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이 보여준 내일

제1회 혜윰창작공연예술제 <어떤 내일도 오지 않을 것처럼>

윤서현(공연과이론을위한모임)

총 4편의 SF단막극으로 구성된 <제1회 혜윰창작공연예술제>(윤색/총연출 연지아)가 막을 내렸다. 각각의 단막극은 시공과 차원을 달리하는 다양한 설정으로 관객의 흥미를 유도하는 한편 주제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시의성이 돋보였다.

사진제공: 창작집단 혜윰

<프리즈 더 파파>(작/연출 정영재)는 냉동된 부친의 해동 시기를 앞둔 자식의 내적 갈등을 소재로 한다. 해동된 부친의 뇌가 정상적으로 기능할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아닌 생활고에 시달리는 딸 한희만이 그의 “유일한 보호자”다. 인류역사에 남길 궤적과 세간의 관심을 생각해보라며 들떠있는 연구소장과 달리 딸에게 부친의 해동은 생활의 걸림돌일 뿐이다.

극도로 작은 소품을 사용하거나 소품이나 배경을 투명한 아크릴 칠판에 하얀 물백묵으로 그려 표현한 방식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무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향한 집중력을 저하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반면, 무대 둘레를 따라 아크릴 칠판을 90도씩 회전 시키면서 이에 따라 무대에 설치된 테이블과 연기자들도 동시에 90도씩 회전하는 장면은 너무나도 인상적이었다. 여러 대의 카메라를 360도로 설치해 촬영함으로써 피사체 주위를 회전하는 시각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영화의 한 장면을 무대에 구현한 것이다. 무대는 중앙 회전축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투명 실린더처럼 느껴진다. 이와 같은 감각은 한희가 캡슐 속에 냉동되어 있는 부친을 만나는 마지막 장면까지 연결되어 이 작품의 주제를 더욱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한희가 유리벽 너머 관객석 쪽에 아기처럼 웅크린 채 얼어붙어 있을 것으로 상정된 부친을 향해 엄마가 아빠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어주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한 순간, 간호사가 한희를 위해 틀어둔 라디오의 음악 소리가 마치 물속에 잠겨 듣는 것처럼 먹먹해지면서 한희의 마지막 대사도 음소거 된다. 이로 인해 관객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캡슐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낀다. 무대 앞 쪽에만 떨어지는 조명이 이 설정을 완성시킨다. 이제 부친의 공간에 놓인 관객들은 한희의 마지막 말, 그 입술 모양을 읽게 되는데, 그것은 “나도 사랑해”라는 고백의 말이다.

한희의 대사에 수긍해온 관객들에게 마지막으로 부친의 시선을 부여하는 이 작품은 부양책임을 떠안은 자식-보호자들의 고통만을 강조하지 않고 그들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부모-피보호자의 안타까운 심정까지도 헤아려 보게 한다. 동시에 ‘미래의 보호자를 보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만든다.

사진제공: 창작집단 혜윰

<핑거 앤 프린트>(작/연출 정솔아)에는 지문인식 하나만으로 본인인증을 비롯한 사회 활동 전반이 가능한 세계가 등장한다(사실 이미 우리의 세계가 그러하다). 도박으로 파산해 도시 밖 ‘니힐’이라는 곳에 버려진 쎄로는 출생부터 지문 없는 아이 리베와 아이의 아버지 도무스를 만난다. 작품의 인트로에 붉은 조명과 그림자로 삽입된 도시의 장면과 니힐의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하나 윤곽을 그려 만든 새하얀 소품들이 만들어내는 대조가 인상적이다. 지문을 스캔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아무것도 만지지 못하는 쎄로는 모든 것을 직접 재배하고 제작하는 것이 당연한 니힐의 아이 리베와의 긴 대화 끝에 새 삶을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리베의 아버지 도무스도 쎄로에 대한 애초의 편견을 버리고 그에게 자립의 방법을 가르쳐주리라 약속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 작품을 해피엔딩으로 끝내지 않았다.

작품의 말미에 추가된 장면 하나로, 이제껏 리베와 도무스가 쎄로를 위해 들인 모든 노력들이 공허해진다. 작품의 첫 장면에 등장했던 도박 테이블 장면이 똑같이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이 장면은 과거 장면의 회상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쎄로의 현재이다. 테이블 위에 리베가 건넨 화분이 꽃을 못 피운 채 그대로 놓여있고 그는 여전히 “올 인”을 외친다. 디지털 금융 세계가 부추기는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불길한 예감이 다시 한 번 증명된다.

사진제공: 창작집단 혜윰

<아라, 다라>(박현 작, 이승빈 연출)는 지구로 보내진 외계인 두 명이 겪은 험난한 착륙 기록이다. 둘에게는 낯설고 강하게 느껴지는 지구의 중력을 표현하기 위해 배우들이 러닝 타임 내내 바닥에 들러붙은 듯 누워있다는 설정이 기발하다. 타고 온 우주선에서 나가지도 못한 채 오직 일어서기 위해 겨우 고개를 가누고 기어 다니다가 결국에는 몸을 비틀다 못해 서로를 뒤집기까지 하는 일련의 과정이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슬랩스틱 코미디가 아니다. 두 인물이 이곳에 도착한 것은 자신들의 행성을 덮친 빙하기를 해결할 열쇠를 지구 온난화에서 찾기 위해서이다. 지구 온난화를, 그것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동경하는 외계인을 등장시켜 언급한다는 발상의 전환이 유쾌하다.

우주선의 벌어진 틈을 통해 들어와 긴 주황색 세로 줄로 무대를 가른 노을빛과 모래를 쓸며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우주선 바깥 공간에 대한 상상을 부추긴다. 한 번도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지구의 빛과 소리에 감동한 젊은 비행사 아라의 설레임 가득한 시선이 관객석을 향한다. 물이 차는 우주선을 무사히 탈출한 두 인물이 따뜻한 북극 해변에 감격해하는 장면은 아이러니한 웃음을 자아낸다. 물이 따뜻하다며 놀라는 아라를 보고 “이게… 말로만 듣던 온난화야.”라며 행복해하는 다라의 대사는 석탄연료의 부작용으로 고통 받는 지구인-관객들에게 아이러니컬한 웃음을 선사한다.

사진제공: 창작집단 혜윰

<몽역>(채제성 작, 안나래 연출)은 모든 이의 정신이 연결되는 꿈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가정에 기반한 작품이다. 빗길 음주운전 사고로 한 가정을 파탄 낸 인물 하람이 형량을 채우고 죄를 용서받았다며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출판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유명 꿈속 토크쇼의 두 진행자는 개과천선 이미지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하람을 어렵게 초대하게 된다. 매 인터뷰 꼭지를 녹화하고 쉬는 시간을 갖는 형식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로르샤흐 테스트의 몇몇 그림들이 회전 영상으로 제시되고 사고 당시의 순간이 재연되기도 하는 등 하람의 무의식을 파고들어 그의 위선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특히 비현실적인 불연속 장면들의 구성과 이를 재연하는 배우들의 앙상블이 아주 훌륭하다. 진지한 연기, 조명과 음향 효과가 이 작품의 완성도를 한층 높였다.

작품의 반전은 두 진행자가 각자 피해 가정의 남편, 그리고 피해자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이 토크쇼에 하람을 끌어들이기 위해 오랜 기간 공모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부터이다. 이들이 모두 꿈속에 들어와 있는 시간 동안 현실 세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다만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심전도 기계의 삐익 하는 소리가 하람이 단순히 잠들어 있는 상태는 아닐 것이라는 어렴풋한 암시를 준다. 두 진행자는 아무런 뉘우침 없는 하람을 꿈의 세계에 가두어버리고 퇴장한다. 그 안에서 그는 영원히 죄인으로 남는다.

혜윰창작공연예술제의 출발을 축하한다. 물론 이번 작업의 전부를 세세하게 소개하기에는 짧은 지면이었지만 개개의 작품들이 가진 개성과 주제의식, 섬세한 짜임새가 조금이나마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어떤 내일도 오지 않을 것처럼’ 오늘을 사는 혜윰의 내일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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