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주)연극열전 <네이처 오브 포겟팅>

글_주하영(공연 비평가)

 

인간의 뇌는 마음을 사용하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변한다. UCLA 정신의학과 교수인 대니얼 J. 시겔은 우리가 주의를 집중하는 방향이나 의도적으로 생각이 머물도록 이끄는 행위들,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평온한 명상을 하는 모든 일이 인간의 뇌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경험이 뇌의 활동을 변화시키고 평생에 걸쳐 뇌를 리모델링한다”라는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의 개념은 걱정과 불안으로 치닫는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뿐 아니라 노화로 인해 판단력이 흐려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까지 일종의 ‘희망’을 부여했다.1)

하지만 경험한 것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저장했다가 재생하는 현상을 일컫는 ‘기억’과 관련해 신경가소성이 힘을 발휘하지 못할 때가 있다. 알츠하이머, 노인성 치매와 같이 기억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될 때, 즉 ‘망각’이 질병으로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존재의 의미를 퇴색시킬 때, 우리는 기억이 가진 막강한 ‘힘’을 인식한다. 치매로 인해 부서지고 흩어지는 기억의 파편들, 그로 인해 겪는 망각의 고통, 끊어지고 사라지는 추억의 실타래들을 이어보고자 몸부림치는 분투, 그 모든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일은 가능할까?

 

사진 제공: (주)연극열전

 

연극열전은 조기 치매로 기억을 잃은 ‘톰’이라는 한 남자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피지컬 씨어터(physical theatre)’로 구현한 작품 <네이처 오브 포겟팅(The Nature of Forgetting)>의 두 번째 라이선스 공연을 선보였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2009년 창단한 극단 ‘씨어터 리(Theatre Re)’가 2017년 런던 국제 마임 페스티벌에서 ‘전석 매진’을 기록하고, 같은 해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최고의 화제작’으로 극찬을 받았던 작품이다. 2019년 우란문화재단에 의해 초청공연으로 국내에 소개된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7회에 걸친 짧은 공연의 전석 매진을 기록했고, 인기에 힘입어 2022년 최초로 한국 라이선스 초연을 선보였다. 당시 2주간의 한국 초연 역시 전석 매진을 기록함에 따라, 2023년 재공연은 2개월이라는 장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2023년 재연의 차이점이 있다면, 초연보다 오리지널 프로덕션 스태프의 참여도와 기여도가 줄었다는 것이다. 2022년에는 연출 및 안무가인 기욤 피지(Guillaume Pigé)를 비롯해 작곡가 알렉스 저드(Alex Judd)와 조명 디자이너 캐서린 그레이엄(Katherine Graham)이 한국 배우 및 연주자, 스태프들과 ‘협업’을 통해 원작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한 노력을 다했다. 2023년 재공연의 경우, 연출 및 안무가인 피지를 제외하고 공연의 모든 구성원이 한국인으로만 이루어졌다는 데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4명의 배우와 2명의 라이브 음악 연주자가 유기적으로 반응하고 정확하게 호흡을 맞춰, 70분간 매우 정교하게 움직이는 공연에는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임 배우이기도 한 피지가 주인공 ‘톰’의 역할을 직접 공연했던 오리지널 팀의 내한공연과 2023년 라이선스 재공연의 가장 큰 차이를 꼽으라면, 크게 배제되었던 언어와 대화의 비중이 상당히 늘었다는 점이다. 2019년 내한공연 당시,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공연의 첫 부분과 끝부분의 몇 마디 대사를 제외하고는 언어가 최소화된, ‘마임과 댄스, 제스처, 몸의 움직임’으로만 모든 것을 이해시키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2023년 라이선스 재공연의 경우, 인물들이 움직이면서 주고받는 말들이 대사처럼 작용하면서, 신체의 움직임으로 거의 모든 것을 전달하는 피지컬 씨어터의 가장 큰 특징에 ‘균열’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상상의 힘으로만 이어갈 수 있었던 맥락들이 배우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근거로 상황의 내용을 짐작하게 되면서, 치매를 앓고 있는 톰의 기억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가’ 보다는 톰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에 집중하게 된 특징이 있다. 오리지널 팀의 내한공연 당시에도 배우들이 서로의 상황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표현하기 위해 서로 나누는 대화들이 있기는 했지만, 아주 작은 소리의 속삭임과 같아서, 음악 속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편이었다.

 

사진 제공: (주)연극열전

 

영국 배우이자 연출가인 펠림 맥더멋은 피지컬 씨어터의 지속적인 관심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2) 말이 아닌 ‘몸’으로 하는 스토리텔링을 강조하는 피지컬 씨어터는 추상적이고 매우 시각적인 특징이 있다. 조기 치매를 앓고 있는 ‘톰’의 경험을 “사라지는 기억들이 얽힌 실타래”처럼 표현하는 일에는 마임과 제스처, 표정 연기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3)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를 거쳐, 교사가 되어 모교로 부임하고,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아내를 잃게 되는 과정이 반복되는 기억의 파편들 속에서 미세하게 부서지고, 무너지며, 사라지는 기억으로 구분되게 표현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 있어 마임을 전문적으로 오랫동안 훈련해오지 않은 배우들에 의해 구현되는 라이선스 공연 무대에 아쉬운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리지널 공연이 갖고 있는 역동성이나 2인조 라이브 음악과의 절묘한 조화, 빛바랜 사진과 같은 조명의 효과는 성취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경우, 키보드와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루프스테이션을 활용해 소리를 쌓는 ‘멀티 연주자’와 드럼과 윈드차임, 퍼커션을 연주하고 사운드 패드를 이용한 음향효과까지 담당하는 ‘타악기 연주자’가 배우들과 라이브로 매 순간 모든 것을 맞춰야 하는 특징이 있다. “기억이 사라지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감정적 잔상으로 관객의 마음에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하는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음악과 기억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유대”를 염두에 둔 작품이기도 하다.4) 16개월 동안 신경과학자와 의료기관, 치매환자들 및 가족과의 면담과 리서치를 통해 발전시킨 공연은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접근할 수 없게 되는 것뿐”이라는 점에서, 완전한 소멸은 아니라는 낙관적인 ‘기대’와 ‘희망’을 담고 있다.

 

기억을 관장하는 대뇌 안쪽에 위치한 ‘해마(hippocampus)’를 중심으로 무언가를 기억하려고 할 때 두뇌가 제일 먼저 구현하는 것이 ‘공간’이라는 사실은 무대에 반영된다. 정사각형 모양의 네모난 판은 최근의 기억들은 시냅스의 연결고리를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지워지지만, 오래전 추억들은 더 선명하게 자리하게 됨을 표현하는 데 활용된다. 커다란 네모난 판은 55세의 생일날, 남색 재킷과 붉은색 타이를 기억하는 것만도 벅찬 톰의 즐겁고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 장면들’을 구현하는 공간이 된다. 빛바랜 필름 영상처럼 따뜻한 느낌의 오렌지색 조명 아래, 교복을 입고 장난을 치는 아이들이 있는 학교 교실과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길가, 결혼식 피로연이 있었던 레스토랑, 아내와 함께 타고 가던 차 안 등으로 변모하는 공간은, 누구의 삶에나 있을법한 사소하고 평범한 순간들을 펼쳐 보인다. 피지는 <네이처 오브 포겟팅>이 특정한 한 개인의 기억이 아닌 모든 사람의 삶, 추억이기를 의도하는데,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과 어려움에 대한 접점을 관객들이 보다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기억들은 보통 최초의 경험이나 삶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순간이라는 점은 보편적인 차원에서 ‘처음’을 연상하게 만드는 순간들로 장면을 선택하도록 만든다.

 

사진 제공: (주)연극열전

 

또, 치매로 인해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음악’에 반응하고, 완전히 잊은 듯 보였던 기억들을 순간 되찾기도 한다는 점은, 몸을 통해 많은 것을 표현하는 공연에 ‘음악’으로 감정을 더하고, 감동의 여운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붉은색 타이를 찾다가 아내의 빨간색 드레스에 시선이 머물며, 현실을 벗어나 오래전 기억 속을 헤매는 톰의 여정은 ‘음악’과 함께 시작되며, ‘해마’로 설정된 네모난 판 위에 올라섰을 때에만 음악이 동반된 기억이 펼쳐지게 된다. 기억이 부서지고 왜곡될수록 음악 또한 불안정한 불협화음을 연주하게 되고, 현실로 돌아와 자신을 인지하게 되는 순간, 톰은 음악이 전혀 없는 침묵의 세계와 마주한다. 어두운 공허 속에 환청처럼 들리는 딸 소피의 목소리에 혼란을 느끼며 무언가를 기억하려고 애쓰는 톰의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톰을 제외한 3명의 퍼포머들은 아내 이사벨라와 친구 마이크, 톰의 어머니 혹은 다른 친구 역할을 번갈아 하며, 라이브 음악에 맞춰 기억의 장면을 구성하고, 네모난 판 위에 오브제들을 배치하고 치우는 일을 반복한다. 몇 개의 책상과 의자, 옷걸이 두 개에 걸려있는 의상들과 소품을 지속적으로 활용하고 바꿔가며, 망각의 과정에 따라 톰의 기억이 조금씩 해체되고 달라지고 사라지는 것을 표현해야 하는 공연은 빠른 속도와 완벽한 타이밍의 호흡을 필요로 한다.

 

기억이 퇴화해 제대로 기능할 수 없게 되고, 과거의 삶을 구성했던 모든 것들이 망각의 암흑 속에 갇히게 될 때,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남는 것은 ‘공허’ 뿐이다. 모든 관계가 사라지고, 과거의 시간이 의미를 잃으며, 현재의 짧은 찰나의 ‘나’만이 남겨진 곳에 홀로 앉아 있는 톰을 바라보는 관객에게는 슬픔이 깃든다. 기억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인간 삶의 취약함, 갑자기 모든 것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는 삶을 결코 부서지지 않을 것처럼 확신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피지가 <네이처 오브 포겟팅>을 통해 겨냥하는 메시지는 거기에 있다. 취약함과 부서짐에 대한 인식은 삶을 오히려 소중한 것으로 여기도록 만들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연민하고 보다 사랑하도록 만든다.

 

톰이 마지막 장면에서, 딸 소피를 더 이상 아내 이사벨라로 착각하지 않고 제대로 이름을 부르는 순간, 죽은 아내의 그림자와 사랑의 기억들은 연결고리를 모두 잃었을지 모르지만, 현재를 구성하고 있는 딸과의 관계는 잠시나마 회복되어 딸에게 미소를 남긴다. 망각된 것들 위로 새롭게 생성되는 짧은 현재의 기억들, 사라짐에도 불구하고 멈출 수 없는 인간의 삶…. 기억이 사라지고 난 뒤 남겨지는 것은 결국 찰나일 뿐일지라도 또다시 더해지고 쌓이는 새로운 기억이 아닐까? 죽음이라는 완전한 망각에 이를 때까지 더해지는 찰나의 기억, 어쩌면 그것이 ‘삶’인지도 모른다.

 


1) 앨릭스 코브. 『우울할 땐 뇌 과학』. 정지인 역. 심심 출판사. 2018. 5쪽.

2) Phelim McDermott. “Physical theatre and text.” Physical Theatres: A Critical Reader. Taylor and Francis. p.201.

3) John Kennedy. “Edinburgh Festival Fringe 2017 – The Nature of Forgetting.” The Edinburgh Reporter. 8 July 2017. Web.

4)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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