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창극단 <심청가>

글_김효(연극평론가)

 

‘드라마-이후’ 혹은 ‘탈드라마’를 뜻하는 ‘포스트드라마’의 용어가 연극의 담론계에 새로운 화두로 등장한 이후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드라마 연극’으로는 해낼 수 없는 미학적 설득의 힘으로 그 영역을 다각도로 확대해 나가면서 연극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창극은 연극과 판소리를 결합한 공연형식이다. 지금까지의 창극이 드라마 연극을 기반으로 하는 경향이 주류를 형성해 왔다면, 손진책 연출이 2018년 초연과 2019년 재연을 거쳐 최근(2023 09/26~10/01) 국립창극단의 레퍼터리극으로 국립극장 ‘달오름’ 무대에 올린 <심청가>(안숙선 작창, 이태백 음악감독, 이태섭 무대디자인)는 기존의 창극과 궤를 달리하는 새로운 모습의 창극을 선보여 그동안 창극에서 맛볼 수 없었던 가슴 벅찬 감흥과 미학적 희열을 선사했다. 이처럼 각별한 미학적 체험은 이 공연이 재현의 미학에 기반한 드라마 연극을 과감하게 뛰어넘어 새로운 관점에서 창극을 접근한 데서 비롯된다. 헌데 이 공연에서 엿보이는 창극의 접근 방식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미학적 특징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이 글에서 손진책 연출의 <심청가>가 어떤 점에서 포스트드라마 연극과 접점을 형성하는지 다루어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창극에서 포스트드라마의 미학이 어떻게 활용되고 작동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보고자 한다.

 

  1. 드라마 연극 vs 포스트드라마 연극

 

드라마는 이야기를 ‘서술’이 아닌 ‘재현’의 화법, 즉 대화체의 방식으로 전달하는 희곡(문학)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드라마 연극은 드라마를 기반으로 하는 연극을 지칭한다. 즉 ‘드라마 연극’은 배우의 연기와 미장센을 통해 드라마 텍스트에 나타난 상황을 마치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재현’하여 무대 위에 환영을 만들어내는 연극이다. 서구의 연극은 전통적으로 드라마 연극을 발달시켰으며 드라마 연극은 사실주의 연극에서 정점을 찍었다.

드라마 연극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와 목적은 무대 기호를 활용하여 드라마 텍스트의 의미를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드라마 연극은 드라마 텍스트에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하며 공연의 모든 요소를 드라마 텍스트에 종속시킨다. 즉, 드라마 연극에서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이 드라마 텍스트에서 묘사된 상황과 의미를 무대 기호로 치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재현적인 드라마 텍스트에 절대적 우위를 부여하고 모든 것을 재현적 관계로 수렴시키는 연극에 반기를 들고 그러한 연극을 극복하고자 등장한 것이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다. 그렇다면 손진책 연출의 <심청가>는 어느 지점에서 포스트드라마 연극과 만나고 있는지 찬찬히 살펴보기로 하자.

 

사진 제공: 국립극장

 

  1. 창극의 시작 : 판소리와 드라마 연극의 만남

‘창극’은 ‘판소리-창으로 하는 연극’이란 뜻의 명칭으로서, 조선 말기, 20세기 초엽 서양의 연극이 유입되고 서양식 극장이 건립되자 그곳에서 판소리 가객들이 서양의 연극처럼 배역을 분담하여 판소리를 공연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의 전통에서 ‘소리’는 ‘성악’을 가리키는 용어이며 ‘판소리’는 북을 반주 삼아 1인 독창으로 한 ‘판’의 이야기를 노래로 풀어내는 성악이다. 판소리의 연극적 특성으로 지목되는 발림과 아니리는 소리를 보다 실감나게 하려고 재현적 요소를 도입한 것일 뿐, 판소리 고유의 예술적 감흥은 판소리 특유의 창법으로 뽑아내는 창에서 발원한다. 하지만 1인 완창의 판소리는 예술적 완성도가 고도화된 미학적 결정체로서 빼어난 예술이지만 판소리 특유의 미감을 음미할 수 있는 ‘귀명창’이 아니고서는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 문턱이 높은 편이다. 반면, 창극은 모든 배역을 혼자 소화하는 판소리와 달리 배우들이 각자 맡은 역할을 소화하여 재현적 요소를 강화하기 때문에 가독성이 높아 일반인들에게도 접근이 용이하다. 따라서 판소리의 창극화는 판소리가 현대의 무대 테크놀로지를 받아들이고 보다 광범한 대중에게 가까이 가고자 할 때 매력적인 선택지 중의 하나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창극화하는 것이 판소리의 매력을 보다 효율적으로 살려낼 수 있는 길인가? 많은 경우 그 방법을 주로 드라마 연극에서 찾았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창극들은 드라마 연극의 틀 속에 어떻게 판소리의 구성 요소를 재분배하고 재배치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창극을 접근했다.

 

드라마의 관점에서 볼 때 전통적인 판소리 다섯 바탕은 구비문학이 갖는 일반적인 특성인 느슨한 극적 구조와 권선징악을 모티프로 하는 전근대적인 모럴을 바탕으로 하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텍스트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는 드라마 연극의 관점에서 창극을 접근할 때 창극의 대본 텍스트를 ‘잘 짜여진’ 드라마 문학으로 교체하는 것이야말로 창극을 동시대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현대화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 사안으로 대두된다. 국립창극단이 2012년 레퍼토리 시즌제를 도입하면서 창극의 다양화와 현대화의 기치를 높이 치켜들었을 때 텍스트의 개편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다.

 

사진 제공: 국립극장

 

국립창극단은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와 같은 전통적인 판소리의 서사를 동시대적인 감수성에 맞는 드라마 구조로 개작하거나 아니면 아예 창작극이나 서구의 고전희곡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흥보씨> <귀토> <변강쇠, 옹녀> 등, 제목부터 동시대적인 감성이 톡톡 튀는 개작과 <메디아> <코카서스의 백묵원> <오르페오전> <트로이의 여인들> <리어> <패왕별희> <베니스의 상인들>등, 고대그리스의 비극들과 셰익스피어와 브레히트,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며 세계적인 고전 명작들을 판소리의 창법으로 풀어낸 창극들이 연이어 국립극장의 무대에 올랐으며 그러한 공연들은 창극이 더이상 낡은 예술이 아니라는 생각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최근 인기 웹툰을 창극화한 <정년이>가 대중적 인기의 상한가를 찍으면서 창극을 현대화하는 길이 창극의 드라마화에 있다는 것이 마치 정식처럼 고착되는 듯했다.

하지만, 손진책 연출의 <심청가>는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창극의 드라마화에 제동을 걸고 드라마적 요소를 후퇴시키면서 그 대신 판소리 본연의 성악적 특성을 전면에 내세운 창극을 선보임으로써 창극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 창극의 새로운 지평 : 포스트드라마 창극, <심청가>

 

기존의 창극들이 판소리를 연극 속에 용해시키려 했다면, 손진책 연출의 <심청가>는 판소리가 연극이라는 ‘카’를 올라타고 벌이는 소리의 퍼레이드 같다고나 할까. 5시간 정도 걸리는 강산제 판소리 원작의 기본 틀을 유지한 채 핵심 부분을 선별하여 2시간 정도로 축약한 <심청가>의 무대는 마치 이 시대 최고의 명창들이 벌이는 절창의 향연 같았다. 창극에서 이야기의 안팎을 넘나들며 극의 흐름을 이끌어가는 해설자 역할을 하는 ‘도창(導唱)’역에 카리스마 넘치는 김금미, ‘심봉사’ 역에는 어렸을 적부터 ‘판소리 신동’으로 이름을 날린 유태평양, 어린 심청과 황후심청 역에 각각 민은경과 이소연, ‘곽씨부인’ 역의 김미진과 ‘뺑덕’ 역의 조유아 등, 주요 배역들이 국립창극단에서 최고의 가창력을 자랑하는 소리꾼들로 채워졌다. 그런 점에서 창극 <심청가>는 뮤지컬보다는 오페라에 비견할 만하다. 뮤지컬과 오페라는 모두 연극과 음악을 합성한 음악극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하지만 각각의 출연자들을 ‘뮤지컬 배우’ ‘오페라 가수’라고 부르는 서로 다른 명칭이 두 장르의 차이를 대변해준다. 뮤지컬은 연극이 이끌어 간다면 오페라는 노래에 집중해 있다. 즉 뮤지컬이 음악을 가미한 연극이라면 오페라는 노래가 이끌고 가는 연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창극이 뮤지컬과 유사점을 지닌다면 손진책 연출의 <심청가>는 오페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양 오페라의 경우, 유기적인 구조로 꽉 짜인 드라마 대본을 노래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재현적인 극작술과 미장센에 붙들려 있다. 반면 손진책 연출의 <심청가>는 재현미학의 관습을 과감하게 털어낸다.

사진 제공: 국립극장

 

이 공연에서는 심봉사 역을 맡은 유태평양을 제외하고 모든 배우들이 일인다역을 하는데 배역이 바뀔 때마다 배우들은 무대에서 의상을 갈아입는다. 그러한 연출기법은 배우와 이야기속 인물을 동일시하는 것을 방해하여 인물과 배우의 재현적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배우들의 의상도 이야기속 인물을 재현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이 공연에서는 빈부 차이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인물들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등장한다. 마을의 서민 아낙네들의 옷차림은 조선시대 사대부집 부인들을 방불케 하는 기품을 뿜어내고, 심봉사와 심청도 남루한 행색과는 거리가 먼 품위가 있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다. 이 공연에서 의상은 텍스트를 재현하는 의미 기호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 대신 의상은 텍스트의 의미체계로부터 분리된 감각적인 기표가 되어 배우의 율동을 타고 무대를 화려하게 수놓는 모습은 마치 아름다운 열대어들이 유영하는 어항 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거의 빈 무대에 무대 바닥과 동일한 자연목의 색깔로 미니멀하게 만든 몇 개의 의자와 평상, 담장이 전부인 무대세트는 그 존재감을 최소화하여 무대 공간을 수놓는 빛과 색의 세계를 더욱 돋보이기 위해 고안된 것 같았다.

 

배우의 연기도 비재현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창극에서 배우는 대사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을 동시에 해야 하기 때문에 드라마 연극에서의 연기자처럼 인물에 깊이 몰입하는 재현의 연기를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공연에서 배우의 연기는 노골적으로 제시적이다. 예컨대 이야기 속의 심봉사는 늙고 힘없는 봉사이지만 심봉사 역을 맡은 유태평양은 30대 초반의 젊고 건장한 신체를 가진 배우인데 그는 노인의 분장도 하지 않았으며 늙고 힘없는 심봉사처럼 보이는 재현의 연기를 하지 않는다. 단지 부채를 활용해서 판소리의 발림 정도의 수준에서 피상적으로 봉사의 흉내를 낼 뿐, 배우 유태평양의 행동은 자신의 현실적인 신체 조건을 유감없이 그대로 노출시키면서 마음껏 소리에 집중할 뿐이다.

그렇게 손진책이 연출한 <심청가>에서는 노래하는 배우의 현존이 무대를 꽉 채운다. 이처럼 텍스트의 절대적인 지배력이 상실되면서 무대 위의 배우가 허구의 인물로서 존재하는 대신 자신의 실존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은 포스트드라마 연극 미학의 핵심적 요소이다. 게다가 이 공연에서 이야기 텍스트를 재현적으로 반영하지 않는 의상의 특징은 텍스트/배우/무대 사이에 작동하는 재현의 연결고리를 해체하는 포스트드라마 연극 미학의 핵심을 정확하게 구현하고 있다.

 

사진 제공: 국립극장

 

‘포스트드라마’라는 용어를 창안한 한스-티스 레만(Hans-Thies Lehmann)은 포스트드라마 연극의 특징을 ‘(텍스트 중심의) 위계적 관계의 탈피’와 ‘병렬적 관계’, ‘감각의 범람’, ‘현실의 난입’ 등의 키워드로 지목하였다. 손진책 연출의 <심청가>의 경우, 판소리 ‘심청가’의 텍스트를 무대에 소환하되 텍스트를 중심으로 여타의 공연적 요소들을 ‘위계적 관계’ 속에 종속시키는 대신 텍스트와 공연적 요소들 사이에 독립성을 부여하여 ‘병렬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레만이 지목하는 포스트드라마 미학과 정확하게 오버랩되는 연출기법이다. <심청가>는 텍스트와 무대의 병렬적 관계를 형성하여 그 사이의 틈을 벌이고 그 틈새에 한국의 전통적인 이미지와 소리, 색, 에너지 등, ‘감각적 요소들의 범람’을 유도했다. 감각은 이성이 아니라 몸의 자극이기 때문에 가상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 속한다. 감각과 에너지가 충만한 ‘현실의 난입’이 도래한 <심청가>의 무대는 허구의 세계가 아닌, 그러나 허구보다 더 뜨겁고 가슴 벅찬 현실의 세계로 탈바꿈했다. 그렇게 창극 <심청가>는 창극에서 포스트드라마의 미학이 어떻게 실현되고 작동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관객은 연일 매진 사례를 이어가면서 포스트드라마 창극이 가진 가능성에 대해 뜨거운 반응으로 화답했다.

창극은 형성 초기부터 드라마 연극에 기반한 창극에 매진해 왔다. 손진책은 <심청가>를 통해 창극이 탈드라마를 지향할 때 판소리의 실상과 진정한 매력을 어떻게 살려낼 수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었다. <심청가>의 예술적 성취가 앞으로 더욱 자유롭고 예술성이 풍부한 창극들을 꽃피우는 기폭제가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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