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북새통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

글_홍혜련

 

최근 몇 년 사이, 일련의 사회적 사건을 겪으며 사람들의 입에 ‘공감 능력’이라는 말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공감(共感)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이라고 되어 있다. 사람은 혼자 살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므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각이어야 할 공감이 어쩌다가 능력(能力), 즉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이 되었을까?

일단 공감이 능력이 되었음을 받아들이고, 사람마다 그 능력치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 보자. 나아가서 거기에다 공감의 범위조차 한정적이라고 한번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누군가의 공감의 능력치를 끌어올리려면, 공감의 범위를 확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야기다. 이야기만큼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 속 인물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담게 된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읽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것을 가지고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에게는 무한의 힘이 있다.

 

사진 제공: 극단 북새통 (촬영: 최인호)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 속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나스린과 나자닌의 이야기로 공연을 만들고 있다. 그들의 연극에는 아리엘 도르프만의 <죽음과 소녀> 속 빠올리나의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오셀로> 속 데스데모나의 이야기, 카프카의 <변신> 속 그레고리 잠자의 이야기가 녹아든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이야기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처한 입장을 더 깨끗하게 이해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 간다. 극중 인물이자 실존 인물인 고(故) 나자닌 데이히미 역시 옥중에서 실제 <죽음과 소녀>를 만들었음은 이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란에 지금과 같은 성 분리 정책이 시행된 것은 1979년 이슬람 혁명부터다. 이 말인 즉, 그 전에는 모든 여성이 히잡을 착용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는 뜻이다.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은 팔레비 국왕의 독재에 맞선 성직자, 지식인, 상인 그리고 수백만 여성들의 광범위한 참여로 성공했다. 하지만 곧 여성들의 사정은 바뀌었다. 강경보수 성직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성직자들이 통치하는 이슬람공화국 정부는 모든 여성에게 히잡을 쓰도록 명령했고 1983년부터 이를 법으로 강제하고 처벌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는 것,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는 것도 금지되었다. 어제까지 분명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아침 깨어 보니, 벌레가 되어 버린 그레고리 잠자의 이야기에서 이란 여성들이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리라. 또한, 다른 남성이 제시한 얄팍한 증거와 증언만으로 명예, 그것도 여성 자신이 아닌 남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목이 졸려 살해당하는 데스데모나의 이야기는 바로 지금 이란 여성들이 처한 현실이다. 인생을 망가뜨린 성 고문 기술자에게 총을 겨누며 죄를 뉘우치라고 절규하는 자신 앞에서 이제야 ‘진실위원회’의 성공을 눈앞에 뒀는데 “정신 나간” 아내 때문에 모든 걸 망칠 순 없다고 흐느끼는 위선적인 남편을 바라보아야 했던 빠올리나의 이야기에서는 한때 이슬람 혁명의 동지였던 여성들이 느꼈을 절망감이 드러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란 여성들의 이야기가 지금 이 나라에서 무대에 오른 것은 그들의 이야기가 비단 먼 나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머리를 했다는 이유로 여성이 무차별 폭행을 당할 수 있는 나라, 어느 날 깨어 보니 그런 나라에 살게 되었음을 이 공연을 보며 새삼 깨닫게 됐다.

 

사진 제공: 극단 북새통 (촬영: 최인호)

 

우리와는 너무 먼 이야기라고 느낄 수도 있을 이란 여성들의 이야기를 지금 대한민국 무대에 올려 사람들에게 알린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공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공감하려면 일단 그 사람의 이야기를 잘 알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자닌을 위한 인터뷰>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공연 제목에도 나오는 “나자닌”이 누구인지 극중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나스린”이 누구인지 공연 자체에서 관객들에게 조금 더 알게 해 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감상에 방해받지 않기 위해 프로그램 북을 미리 보지 않고 관극을 시작한 나는 나스린이 누구인지 알지 못해 공연 초반 꽤 긴 시간 부유했다. 그러다 상상의 인물인 아바가 자신이 겪은 ‘성스러운 결혼(강간범이 피해 여성과 결혼함으로써 그 여성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하는 법 제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부터 그녀에게 감정을 이입하고 공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공연은 ‘감각’하게 해야지 가르치거나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황금율처럼 여겨지고 있으니, 그들 실존 인물들에 대해 공연에서 얼마만큼 설명해야 하는가에 대해 작가를 비롯한 창작진의 고민이 매우 깊었으리라 충분히 짐작된다. 내가 무지하고 무심한 탓이 제일 크지만, 나처럼 이 일에 대해 충분히 모름에도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에게 나스린과 나자린의 일을 나의 일처럼 느끼게 해 줄 발판을 프로그램 북이 아니라 공연 자체에서 조금만 더 마련해 주었다면, 좀 더 많은 관객들이 이란 여성들의 일을 나의 일처럼 느끼며 공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이 일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극중에서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이 이란의 여성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성들이었다면 어땠을까 혼자 상상해 본다. 이것 또한 하나의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여성의 힘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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