니다. 중요 정보를 탁월한 구성력으로 재가공하여 정보가치를 증폭하는 것도 다큐드라마의 미덕이다. 하지만 <자본2>의 정보구성력은 그다지 참신하지 않다. 정보전달자-배우의 화술 또한 말하기보다 읽기에 가깝고 그 방식은 경직되고 패턴화되어있다. 정보의 위계와 경중을 설정하지 않거나 과도한 전달욕망이 앞설 때, 전달형식에 대한 사유가 부족할 때 발생하는 현상들이다.
드라마적 약점은 스스로 야기한 측면이 있다. 1인다역의 몽타주적 구성 대신 15명에게 캐릭터를 부여하고 사실적 연기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다큐드라마는 행위와 구성이 생명이건만 <자본2>는 서사적 주체를 숨기고 픽션을 강조한다. 튼튼한 드라마가 아니면 버티기 힘든 전략이다.
자국의 이익 때문에 임의로 시리아 및 중동의 정세에 개입한 서방 국가들의 패악을 무시하고 알아사드 독재가 시리아 난민사태의 유일한 원인인 듯 보여주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난민 일반이 아니라 시리아 난민을 특정했다면 시리아 사태에 대한 서구의 이기적 시각보다는 역사 감각을 갖춘 공정한 시각이 필요하다.
하나의 테마에 집중하는 근성은 기대할 만하다. <자본3>은 한국인 조세도피자들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