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생처전> 리뷰
배선애(연극평론가)
페미니즘연극제가 올해로 다섯 해를 맞았다. 첫 해부터 2회까지 참가작 전 작품을 모두 관극했고, 그 중 몇 편은 리뷰를 썼다. 그것이 필자가 페미니즘연극제에 함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3회부터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는데,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인간이라 공연정보에 굼뜨다보니 페미니즘연극제 공식참가작의 매진행렬에 관람기회를 놓쳤다. 코로나로 인해 객석도 거리두기를 했기 때문에 좌석 수가 절반 이상으로 줄어든 상황이라 관객은 더더욱 부지런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다. 어쨌거나 공연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상황인지라 정신 승리를 위해 합리화를 했다. ‘그래, 이제는 이렇게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관객들이 연극제 꽃을 피워주겠구나.’ 그렇게 3회와 4회는 참가작들의 면면이 실린 전단지만 아쉽게 바라봤는데, 올해는 거리두기를 하지 않아서인지 좌석을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고, 그 덕분에 오랜만에 연극제 작품을 관극하게 되었다. 연극제 구성이 여러모로 다양해진 것이 도드라진 이번 5회 페미니즘연극제에서 흥겹고 재미난 작품을 만났는데 바로 <허생처전>(연암 박지원 원작, 정진쇠 각색·대본·연출, 김은경 작창, 극단 문, 나온씨어터, 2022년 7월 21일~24일)이었다.
판소리가 고전(「허생전」)을 살려내다
<허생처전>은 이미 제목부터 재미있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을 중심으로 삼지만, 그것을 각색해서 ‘허생의 처’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의도가 명백히 읽힌다. 허생의 처에 집중한 건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다. 1989년에 이남희 작가가 쓴 단편소설 「허생의 처」가 이미 존재한다. 이 소설은 주인공 허생을 책 읽게 놔두지 않고 바가지를 긁는 인물 정도로 치부되던 허생의 부인을 중심에 두고, 5년 간 세상을 떠돌다 돌아온 남편의 행적을 확인하면서 점차 순종적인 부인에서 주체적인 여성으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창작판소리’라고 명명한 <허생처전>은 소설의 부인과는 다른 행적을 밟아나갔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각색·대본·연출을 맡은 정진쇠(정진세, 정진새, 정진쇠 모두 동일인이다. 작품이 판소리이다보니 머슴의 대명사 ‘돌쇠’의 어감을 살리기 위해 ‘진쇠’가 된 듯하다.)의 영리함이 눈에 들어온다. 첫 번째는 원작인 「허생전」을 먼저 간략히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패러디라고 하면 원작보다는 그것을 비틀어낸 의도와 목적 때문에 패러디 작품만 집중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원작을 잘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진행되는 패러디가 많기 때문에 특별히 원작을 설명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그러나 「허생전」은 아는 사람만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다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는 고전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허생의 처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원작인 「허생전」을 먼저 보여준 것은 이 고전을 어떻게 비틀어내는지를 주목하게 한다. 원작에 대한 정보를 먼저 제공한 후 그것을 각색한 양상과 의도를 잘 파악하게 한 것은 고전을 지금의 시각으로 새로 읽는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판소리를 중심에 두고 연극성을 접목한 점이다. 허생 처의 이야기를 일반적인 연극으로 공연했다면 조선시대 여성수난사의 에피소드 하나를 보여주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판소리를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다. 판소리 때문에 당대 분위기를 살렸고, 판소리 때문에 허생 처의 힘든 삶을 객관화시켜 볼 수 있었고, 판소리 때문에 고전을 새로 읽는 좋은 방법을 학습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판소리 본연의 예술 구현에 집중하기보다는 연극성을 접목한 것이 큰 힘을 보탰다. 판소리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설명이 필요하거나 강조하기 위한 장면들은 대사와 행동으로 입체화했다. 본래 판소리는 소리꾼의 것이기에 창작판소리도 각색이나 작창 등을 소리꾼이 직접 하지만 이 작품은 연극 연출가가 연출을 담당하면서 소리꾼에 고수, 거기에 연극 배우 한 명이 더 추가되어 다양한 연극적 장치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로 인해 판소리도 더 풍성해지고 작품의 주제도 더 선명해지는 효과를 낳았다.
판소리가 ‘허생 처’를 살려내다
원작 「허생전」에서 집을 나온 허생은 제수용품이나 말총 등을 매점매석해서 조선의 경제를 뒤흔들며 큰돈을 번다. 그 돈을 도적들에게 나눠주거나 섬에 정착하는 자금으로 쓰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결국은 빈손으로 집에 돌아온다.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오라는 부인의 닦달 때문에 나선 길이었고, 방법이야 어쨌든 큰돈을 벌었음에도 집에 한 푼도 갖고 가지 않은 허생을 보면 내 남편이 아닌데도 이렇게 무책임한 가장이라니! 탄식이 절로 나온다. 부인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허생처전>에서 허생의 부인은 남편의 매점매석 때문에 고리대금업자에게 빚을 낼 수밖에 없었고 그로인해 신체포기각서 작성에 인신매매까지 당하게 된다. 허생이 큰돈으로 세상을 쥐락펴락할 때 허생 처는 그 쥐락펴락하는 바람을 직통으로 맞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 여인의 몸으로 운신하기 힘든 상황을 온몸으로 겪어낸 허생 처는 겨우겨우 집에 돌아왔는데, 그 사이 먼저 돌아온 허생이 권력과 자본의 대표자들과 조선을 구할 방법이라면서 여인들을 도구로 삼는 대화를 듣고는 분노한다. 다음 날 모두 불타버린 집에 잘 벼린 칼과 편지 한 장이 남아 있다. 나라 밖으로 팔려가는 여인들을 구하기 위해 홍평국 장군(홍계월)을 찾아간다는 내용이다. 허생의 처는 여성으로서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하나의 주체로서 각성하게 되었고, 그것을 실천하고 연대를 도모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다. 그럼에도 윤영 노인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기록하지 말라는 당부를 한다. 허생전만 남아있는 건 허생 처가 자신을 기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허생 처의 고단한 삶을 진짜인 듯 살려낸 것은 소리꾼 김은경이다. 작창까지 담당한 김은경은 다양한 장단의 창은 물론이고 아니리와 발림 등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전체 작품의 리듬을 탄력적이면서도 견고하게 만들어냈다. 허생 처는 원작에서 목소리를 갖지 못한 존재였으나 김은경의 소리로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판소리의 소리가 더욱 특별하게 들리는 이유이다. 허생과 윤영 노인을 연기한 김준우 배우는 소리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장점으로 발휘했다. 김은경 소리꾼이 유려한 창을 선보였다면 김준우 배우는 흡사 래퍼처럼 자신만의 리듬을 탔다. 그 조화가 허생과 허생 처의 관계처럼 보이는 것도 재미난 부분이었다. 거기에 북은 기본, 다양한 음향을 현장에서 담당한 박한결 악사의 순발력과 솜씨도 허생 처에게 더 풍성한 생기를 불어넣었다. 필자의 관극일에는 배리어프리가 진행되지 않았지만, 무대 한편의 수어통역사들도 허생의 처를 조용하면서도 열심히 살려냈을 것이다.
<허생처전>은 재미난 공연이었다. 판소리였지만 창작판소리의 유연성을 십분 발휘해서 관객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이끌어냈으며, 허생 처에 대한 상상을 통해 여성이 부딪히는 사회적 모순과 부조리를 직시하게 했다. 고전에 대한 유쾌한 비틀기, 흥겨운 장단, 변화무쌍한 캐릭터, 여전히 중요한 문제의식 등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룬 공연이었다. 배우와 소리꾼, 악사의 조화는 더할 나위 없었다. 판소리가 정말 여럿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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