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종의 정치성(의 착종)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대학과 연극>

글_백승무(공연과이론을위한모임 회원)


사진제공 극단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 이자경

자기파괴의 저항

1825년 군주제 폐지와 공화정 시행을 주장하는 데카브리스트 혁명이 발생하자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1세는 무자비한 폭력진압을 명했고, 결국 사태는 수많은 사상자와 사형, 유배로 종결되었다. 그는 통치 기간 내내 억압과 감시의 반동정치로 일관했다. 숨도 쉴 수 없는 전제와 폭정의 시절이었다. 지식인들이 지녔던 진보적 역사의식과 계몽의지는 모난 돌이나 불편한 장식물처럼 취급되었다. 그들은 좌절했고, 공직을 거부하거나 낙향하는 이가 속출했다. 현실정치와 유리된 채 한량 같은 시골 지주의 삶을 사는 게 속 편했다. 지성이라는 사회적 공공재를 시골 촌구석에 유폐시켜 국가의 지적 자산에 타격을 가하는 것, 이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이었다. 자신의 재능과 유용함을 파괴함으로써 폭력적 국가권력에 복수하는 것이다.

파괴된 삶의 원한

<바냐 외삼촌>의 바냐는 자폐와 자학으로 권력에 저항한 선배 지식인들의 생활 형식을 계승한다. 대학생 때 영지관리를 위해 학문을 포기하고 낙향, 매형인 세레브랴코프 교수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25년간 농사일에 전념했다. 쇼펜하우어나 도스토옙스키를 꿈꾼 이 늙은 청년에게 지난 25년은 자기착취와 자기고갈의 고행과도 같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재능 소진, 부당한 처우, 보상 없는 희생, 망가진 삶, 화살 같은 세월 등이 울화와 분노, 무기력, 절망을 불렀을 것이다. 상황과 사정은 다르지만, 바냐는 피착취자의 원한 감정이라는 점에서 선배 지식인들과 동류이다.


사진제공 극단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 이자경

개미지옥 탈출기

<대학과 연극>은 사학 속물에 의해 착취당하는 예술가의 계급적 원한 감정을 그린다는 점에서 바냐의 파토스를 물려받는다. 해직된 노연기 강사가 이제야 “바냐 외삼촌이 세레브랴코프 교수에게 개기다 갈기는 장면”을 진짜 감정으로 연기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울분을 쏟고, 학생들의 공연에 동료 교수 김동무가 바냐가 총 쏘는 장면이 그냥 자기로 보여서 통곡을 하거나, 차분하고 조용한 성기린조차 객석에서 눈물을 훔치며 감동했다는 대사를 보자면 체호프의 희곡이 소재를 넘어 원한 감정을 자극하고 정화하는 정서적 기제로 맥락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원한 감정의 기원과 그 처리방식의 변별성에 있다. 19세기 러시아 귀족 지식인은 자신이 헛되이 소모되어도 괜찮을 정도의 경제적 지위를 가졌다. 20세기형 지식인 바냐에게는 분노할 표적이라도 주어졌다. 하지만 21세기 “초저임금 교육서비스 노동자” 성기린에게는 어떤 해방구나 분출구도 차단되어 있다. 그가 위치한 곳은 ‘개미지옥’이다. 그는 어떻게 이 지옥을 벗어나는가? <대학과 연극>은 나락으로 떨어진 연극교육의 참상과 그에 대한 폭로형 르포, 혹은 구사일생 탈출기이다.

뚜껑 열린 판도라의 상자

대학의 연극교육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그 첫 단추는 2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6년 김영삼 정부는 대학설립 기준을 완화하는 ‘대학설립 준칙주의’를 도입한다. 최소요건만 충족하면 설립인가를 허용하는 제도였고, 2014년까지 107개 대학이 신설된다. 그중 상당수는 이미 폐교되거나 이른바 ‘부실대학’으로 전락했다. 그 전방에 선 연극과의 성쇠는 현란했다. 1997년 70여 대학에 연극과가 만들어졌고, 입시생만 만 명이 넘었다. 재능있는 연출가들이 대거 대학에 포섭되었다. 운명공동체인 극단조직은 정규직 연출과 비정규적 배우의 기이한 형태로 유지될 수는 없다. 극단체제가 와해되기 시작했고, 교수-연출가는 조로했다. 연극계는 침체 기조가 완연했다. 2005년 이명박 前서울시장이 시행한 ‘대학로 문화지구’ 지정은 소극장체제까지 망가뜨렸다. 임대료는 폭등했고, 연극인들은 저소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제도의 실패가 연극(인)을 망쳤지만 사과하거나 책임지는 이 없었다.

형식으로서의 진실 놀이

<대학과 연극>은 해설자가 등장하는 서사극에 실제 인물이 극 속에 인입되는 포스트드라마적 기법을 혼용한다. 작가는 작품의 성격을 ‘모크-다큐멘터리’(Mock-documentary)라 규정하는데, 허구에 다큐 형식을 입혀 사실처럼 변형하거나(허구의 사실化), 실제 사건을 허구인 양 딴청을 피는 공연(사실의 허구化)을 말한다. 작가는 전자, 후자 모두 가능하다는 양가적 입장이다. 그러니까 이 공연은 작가 성기웅의 상상물을 마치 사실인 양 다큐化한 것일 수도, 자신의 자전적 경험을 허구적 공상이라고 너스레를 떠는 것일 수도 있다. 사실성을 보장하는 다큐의 외형을 취하지만, 관객이 무대행위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건 원하지 않는 이중전략, 즉 사실인 듯 허구인 듯 모호하게 경계를 착종시키는 구상이 <대학과 연극>의 설정이다. 이 연극을 실재라고 오해하지 말라는 작가 성기웅의 경고나 그 내용이 “지방에 있는 어떤 대학에서 연극을 가르치는 교수로 일했던 경험”이라고 설명하는 주체가 배역 성기린인 점이 그 설정을 보증한다.

착종의 정치성

문제는 그 착종 전략의 정치성이다. 허구의 사실化와 사실의 허구化, 심지어 이 둘 사이를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그 현란한 착종술은 자기 극작술의 레테르로 확정된 기법과 설정을 반복하는 것 외에 어떤 의도와 효과를 노리고 있는가? 첫째, 사실과 허구의 공존은 알레고리적 상호관계를 구축하여 서로의 해석적 지평을 살찌운다.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작전이다. 둘째, 끝내 정리되지 않는 사실과 허구의 혼란은 삶의 근원적인 이원성을 표상한다. 우리네 삶은 그렇게 버무려져 있다. 셋째, 작가 1인의 주관적 관점의 전횡을 원천봉쇄하여 해석의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다. 해석의 선택지는 다다익선이다. 넷째, 무엇보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 착종은 관객의 인식을 교란하여 지적 유희로 인도한다. 그 자체로 즐거움을 준다는 말이다. 배역들이 주동하는 재현의 층위와 작가 성기웅이 서있는 현실의 층위는 서로 경쟁하며 아이러니의 다중시점을 제공한다. 보는 자와 보여주는 자의 메타극적 병치는 무대상황을 작가 성기웅의 응시의 대상으로 액자화하도록 만든다. 관객이 보는 것은 작가 성기웅이 보는 것을 관점화한 액자 속의 장면이다. 관객은 둘의 차이가 생성하는 해석의 복수성(複數性)을 수시로 의식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 착종의 정치성이 스스로 마련한 착종의 함정에 포획되고 만다는 점이다.

정치성의 착종

착종의 정치성이 기획한 아이러니의 다중시점은 이 작품의 긴장감을 지탱하는 숨줄과도 같다. 무대행위가 표층에선 허구이나 심층에선 사실일 수 있고, 혹은 그 역일 수도 있다는 전제는 관객을 아이러니의 사슬로 휘감는다. 그 사슬의 종착은 D대학을 떠나는 성기린의 서정적 애틋함이다. 결국 작가 성기웅은 수도권 명문 예술대의 정규직 교수로 임용된다. 재단과의 갈등이나 학생과의 오해에 관한 드라마적 해소 없이 그는 혼자 이곳을 탈출한다. 어차피 다른 드라마적 대안은 불가능하다. 사실에서 과하게 벗어날 경우, 착종의 정치학이 붕괴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변기 역류를 걱정할 일도, 부당한 노동에 차출될 일도, 18시간의 초인적 강의시수에 시달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가 떠난 D대학은 어떻게 될까? 동료교수와 학생들을 밑그림으로 연극교육의 참상과 사학재단의 저속성이라는 지옥도를 완성했으나, 극 밖에 남겨진 현실의 지옥도는 어쩔 것인가? 이 지옥탈출기 모크-다큐는 지방 연극학과의 실태를 폭로하는 성과는 거뒀으나 정작 남은 이들이 감당할 오욕과 수난에 대해선 함구한다.

작가가 불러온 윤리의 함정

예술적 허구 속에 개입한 ‘실재’가 현실의 본질을 명징하게 투영하고 그 당사자들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압축적으로 도식화하는 힘을 가졌다면, 착종의 정치성은 정규직의 사다리에 올라탄 ‘나’의 안도에서, 혹은 ‘개인’의 멜랑콜리한 회고에서 종료될 게 아니라, ‘우리’와 ‘집단’의 전망에 대해서도 사유해야 한다. 물론 착종의 정치성이 극장 밖 현실과의 연대나 공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예술의 논리로 작품을 봐야지 (극장 밖) 윤리의 잣대로 공연을 품평하는 것은 ‘윤리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설정 차원에서 윤리의 문제를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온 것은 작가 자신이다. 허구의 보호막에 구멍을 뚫고 자신의 현존과 자신의 실명을 삽접하여 일정한 의도와 목적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명백히 정치적이다. “진짜 같은 가짜 이야기”라는 넉살에도 불구하고 누구든 D대학의 상황과 실태가 현실 속에 지시체(referent)를 가진 기호임을 단박에 포착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작가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기처벌을 단행한다. <바냐 외삼촌> 연습 중 한 학생은 성기린에게 사랑의 마음이 없는 무책임한 교수라고 맹비난한다. 섬뜩하고 적나라한 이 비난은 죄책감에 대한 작가의 윤리적 자기응징이다. 하지만 반향도 전개도 차단된 이 상징적 속죄행위는 공허하고 덧없다. 그래서 이어지는 <바냐 외삼촌> 공연 장면은 삶의 진실을 탐구하는 체호프적 혜안이라기보다 도래한 종막 앞에서 송구함과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는 (착하고 여린) 성기린의 반성문에 가깝다. 바냐의 총질이 세레브랴코프 교수의 망언에 대한 분노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자신의 귀접스러운 삶에 대한 자기연민이듯, 성기린의 탈출기도 비루한 사학의 추악상과 열악한 연극교육의 실태에 대한 폭로를 외관으로 삼지만, 그 심리학적 기저에는 문학 주인공과의 낭만적 동일시와 그로 인한 나르시시즘적 자기연민이 똬리를 틀고 있다. 고생한 ‘나’와 이겨낸 ‘나’, 대견한 ‘나’에 대한 자기연민.


사진제공 극단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 이자경

본 기사는 <한국연극> 2022년 11월호에 실린 비평문을 재수록한 글입니다. <오늘의서울연극>(TTIS)은 좋은 글이 널리 퍼질 수 있도록 재수록 정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독자가 연극비평을 접해서 건강한 관극문화가 꽃피길 기원합니다.

One thought on “착종의 정치성(의 착종)

  1. 그 심리학적 기저에는 문학 주인공과의 낭만적 동일시와 그로 인한 나르시시즘적 자기연민이 똬리를 틀고 있다. 고생한 ‘나’와 이겨낸 ‘나’, 대견한 ‘나’에 대한 자기연민.

    -> 이 부분에 감탄을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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