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리셋(reset)

작: 앨리샤 해리스

번역: 함유선

연출: 장일수 연출

윤서현(연극평론가)

사진 제공: 극단 백수광부

극단 백수광부의 젊은 연출가전을 통해 국내 초연된 <Is God Is>(번역 함유선, 연출 장일수)는 아버지를 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흑인 자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미국의 신진작가 앨리샤 해리스(Aleshea Harris)의 동명 희곡이 원작이다. 자신들이 어렸을 적 화재로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를 만나게 된 러신과 아나이아 두 자매는 그녀의 몸에 불을 붙인 것이 ‘그 남자’, 즉 그들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머니의 전신을 덮쳤던 화마는 러신의 목과 등, 아나이아의 얼굴에도 흔적을 남겼으며 자매들은 사고 이후 수차례 입양과 파양을 겪으며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아왔다. 어머니는 딸들에게 ‘그 남자’는 물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해달라고 부탁/명령한다. 자매는 자신들을 만들어 낸 어머니를 기꺼이 ‘신(God)’이라 부르며, 큼지막한 돌덩이를 넣은 양말 하나를 무기 삼아 화재 사건 당시 아버지를 비호한 변호인은 물론 아버지의 현재 처, 그들의 두 쌍둥이 아들들까지 차례차례 처치하고 드디어 아버지 앞에 선다.

가정폭력과 방화, 부친살해의 비극적 모티브 위에 웨스턴 필름의 클리셰와 아프로 아메리칸의 펑크 문화적 요소들이 뒤섞인 이 작품은 그 스타일적인 독창성은 물론 흑인여성을 서사의 중심에 위치시켰다는 점에서 2018년 미국 초연 당시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이번 국내 초연에서는 아프로 아메리칸들의 생활 문화적인 특징에 대한 표현은 과감히 생략되었다. 대신 결코 끊을 수 없는 고통과 폭력의 관계, 더 정확히는, 해결되지 못한 고통이 또 다른 폭력의 기원이 된다는 보편적 주제의식이 더욱 명확하게 시각화되었다. 무대 가득히 타오르는 불의 영상이나 시뻘건 조명은 비정한 폭압과 이를 향한 증오 양쪽 모두를 표현한다. 페도라를 쓴 ‘그 남자’가 웨스턴 영화 속 주인공처럼 과묵한 포즈로 등장하는 장면들과 그가 등장할 때 사용되는 조명과 음악이 특히 인상적이다. 연출은 무거운 소재와 그것이 증폭시킨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이완시키는데, 과장된 폭력 장면에 힙합 리듬을 입힌 시도, 우회 없는 잔인함이 빚어낸 웃음들, 극단과 극단을 오가도록 의도적으로 설정된 인물 성격의 설정 등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 이야기 전개와 움직임에 있어서의 다양한 템포 변화 또한 작품의 결말까지 관객들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사진 제공: 극단 백수광부

드디어 만난 아버지가 풀어놓는 이야기는 일종의 반전이다. 자신이 꿈꿔온 이상적인 가정 상에 적합하지 않은 아내를 제거하고 완벽한 삶을 살고 싶었다는 ‘그 남자’의 고백은 사악한 만큼 ‘진정성’ 있게 들린다. 그는 자기 삶을 되돌리기 위해 방화를 선택했다. 모든 것을 리셋하고 싶었던 그의 욕망은 그녀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어머니의 욕망과 다르지 않다. 게다가 ‘그 남자’의 말대로라면 자매들의 화상은 어머니가 활활 타는 몸으로 그들을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그 남자’에 대한 복수를 위해 아이들을 화염 속으로 끌어들인 어머니. 메데이아. 혼란스러워하는 아나이아가 ‘그 남자’에게 다시 무릎을 꿇기 직전, 이미 쌍둥이 형제들과의 격투 중에 죽은 줄 알았던 러신이 그의 뒤를 공격한다. 러신은 어머니가 당했던 것처럼 ‘그 남자’의 몸에 독주를 뿌리고 불을 붙인다. 불타는 아버지에 의해 러신은 다시 한 번 화염 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혼자 남은 아나이아는 이제 어머니에게 되돌아간다. 이번에는 어머니를 죽이기 위해서다. 병상에 누운 ‘신’은 ‘그 남자’와 그가 가진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에 오래간만에 편안한 미소로 잠을 청하고 아나이아는 돌덩이가 든 피 묻은 양말을 꺼내든다.

사진 제공: 극단 백수광부

러신과 아나이아는 같은 상처를 지녔지만 상황을 대면하는 방식이 달랐었다. ‘신’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타인을 죽이는 행동을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러신과 달리 아나이아는 이에 구역질을 느끼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인다. 두 자매 사이의 의견 차이와 이로 인한 갈등은 한 사람의 내면에서 가능한 내적 갈등의 모습 그대로이다. 아나이아는 매번 러신에게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결국 스스로가 점차 피에 물들게 된다. 작가 해리스는 ‘그 남자’의 두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또 다른 쌍둥이 형제의 모습을 통해서도 비슷한 종류의 가능성과 좌절을 제시한다. ‘그 남자’가 쌍둥이 중 자신과 닮은 장남을 ‘크게 될 놈’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차남은 ‘그 남자’와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스트리퍼로 위장하여 자신들의 집에 침투한 자매 중 아나이아에게 친절함을 보이기도 하는 인물로 화해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든다. 만일 러신이 ‘그 남자’의 장남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차남과 아나이아는 친구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차남이 자기 안에 아버지의 폭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형의 죽음을 목도한 이후이다. 불이 번지듯, 딸들과 아들들 모두는 피로 물든다. 화해를 기대하게 하는 모든 설정들은 계속해서 ‘보란 듯이’ 좌절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 아나이아가 양말을 쳐든 바로 그 순간에 암전이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고통이 또 다른 폭력을 탄생시키는 이 영원한 굴레가 강조되는 것이 작품의 일관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연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아나이아는 쳐들었던 손을 내린다. 자신의 삶을 리셋하기 위해 자신들을 도구로 사용한 ‘신’을 내리치지 못한다. 그녀의 다른 손이, 자신의 태중에 있는 이제 3개월 된 생명을 쓰다듬고 있다. 어떠한 리셋 버튼으로도 고통 이전의 시기로 돌아갈 수 없다는 깨달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무력감 때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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