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사위와 소리로 벌이는 해원(解冤)의 놀이판-<풍편에 넌즞 들은 <아가멤논>>

이성곤(연극평론가)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이강물

공연 제목이 하 수상하여 얼른 검색을 해보았다. ‘넌즞’을 입력하니 ‘풍편에 넌즞 들은 <아가멤논>’만 화면에 잔뜩 뜬다. 그러다 어떤 시구절에서 어렵사리 하나를 찾아냈다. “북풍에 넌즞 듣고는…”. 아마도 ‘넌지시’의 비표준어 ‘넌즈시’를 축약하여 쓴 말 같다. 시적 허용인 셈이다. <용비어천가>에 ‘넌즈시’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하니 조선시대에는 ‘넌즞’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지 않았을까 마음대로 상상해본다. 궁금하던 차에 연출에게 전화를 걸었다. 탈춤에서 장단을 부르는 말, 즉 불림말에 나오는 표현이라고 확인해주었다. 풀이하자면 ‘바람결에 전해 들은 아가멤논 이야기’쯤 될 것 같다. 공연의 개성과 형식을 참 잘 살린 제목이란 생각이다. 아가멤논 가문의 비극적 이야기를 전해 들은 광대들이 탈춤과 소리로 벌이는 해원(解冤)의 놀이판. <풍편에 넌즞 들은 <아가멤논>>은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탈춤으로 재해석한 공연이다.

천하제일탈공작소는 이미 2018년에 탈춤극 <오셀로와 이아고>를 선보여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오셀로와 이아고, 데스데모나만 등장시켜 탈춤의 춤사위와 과장, 소리를 중심으로 풀어냈다. 그때도 신재훈 연출이 함께했었다. 간결함이 매력이었으나 원작의 비극성과 탈춤의 해학성을 살리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났다. 셰익스피어 대신 그리스 비극을 선택했고, 간결함보다는 다양성에 방점을 두었다. 비극성과 해학성을 고려한 연출, 공연의 긴장과 이완을 이끌었던 음악그룹나무의 연주도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천하제일탈공작소는 그 사이에 많이 진화했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이강물

그리스 비극과 탈춤은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다. 그럼에도 중요한 형식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배우들이 탈, 즉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리스 비극의 가면은 일인다역을 위한 기능적 수단이었다. 반면 탈춤의 탈은 연행자 내면의 소리를 발산하기 위한 일종의 매체이자 ‘안전장치’였다. 해학과 풍자의 바탕 정서는 민중들의 삶의 고단함과 애환, 한이다. 민중예술인 탈춤으로 ‘고급예술’ 그리스 비극을 재해석했다는 점에서 발칙하고 전복적이다. “도리도리춤” “법과 원칙에 따라” “소주 맥주에 병나발이 제격” 같은 ‘아슬아슬한’ 대사들이 거침없이 쏟아져나온다. 아가멤논을 통해 현실정치를 풍자하는 말들이다. 현대판 탈춤이 선사하는 카타르시스라고 해야 할까. 이런 맛에 탈춤을 찾고, 이런 맛에 탈춤을 만드는 것이겠지.

장면 구성도 다양했다. 탈춤 과장처럼 장면들의 인과성과 통일성은 애초 고려 대상이 아닌 것 같았다. 춤사위와 사설, 판소리와 창극을 독립된 각각의 장면에 담아내고 있다. 아가멤논(김영찬 분)은 붉고 그로테스크한 가면과 의상을 걸치고 나온다. 프롤로그는 아가멤논의 춤사위로만 연출되었다. 클리타임네스트라(허창열 분)는 익살 광대 초랭이를, 아이기스토스(박인선 분)는 파계승을 떠올리게 한다. 오레스테스(장해솔 분)는 말뚝이를 닮았다. 사설을 주고받듯 서너 명의 인물이 두 장면을 이끌어간다. 다음 장면에서 이주원은 소리꾼으로 분하여 이피게네이아가 죽는 모습을 소리로 들려준다. 음악그룹나무의 연주와 추임새가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카산드라는 소매각시에서 빌어온 듯하다. 출연 배우 중 가장 덩치가 큰 이주원 배우가 카산드라를 연기했다. 손바닥보다 작은 탈과 커다란 ‘소쿠리’를 허리에 둘러 엉덩이를 과장되게 표현했다. 아가멤논의 붉은 의상과 카산드라의 노란색 의상이 조명을 받아 강렬한 대비를 이룬다. 이처럼 개성적이고 독립적인 장면들은 다양한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선사해준다. 에우리피데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에서는 유독 많은 인물들이 죽는다. 이피게네이아와 아가멤논,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 그리고 카산드라. 배우들은 자신이 쓰고 있던 탈을 바닥에 내려놓음으로써 죽음을 연출한다. 장면마다 특징이 분명해서일까. 장면 전환 시 정서적 이질감을 풀어주기 위한 연결장면이 연출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죽은 이들에 대한 해원 의식과도 같았던 놀이판. 그래서인지 공연에서는 원작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까지는 시도하지 않는다. 제목 그대로 ‘풍편에 넌즞’ 들은 만큼만 무대 위에서 보여주고 들려준다.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이강물

놀이와 이야기 장소로서의 무대도 궁금해진다. 지난 7월20일에 개관한 대학로극장 쿼드(QUAD)는 중극장 규모의 블랙박스형 공연장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극장을 세로로 가로지르는 런웨이를 설치했다. 높이도 1미터 이상은 되어 보였다. 자연스럽게 객석은 런웨이를 축으로 마주보는 구조를 취했다. 런웨이는 전시를 위한 공간이다. 뒤섞임과 소통을 위한 공간으로 보기는 어렵다. 패션쇼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외람되지만’ 일본의 가부키에도 런웨이와 비슷한 무대장치가 있다. 하나미치(花道)다. 그런데 성격은 정반대다. 객석을 가로지르는 하나미치에서 배우와 관객 사이에 ‘밀접 접촉’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정답은 정해져 있지 않다. 이번 공연은 ‘접촉’보다 ‘전시’를 선택했다. 장점은 분명하다. 인물과 무대에 대한 집중력과 스펙터클을 성취했다. 그러나 탈춤극에서 객석이 소외되는 이상야릇한 경험을 감수해야 했다. 선택은 창작자들의 몫이다. 관객으로서의 기대와 욕심도 생긴다. 그리스 비극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파네스 같은 희극작가의 작품도 천하제일탈공작소의 탈춤극으로 만나고 싶다.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이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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