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내 탓이다

윤서현(연극평론가)

제11회 서울미래연극제의 공식참가작 청년창작집단ㅁ의 <Sign>(김하윤 작, 이하미 윤색/연출)은 세 명의 인물 ‘편의점’, ‘엘리트’, ‘미친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피해와 가해가 뒤엉킨 세계를 일상적이고 진솔한 언어로 표현한 인물들의 독백은 한 인물의 사인(死因)이 무엇인지, 그 죽음의 조짐(sign)은 언제부터였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작품의 이러한 주제는 서로 독립된 이야기처럼 제시되었던 독백들이 만나는 순간에야 생성되기 때문에 일종의 반전 효과를 얻는다.


제공 서울연극협회, ⓒ 정재인

대학 휴학생 알바 ‘편의점’(허혜수 분)은 선배의 부음을 받고 장례식장에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다. 그는, 동시에 술자리에서 빠져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자신과 엮여 추문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로 평판이 좋지 않았던 이다. 하지만 ‘편의점’이 장례식 참석을 고민하는 이유는 그 선배 때문이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과 그를 한통속으로 묶어 입방아를 찧어댔던 같은 과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이다.

‘엘리트’(오현우 분)는 주인을 찾아주려 주워든 지갑 때문에 억울하게 소매치기로 몰린다.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았으나 어쩐지 지갑 주인이 자신의 행색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어 주먹을 쓰고 철창신세를 지게 된다. 매번 낙방했지만 판사를 꿈꾸며 10년 간 사법고시에만 매진한 그의 영혼은 이미 고립감과 열패감, 비대해진 자기의식으로 이미 피폐해진 상태였다. 합의금을 구하지 못해 전전하던 ‘엘리트’는 수준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헤어졌던 전 여자 친구의 청첩장을 받게 된다. 돈이 더욱 급해진 그는 취객들을 상대로 소매치기를 시작하게 된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더듬던 그는 사회를 향해 자기 죄의 책임을 묻는다.


제공 서울연극협회, ⓒ 정재인

‘미친개’(황인덕 분)의 서사는 어떻게 하면 하루를 더 즐겁게 보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던 천진한 꼬맹이가 가해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싸움을 잘하던 이웃집 형에게 무심코 베푼 호의로 인해 예기치 않게 학교생활이 편해진 화자는 숙제를 허락 없이 베끼거나 만화책을 돌려주지 않는 등 또래집단의 규칙을 어기기 시작하면서 비행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부풀려진 소문으로 일진이라는 정체성까지 갖게 된 그는 결국은 폭력 행사로 ‘미친개’라는 별명까지 얻는다. ‘미친개’의 폭주는 입시 시절 자신을 낮추어 저학년들과 같이 공부하고 일진에서 힘겹게 탈퇴하면서 끝난다. 대학 입학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얻은 그는 문득 자신이 했던 잘못들에 생각이 다다른다. ‘엘리트’와 달리 ‘미친개’는 모든 게 자신의 탓이라고 여긴다.

작품의 묘미는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얽혀 있는지가 마지막에 가서야 한꺼번에 드러난다는 데 있다. ‘편의점’의 이야기 속 선배가 바로 ‘미친개’이며, 괜한 소문을 피해 입대한 ‘미친개’가 군복무를 마치고 과거 자신이 잘못했던 이들을 찾아다니며 사과를 하러 다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근무 중인 ‘편의점’을 발견한 ‘미친개’는 그녀 또한 자신 때문에 피해를 본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으나 선뜻 사과를 하지 못한 채 귀가하던 중 누구라도 탓할 자가 필요했던 ‘엘리트’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미친개’의 죽음은 그를 살해한 ‘엘리트’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지만 스스로가 살아온 궤적의 탓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인과응보라고만 치부할 수도 없다. 그를 일진으로 만든 것은 그를 끌어들인 다른 이들의 선택이었으며 그가 쉽게 일진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데에는 부풀려진 소문의 영향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는 분명 피해자다. ‘편의점’이 근거 없는 소문으로 고통 받은 것도 ‘미친개’의 탓이 아니라 남 말하기 좋아하는 주변인들 때문이었다.

사건을 보여주기보다는 회고적 독백들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인물들 각각의 대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인물들의 형상이나 이들을 둘러싼 세계가 그려질 정도로 생생한 언어가 인상적이다. 대학 신입생으로, 절대적 객관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각자의 객관이 있다는 사실에 섬뜩해하는 ‘편의점’의 언어에는 주저함이 묻어난다. 라스콜리니코프처럼 평범한 모두를 위한 윤리보다는 비범한 나의 권리를 내세우는 ‘엘리트’에게서는 자신의 비행을 3인칭으로 서술함으로써 죄의식에서 벗어나려하는 무의식이 엿보이며, 그와는 달리 자신이 직접 하지 않은 비행에서조차 꺼림칙함을 느끼는 ‘미친개’의 소년과 같이 진솔한 언어도 인상적이다.


제공 서울연극협회, ⓒ 정재인

사건의 의미와 인물들의 갈등, 국면 전환이 무대와 조명을 통해 명료하게 제시된다. 무대의 바닥과 벽에 생긴 음영이 인물의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특히 침대에 누워 불안해하는 ‘엘리트’에게 방 천장이 낮아진 것처럼 천장에서부터 침대 위로 깊이 드리운 그림자나 골목에서 폭력을 일삼는 ‘미친개’의 얼굴을 가린 그림자 등의 표현이 적재적소에서 빛을 발했다.

작품은 진정성 있는 사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 있어서 최근 사회적 이슈들을 떠올리게 한다. ‘미친개’가 사과를 하기 시작한 것은 군 시절 그를 면회 온 일진 형의 사과 덕분이었다. 한 사람의 사과가 또 다른 사과를 불러일으킨다. 사과를 받아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미친개’의 사과를 받은 친구의 말처럼, 사과는 모든 것을 되돌려놓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해결책이다.

“황당한 건 뭔지 아냐? 그래도 네가 사과를 하니까 나도 후련한 마음이 든다는 거야. 피해자는 난데.”

이러한 의미에서 작품의 마지막, 자신이 피해자라는 생각에 조의금으로 빈 봉투를 냈던 ‘편의점’이 장례식장에서 받은 친구들의 사과를 받은 후, 그 사과를 영 마뜩치 않아하면서도 다시 돌아와 빈 봉투에 3만원과 담배 한 개비를 넣는 장면이 큰 울림을 준다. ‘편의점’은 일종의 사과를 하고 있는 셈이다. ‘미친개’에 대한 편견에 자신의 탓이 조금은, 아주 조금은 들어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그녀를 사과하게 만든다.


제공 서울연극협회, ⓒ 정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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