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은 수잔 손탁의 여성주의 희곡 <엘리스 인 베드>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 국립극단

엔지: 엄마?

말린: 얘야, 너의 엄마는 주무시러 가셨다. 말린 이모야.

엔지: 무서워

말린: 악몽을 꾸었니? 꿈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니? 그래서 깼구나, 그렇지 예쁜이?

엔지: 무서워.

-『최상의 여성들』, 카릴 처칠 중에서

1. 해석학보다는 예술의 에로틱스(erotics)

수잔 손탁은 1990년 1월에 2주 동안 이 희곡을 썼고, 1991년 6월 “나는 일평생 『엘리스 인 베드』를 쓰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를 해왔다”(수잔 손탁, 배정희 역, 『엘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 도서출판 이후, 16-17면)고 언급했다. 33년생인 손탁이 자신의 첫 희곡으로 알려진 이 작품을 57세가 되어서 발표했으니, 『엘리스 인 베드』의 목소리야말로 가볍게 들을 수 없는 무게, 가볍게 재단할 수 없는 위엄이 있다. 이 희곡에는 일급의 예술작품이 갖고 있는 요소로 독자/관객을 못 견디게 하는 치명적인 것이 있다. 문학평론가, 문화비평가, 소설가, 사진작가, 영화감독으로 미국 예술계의 한 시대를 풍미하면서, 창조적인 작업을 해 왔던 수잔 손탁. 1964년에 쓴 예술평론 「해석에 반대한다」는 비평과 창작을 함께 해왔던 그녀의 기질, 예술철학의 안목, 예술작품과 그것의 과잉해석으로 이루어지는 예술계의 뿌리 깊은 병폐를 바라보는 예리한 감수성을 보여준다.


ⓒ 국립극단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희곡 『엘리스 인 베드』로 이어지는 나선형 공간에서, 필자는 여성주의로 통칭되는 다양한 흐름 중의 한 흐름이지만, 두드러지는 특징으로 묶을 수 있는 한 흐름- 전통적인 예술형식 혹은 정전을 거부하고 새로운 형식을 추구- 서구 여성주의 희곡의 배경과 그 존재 이유를 확인하게 된다. 희곡의 내용과 형식을 혁신하고 싶었던 손탁. 한국연극은 왜 손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아야 할까. 한국연극은 서구 여성주의 작가의 이 오래된 그러나 낯설고 우리를 안절부절 하게 하는 희곡을 어떻게 해야 제대로 향유해 볼 수 있을까. 손탁의 희곡은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멕시코 등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상연되었고, 필자는 2007년에 출판된 희곡 『엘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도서출판 이후, 배정희 옮김)으로 처음 만났고, 최근 국립극단이 주관한 연극 『엘리스 인 베드』 (명동예술극장, 윤색· 연출 이연주, 2022.8.24. -9.18)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배우 권은혜, 김광덕, 김시영, 성수연, 신사랑, 이리, 황순미 등이 출연했고, 이리를 제외한 배우 전원이 엘리스와 또 다른 배역, 이중배역 이상을 맡도록 하였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배우들이 자신이 맡은 배역을 관객에게 직접 소개하고 극장의 위치를 설명함으로서 연극의 등장인물이 배우에 의해 창조된 허구라는 것을 전면에 드러내고 관객들이 감정적으로 등장인물에 몰입되거나, 동일시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전략을 사용하였다. 이는 서구 여성주의 연극의 전통적인 관습이기도 한 이중배역 전략을 공유하는 것으로, 자아의 이중적 혹은 복합적 가능성 사이의 연계성을 엘리스의 다중배역으로 전경화 한 것이다.

통상 여성주의는 유물론, 해체주의와 연관되어 있는데, 직접적이고 정치적이라는 점에서는 해체주의와 구별된다. 한국연극에서 여성주의는 여러 편견과 오해를 뒤집어쓴 어휘이거나 이론, 작품이라 할 수 있지만, 여성주의라는 어휘는 필요에 따라 최근에 만들어진 비평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손탁의 「해석에 반대한다」에는 최근 우리가 쓰고 있는 ‘여성주의’라는 개념이나 어휘가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예술작품의 정전화를 비판하고 예술권력에 반기를 드는 해체주의의 관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손택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이론이 모방의 대상 곧 ‘내용’을 중시하며 그 내용을 밝혀내려는 시도인 ‘해석’을 시작하게 되는데, 그러한 해석 작업은 작품 자체에 대한 감상보다는 작품의 외적 요소인 전통적 가치나 도덕적 진리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그것들의 옹호를 통해 작품을 정전화한다는 것이다. 그녀는 심지어 전통적 가치에 도전하는 예술작품들까지도 비평가들이 의도적 해석을 통해 길들이고 있다고 비판한다.”(김성곤, 「해석에 반대한다/예술은 느낌…해석하지 말라」, 『동아일보』, 2009.9.6.)

여성주의 예술의 기념비적 이정표를 세운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예술가가 “창조적인 작업을 하는 데, 어떤 마음 상태가 가장 적합한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예술가의 “작열하는 마음”을 답으로 꼽았다. “예술가의 마음은 자기 속에 내재한 작품을 흠 없이 완전하게 풀어놓으려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서, 세익스피어의 마음처럼 작열해야 합니다. 그 안에 어떤 방해물이 있어서도 안 되고 태워지지 않는 이물질이 끼어서도 안 됩니다.”(버지니아 울프, 이미애 옮김, 『자기만의 방』, 민음사, 87면.) 이어서 울프는 작열하는 마음이라는 것의 실체를 부연했는데, “항의하거나 설교하려는 욕구, 자신이 받은 모욕을 공표하거나 원한을 갚으려는 욕구, 세상을 자신이 겪은 곤경과 불만의 증인으로 삼으려는 욕구, 그 모든 욕구가 불타올라 소진”되어야 한다고 했다. 필자가 보기에 울프에서 손탁으로 이어지는 생각의 계보에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예술작품이 이차적인 것(모방)이라고 생각하거나 수단이 될 수 없고, 예술작품이 그 자체로 본질적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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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익스피어의 작열하는 마음 그리고 체홉, 류보미르 시보미치와도 너무 다른 희곡. 얼핏 보면 이 희곡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고, 앙상하고, 이보다 적나라한 슬픔은 없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남성 극작가들의 정전화(composing cannon)된 극작술과 힘차게 결별한 이 희곡에는 원더플한 스타일이 있다 (예술가로서 우리 자신의 안목을 믿어야 하리). 우선 이 희곡은 아무도 눈 여겨 보지 않을, 여성의 제한된 현실에 관한 어떤 종류의 진실을 증언하고 있고, 어떤 종류의 새로운 상상력- 그러나 어느 정도 예술관습을 형성하게 된-을 경험하게 해준다는 것에 있다.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 그러나 충분히 공표되지 못한 시선이 있다.

한편 우리가 극장에 가는 것은 서구 여성주의 작품을 교육받으러 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감수성, 새로운 상상력을 경험하고 감동할 준비가 되어있기 때문에 극장에 가는 것이다. 창조적인 작업에서 필요한 “작열하는 마음”을 얘기한 버지니아 울프나 “해석학 대신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 erotics이다”라고 말한 수잔 손탁의 맥락은 결국 같은 것이다. 인류가 최초로 경험한 예술의 주술성, 마술성을 회복하려는 열망을 “작열하는 마음”, “erotics”로 바꾸어 표현한 것이다. 다른 예술관습의 작품처럼 진실한 여성주의 연극도 중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흔들고 움직이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2. 국립극단, 달리 보는 통찰력과 감수성을 양성하기 위한 과정을 위해

한국연극은 서구 여성주의 희곡을 우선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느껴야 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는 공연주관, 관객, 비평 모두의 과제가 되어야하는 것이라,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어떻게 해야 서구 여성주의 연극을 실감나게 볼 수 있을까에 집중하는 것이지, 최근 공연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것이 아닐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가 연극을 하는 것은 실수를 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고, 실수를 하면서도 얼마나 진실하고 아름다운 일이 연극 안에서 반짝이고 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실수를 허용하면서도 작품성을 잃지 않고 갈 수 있는 법, 완벽한 작품을 요구하지 않아야 하는 법, 『엘리스 인 베드』와 이 작품 이후의 또 다른 서구 여성주의 연극의 가능성도 모색해야 할 과제가 있기 때문이다. 서구 여성주의 연극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서는 이 예술관습과 배경의 이해는 물론 감각적 예리함이 필요하지만, 이전에 그 자체로서의 충분한 탐구와 경험이 한국연극의 저변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우선은 국립극단의 라인업에 『엘리스 인 베드』가 올라온 것만으로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지배문화의 상징인 국립극단에 가부장제적 문화 지배에 저항하는 작품이 걸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문화적 형평성의 약진으로 보이기에 필자는 안도감과 위로마저 느꼈다. 서구 여성주의 예술작품을 옹호하는 관객들은 유물론적인 생각 때문이라기보다는, 지배예술이 품고 있는 낡은 관습에 저항하는, 달리 보는 통찰력과 감수성을 담보한 작품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서구 여성주의 극작가들의 작품이나 이론을 번역서를 통해서 보아왔던 관객들에게는 국립극단이 주최가 된 여성주의 연극에 관한 기대는 더 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국립극단

그러므로 국립극단이 서구 여성주의 희곡을 올릴 때는 두 가지 정도의 목표가 함께 설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공연이 희곡의 자리를 빼앗기보다는(이런 유의 희곡의 낯선 형식과 내용을 오늘의 관객과 공유하려는 모색인지 안다), 희곡에 충실한 연출을 통해 희곡고전의 가치를 살려놓고 봐야 한다는 목표 설정이 필요하다. 더구나 고전적 가치를 가진 희곡의 의미 있는 초연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우선 희곡작품을 충실히 재현하는 연출방향을 가이드라인으로 두고, 다양한 해석적 연출은 차후의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장사 한 번 하고 끝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연출의 표현자유를 제한하는 의미라기보다는, 이런 방향이 오히려 연출의 부담과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공연이슈의 선정성에 휘둘리지 않고, 희곡과 공연 그 결과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충실히 구축하여 연출이 위험을 피하고 소통을 확대할 수 있는 가능성과 연계된 가이드라인을 숙지할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마련되기를 바란다. 한국연극의 레퍼토리와 해석을 확대하는데, 이런 방향의 선도적인 책임이 국립극단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두 번째, 여성주의 연극은 문화에 영향을 끼칠 새로운 통찰력을 지닌 관객들을 양성하려는 잠재적 시도라는 것을 이해하고, 준비하는 일이다. 가부장제적인 지배 문화에서 우리는 남성중심적인 가치와 시각을 알게 모르게 주입받게 된다. 생물학적 여성이라고 해도, 지배문화에 허락된 여성은 남성중심적인 가치와 시각으로 ‘남성화’된다는, 이 아이러니한 젠더 현실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여기에 국립극단의 공연 라인업이 포용해야 할, 변방 문화로서의 여성주의 시선과 전복적인 여성주의 상상력을 양성할 필요성이 대두된다고 할 수 있다.

3. 『엘리스 인 베드』의 해석과 윤색에 대하여

『엘리스 인 베드』의 공연본을 위한 윤색이 우리에게 이 작품을 더 실감나게 만들었을까. 다시 말해 불필요한 내용을 치고, 표현을 바꾸어 관객이 자신의 일 인양 느끼고,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는데 기여했을까. 우선 이 희곡은 필자에게도 녹록치 않은 경험이었다. 보통 공연을 전후로 희곡을 한 번 정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는데, 『엘리스 인 베드』는 대여섯 번은 읽어 봐야 했다. 희곡을 구성한 단초들에 대한 정보는 주어지지 않고, 오직 언어의 현재성 속에 불꽃을 지피는 손탁의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줄과 행으로 이루어진 언어 더미(어쩌면 길고 긴 시 한편)에 존재를 실어 나르는 방식을, 손탁은 여하튼 밀고 나가서 마침표를 찍었다. 극중 엘리스의 말처럼, 예술가는 뭔가를 끝까지 해내는 사람(수잔 손탁, 배정희 옮김, 『엘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 2007, 도서출판 이후, 38면.)이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 이상으로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맹렬한 영향을 끼치는,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사람이 이 희곡을 쓴 사람이며, 이 희곡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제한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자의식에 대한 얘기이다. 그래서 극중 아버지의 말처럼 “실제 일어난 어떤 일도 아무 의미가 없다”(앞의 책, 39면.), 왜냐하면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사람에게는 실제 일어난 일이 중요하다기보다는, 현실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 더 중대한 국면일 수 있다. 이 대사의 다른 측면은 보이는 물리적 현실 너머의 보이지 않는 질서를 상상하게 함으로서, 아버지의 형상이 어린 엘리스에게 두려운 권위로 강화되는 효과를 낳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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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은 자신의 첫 희곡이 어떻게 해석되기를 바랐을까? 여성주의 작품으로 해석되기를 바랐을까? 「해석에 반대한다」에 기대어보면, 손탁은 자신의 작품이 그 어떤 특징적인 내용으로도(그것이 여성주의 사상이라고 해도) 국한되어 해석되지 않기를 바랐을 것 같다. 손탁은 자신의 희곡이 직접적으로, 마술처럼 경험되기만을 바랐을 것 같다. 손탁은 예술작품이 창작되고, 해석되는 일이 창조적이고 혁명적이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의 문제는 예술의 과잉생산, 과잉해석, 무절제가 불러오는 폐해가 너무 커졌다는 것을 통렬하게 지적하면서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는 것,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하는 것”(수잔손탁,「해석에 반대한다」 전문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propof&logNo)의 소중함을 믿었다.

공연 시간이 고려되는 상업적인 공연에서 원작의 길이는 항용 축소되거나, 윤색된다. 그러나제대로 된 공연을 위해서는 참으로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희곡에서 공연으로 가는 과정은 매체가 변화되는 과정을 겪는 일인데, 희곡을 축소하거나 윤색해서 공연으로 가는 과정은 또 다른 번역과 창작 과정, 모두를 다시 거쳐야하는 일이 된다. 하나의 콘텐츠로 매체가 변화될 때도 위험성이 따르는데, 원작을 축소하거나 윤색할 때는 더 큰 도전이 따르지 않겠는가.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열에 아홉의 영화가 원작소설에 미치지 못하고, 열에 하나 정도가 성공하는 사례(가령, 미하엘 하케네 감독의 『피아니스트』)에서 우리는 내용과 형식의 최적조합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닫게 된다. 우리가 예술작품을 경험한다고 할 때 우리는 우리 두뇌의 정보처리 과정을 통해 어떤 패턴들을 인지하거나 가치를 판단하고, 시청각적인 것, 회화적인 것, 리듬과 톤의 음악적 것에 자극받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시인과 작가는 여러 동의어 중에서 맥락을 고려한 유일한 말을 고르고, 여러 말 중에서 맥락을 고려한 꼭 해야 하는 말로, 한 행을 구성한다.

국립극단 공연본은 언어의 줄다리기에서 유일한 어휘와 문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정함은 시기적절해”, “난 꽃 웃음을 준비했어”, “우리한테 달렸지. 필요에 달렸고” “난 나 자신한테 골칫덩이야. 넌 살고 싶어 했잖아. 봐 널 제압하기 위해 얼마나 큰 힘이 필요했는지. 거대한 바다였어”(국립극단 공연본, 『엘리스 인 베드』, 2022,8, 13-15면.) 이런 대사들은 의미가 축소되거나 청중에게 전달되기 어려운 번역/윤색이고, 공연의 난해함을 오히려 가중시켰다는 생각을 한다.


ⓒ 국립극단

또한 원작의 대사를 패러디한 대사들도 맥락이 고려된 꼭 필요한 해석이었는지 의문스럽다. “똑똑하다는 건 하나의 형태야, 그리고 쉽표 열고, 그래 쉼표, 난 너의 의지와 개성에 있어서 쉼표, 그 비범한 강렬함에는 쉼표 닫고, 너의 적수가 못돼. (중략) 소위 쉼표, 과대방상에 빠져서 그 세계를 현실로 여기고 진짜 현실로 나오지 못한다면. 너의 처참하고, 너의 비극적인-” “큰 따옴표 열고, 길고 길었던 (중략) 큰 따옴표 닫고”(국립극단 공연본, 9면.) 우리는 “똑똑하다는 건 하나의 형태야”로 시작되는 배우의 대사를 들을 때, 배우 목소리의 높낮이, 태도, 시선 등 무대 위에 펼쳐지는 매우 복잡한 정보들을 받아들이면서 우리의 두뇌는 풀가동이 되지만, 이 대사의 의미는 여전히 모호하기만 하다. 공연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대사의 음절수 축소가 오히려 관객의 인지과정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2007년 출판된 번역본을 참조해본다. “재능이라는 건 외형이기도 하고, 형식이기도 하면서 열정이기도 해”(수잔 손탁, 배정희 옮김, 앞의 책, 49면.) 이렇게 대사처리가 되었다면, 청중이 듣고 이해하기는 오히려 편해지지 않았을까. “똑똑하다”와 “재능”이라는 어휘의 줄다리기에서 “똑똑하다”가 더 구어적인 어휘이기 때문일까. 구어적일수록 관객은 더 실감나게 듣기 때문에 덜 명확해도 더 실감나는 구어적 어휘가 선택되는 것일까 등의 질문이 따라온다. 그러나 극장의 언어는 일상어를 가장한 것일 뿐 일상어와는 달라야 하고, 극장은 한국어를 갈고 다듬어야 하는 의무도 있는 것이다. 한편 이후 출판사 번역본에서 필자가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두 군데 정도였다. “너를 비난한 게 확실하다면 비굴하게 굴어서라도 다른 사람을 안심시키려고 할 거야”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 대로 매력 없는 외모의 여자로 살아야 하는 건 힘들어”(수잔 손탁, 배정희 옮김, 앞의 책, 68-69면.) 이 부분을 제외하고는 독자로서 이해하기 어려웠던 대사는 없었다.

희곡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최대한 찾아내거나, 패러디의 분위기를 띄웠던 다음의 대사도 귀에 거슬렸다. “나의 오랜 연인의 남편이었던 내 남자형제는 (중략) 19세기 서로 사랑하는 두 명의 여자 중 한 명은 남자와 결혼을 했고, (중략) ” 또 “우린 자매처럼 너의 고통을 존중해”, “내 꽃들은 우리의 함성에 타버릴 만큼 품위가 있다” 등의 대사는 손탁이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서 차용한 시어들을 재구성했다고 하는 원작과 멀어지면서, 시적인 언어의 결을 잃었고, 문법적으로도 적절하지 않은 대사가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오랜 연인의 남편이었던…”의 대사를 들으면서야 필자는 비로소 에밀리가 희곡이 지시했던 빅토리아조 여성의 의상이 아닌, 왜 남장 비슷한 의상을 입고 나온 것인지 알게 되었는데, 이렇게 원작 이상을 짜내서 요즘 시대에 유행하는 동성애 코드를 끼우게 되니, 해석적 연출의 통일성은 더 어려워졌다. 영문학도가 아니라면, 에밀리 디킨슨이 누구인지 대부분의 관객이 알지 못하는 사정은, 손탁 생전의 서구의 극장이나 오늘날의 한국 극장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사랑하고, 그녀가 평생 자신이 태어난 작은 마을 밖을 나서지 않고도, 그처럼 세계의 비의(秘義)를 통찰하는 시를 썼다는 것에, 희망을 품고 살아간 독자/관객들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 시인의 성적 취향의 가능성을 기정사실화해서(의상) 꺼내드는 것은 선정적인 접근이 될 수 있고, 희곡의 전체를 파악하는데도 오히려 지엽적인 것, 해석과잉의 것이 될 수 있다.

4. 『엘리스 인 베드』의 상호텍스트성과 소통의 문제

손탁은 1991년 6월의 글에서 이 희곡이 역사적 실존 인물 엘리스 제임스(1848-1892), 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1865)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나의 앨리스 제임스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한번 융합되고 난 뒤, 루이스 캐롤의 명작 중 가장 유명한 한 장인 ‘이상한 차 모임’에서 영감을 얻은 또 하나의 장면(물론 원래의 것과는 판연히 다르긴 하지만)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수잔 손탁, 배정희 옮김, 앞의 책, 14면.) 손탁은 이처럼 자신의 희곡이 취한 레퍼런스로, 여성주의 희곡의 계보에 관계된 것은 전혀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는 『엘리스 인 베드』는 영국의 여성 극작가 카릴 처칠의 『탑걸즈』(1982)와 같은 여성주의의 희곡 계보로 묶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국립극단

『엘리스 인 베드』의 5장은 주인공 엘리스가 4명의 여성인물을 초대해 차 모임을 가지는 장이다. 여기에 초대된 여성 인물들이 역사적으로 자신의 영역에서 원탑을 찍었던 실존인물들로 시인 에밀리 디킨슨(1830-1886), 『19세기의 여성』이라는 저명한 초창기 페미니즘 저서를 집필한 문인 마가렛 퓰러(1810-1850), 발레극 지젤에 나온 미르타, 오페라 파르시팔에 나오는 쿤드리라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했던 것처럼, 『탑걸즈』의 1장에도 주인공 말린이 역사적인 여성인물들과, 예술작품에 등장했던 인물들을 초대하여 만찬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희곡 사이에서 인물과 동기부여, 패턴과 스타일의 유사성은 매우 뚜렷하게 나타난다. 비교를 위해 『탑걸즈』 1장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여성인물들과 작가의 노트를 확인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사벨라 버드(1831-1904) 에딘버러에 살았으며 40살부터 70살까지 세계각지를 광범위하게 여행다녔다. 귀족부인 니조(1258년 출생) 일본 황제의 애첩이었다. 후에 여승이 되어 일본 전역을 도보 여행했다. 덜 그렛, 브뢰헬(16세기 플랑드르 지방의 대표적 화가) 그림에 등장하는 덜 그리어트이다. 그림 속에서 에이프런을 두르고 무장을 하고 나타난다. 한 떼의 여인을 이끌고 마귀들을 쳐부수려고 지옥으로 돌진해 들어간다. 교황 조안, 854에서 856년까지 교황을 지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남장한 여자였다. 인내심 많은 그리셀다, 초서가 『캔터베리 이야기』중 ‘탁발 수도사 이야기’에서 그려낸 바로 그 순종적 여인이다.( 카릴 처칠, 오경심 옮김, 『최상의 여성들』, 예니, 1995, 15면.)

『탑걸즈』의 인물들이 인류의 전 생애, 동서양 전체에서 걸러진 것인데 비해, 『엘리스 인 베드』의 인물들은 빅토리아 조의 서양의 여성들로 제한했다는 점이 다르지만, ‘걷는다’ ‘여행한다’ ‘깨어있다’ ‘춤춘다’ 라는 개척과 공간 확대의 술어 개념, 반대로 ‘걷지 못한다’ ‘머문다’ ‘초대받지 못했다’ ‘잠들어있다’라는 후퇴와 공간 축소의 술어 개념이 이 여성들의 서로 다른 성격을 설명해주면서 여성들의 삶과 현실, 여성들의 정신적 세계, 여성들의 우주를 그려내고 있다. 또한 두 작품은 남성극작가들이 해왔던 서술구조, 시간의 순서에 따른 인과적 서술구조를 파괴하고, 삽화적 구조를 취하고 있다는 것도 유사하다.

손탁은 어느 자리에서인가 자신은 자신의 독자/관객을 혼란에 빠뜨리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작가가 자신의 작품에 관해 말하는 것을 다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는데, 국립극단의 『엘리스 인 베드』 공연에서는 손탁이 언급했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레퍼런스의 유혹에 빠져 희곡에 등장하지도 않는 토끼를 끼워 넣는 실수를 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언급했던 것은 5장의 삽화에서 시공간이 마법처럼 변화되는 것에 대한 작가의 자기변호 정도로 이해하면 되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토끼나 간호사가 엘리스나 빅토리아조 등에 대해서 정보를 주는 코러스 역할도 맡게 하는 것도 이 희곡의 결과 맞지 않는 익살극처럼 느껴지게 해서 어색할 뿐이다.

감동할 준비가 된 관객들은 순수한 아이들과 같다. 진실한 예술 앞에서 그 정보를 다 알지 못해도 느낄 수 있고, 영감을 얻고, 감동할 수 있기 때문에 공연이 희곡에서 보이는 것 이상을 찾아서 덧붙이려는 시도는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엘리스 인 베드』가 관객들과의 소통에서 실패한 이유는 이 작품의 내용이 난해한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엘리스 인 베드』는 『탑걸즈』에 비하면 단순한 구조이고, 여성의 삶에 내재한 불평등의 구조를 보편적이면서도 단순하고 순수한 형태로 드러냈다. 1장과 8장은 수미상관의 순환구조를 통해 빅토리아조의 엘리스가 앓았던 병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3장과 4장은 불평등의 구조로서 남성적 힘의 우위, 가부장제 아버지의 형상에 내재한 권위를 보여주고, 5장은 빅토리아조의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제한과 억압을, 6장은 온전한 세계로서의 로마로의 정신적 여행을, 7장은 유물론적 관점을 통해 엘리스의 심리적인 질병이 계급모순에 지나지 않는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이러한 구조로 『엘리스 인 베드』는 버지니아 울프에서 카릴 처칠까지 페미니즘의 사상, 여성주의 희곡을 탄생시킨 유물론, 해체주의적 인식, 역사적 인물의 재해석과 연관된 상상력, 미학적 관습을 충실히 수용한 작품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국립극단

예술에 관한 심리학이론인 ‘정보과정이론(information-processing theory)’(Berlyne, 1971)에 따르면 예술작품과 관람자의 상호작용을 위해서는 지나치게 친숙해서도 안 되며, 지나치게 불확실해서도 안 되는 최적의 수준이 있다.(글렌 윌슨, 김문환 옮김, 『공연예술심리학』, 연극과 인간, 2000, 35면.) 공연이 이 최적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우선 관객은 무대 위의 인물 누군가에게는 자기 자신을 투사할 수 있어야 극을 관람할 수 있다. 관객이 엘리스에 대해서 엘리스가 자기 자신이고, 무대 위의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 일인 양 동일시(identification)를 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그러나 서두에서 언급했듯, 이 연극은 엘리스에 대한 관객의 몰입과 동일시를 차단하려는 전략) “긴 머리에 어린애 같은 모습을 한 마흔 정도”라고 묘사되는 엘리스는 빅토리아조 여성이 겪은 삶의 질곡, 정신적 불균형성을 지시해주는 전형적인 인물로 설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빅토리아조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했던 자질은 어린애처럼 순수하고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규범이다. 빅토리아조 여성에게 부여했던 의무와 내면의 천재성 사이에서 절망하다가 병든 여성이 엘리스 제임스이다. 손탁은 엘리스라는 이름에 중첩적이고 아이러니한 메타포를 심었는데, 우선 다른 여성보다 엘리스의 불행이 더 도드라질 수밖에 없는 그녀의 특별한 환경이다. 그녀는 남성적 힘과 권위를 상징하는 신학이나 문학을 하는 아버지와 오빠들에 둘러싸여있지만, 그들의 권위적, 사회적, 창조적인 활로에는 허락되지 않는 여성인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한편 엘리스는 빅토리아조의 특별히 가부장적인 가정환경과 스스로는 재능을 가진 엘리스 제임스임과 동시에, 엘리스라는 이름이 주는 친숙함 혹은 익명성을 통해, 그리고 이 희곡의 1장과 8장에서 보여주는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상황의 지속성을 통해서, 재능을 펼치지 못해 병들어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얘기가 될 수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국립극단 공연에서 성수연, 신사랑, 황순미 등 이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배우가 엘리스를 이중배역으로 연기하는 것은 엘리스가 빅토리아조의 엘리스 제임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의 얘기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엘리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에서 걷지 못하고 제한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의 삶, 모두를 지시하는 익명성을 특징으로 하는 여성들을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엘리스들의 비극이 보통명사로 전경화되면서, 가장 아쉬웠던 지점은 차 모임 장이다. 역사적 실존 인물과 다른 예술작품에서 튀어나온 인물들이 한 자리에 앉는 이 장은 다른 장과 확연히 구분되는 마술적 분위기가 기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 장에서 로마로의 정신적 여행이 가능할 만큼) 우선 무대 환경이 다른 장과 더 인상적으로 구분되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가령 침대를 뒤로 밀고 티 테이블을 사용해서 객석에서 이 여성 인물들을 안정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거나, 인물들의 생존시대가 드러날 수 있는 의상으로, 침대에 갇힌 여성의 역사라는 시간의 두께를 느낄 수 있게 한다거나, 음악적 요소나 무용, 아니면 깨어나지 못하는 쿤드리의 악몽 등 시청각적 효과의 극대화를 통해 엘리스의 정신적 삶의 어떤 격동이 드러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등장인물들은 원숙하고, 혼돈되고, 때로는 세속적인 사실적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이라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특성들의 추상적 측면을 강조하고 증폭시킨다는 점에서 원형적(archetypal)이다.(글렌 윌슨, 김문환 옮김, 앞의 책, 11면.) 이 희곡에서는 에밀리, 쿤드리, 미르타 같은 성격보다 간호사 같은 인물을 연기하기가 더 어렵게 느껴진다. 시작과 끝에서 공연을 열고 닫을 때, 간호사와 엘리스가 어떤 톤과 리듬으로 말해야 할까. 공연에서처럼 침대 밖을 향해 외치듯, 중립적으로 말하는 것이 옳을까, 궁금하다. 간호사의 직업적 무관심에 방점을 두다보니 엘리스는 자신의 장애조차 무관심하게 소외시키는 형태가 된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엘리스가 엘리스를 동일시할 수 없고, 소외시키는 것은 슬프다. 엘리스들이 엘리스를 가슴에 품고, 극장 문을 나서야 하지 않을까.

최은옥(극작가/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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