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떼아뜨르 고도 <돼지와 오토바이>

글_김충일(연극평론가)

 

노염(老炎)의 성냄을 이겨낸 도심의 마른 가로수 밑을 지나, 드물게 만난 맑고 서늘한 바람의 맛을 예비하고 있는 9월(09.05~29). 대전 연극의 지킴 터, ‘소극장 고도’ 속으로 들어간다. 그 곳엔 <한국 극작가 걸작, 공연 시리즈 ‘예술의 정수를 만나다’> #1, ‘극단 떼아트르 고도’의 <돼지와 오토바이>가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희망 없이, 언제까지라는 기약도 없이, 무대를 지켜 내고 있다. 마치 우리가 꼭 한번은 더 보고 싶으나 분명 그러지 못할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인생은 희망이란 배를 타고 바닷길을 헤쳐 나가는 노젓기 여행이라 칭하면 과언(過言)일까. 우리는 그 여행길에서 저마다 울어내야 할 바다가 만들어낸 파도를 만나게 된다. 그 파도는 때론 비극적 희망으로, 때론 희극적 희망으로 부풀어 오른다. 그 ‘희망의 바다’엔 설레임과 기다림 그리고 아쉬움의 파도가 출렁거린다. 급기야 파도를 보고 있노라면 시간은 가만히 있는데 들끓는 열이 되어 심한 갈등으로 파도만 부서지는 풍경을 만나게 된다. 이 풍경 속에는 진저리 처지도록 잊고 싶은 과거를 품은 채, 그 과거에 의해 닥쳐 올 미래에 대해 지레 겁먹고 그저 뒷걸음치다가, 망가질 대로 망가진 과거를 갖고 사는 그래서 힘겨운 삶의 파도 넘기에 소극적 일 수밖에 없는 한 사내와 한 여인이 자리 잡고 있다.

단순히 고아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사회의 냉대와 차별을 받고 살아야했던 한 사내. 결혼을 하여 끔찍한 기형아가 태어나면서 그의 삶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진다. 아이가 자라면서 겪어야 할 수모의 인생살이를 예단한 그는 아내를 설득하여 아이를 살해한 뒤 감옥에 간다. 그가 옥살이를 하는 동안 아내는 그의 친한 친구와 금지된 관계에 빠지게 되고, 어느 날 중첩되는 죄책감에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형기를 마친 그 사내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배신감이 엇갈리는 고통의 세월을 보낸 뒤, 그를 사랑하는 옛날 학교 제자가 나타나 결혼에 직면하게 되고 과거의 상처 때문에 망설이다, 마침내 삶을 긍정하여 과거의 질곡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옛 제자와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사진 제공: 극단 떼아뜨르 고도

 

<돼지와 오토바이>(이만희 작, 권영국 연출). 이 작품은 이미 탁월한 언어운영과 연극적 기호를 적절하게 풀어내는 감각을 바탕으로 의미심장한 의미와 재미를 무대 위에 풀어내는 이만희 작가의 개성과 능력으로 인해 관객으로부터 철저한 검증과 호평을 확보하고 있다. 게다가 메타드라마(‘분신극’과 ‘극중극’) 형식과 현재와 과거의 기억 속을 넘나드는(‘시공의 혼효(混淆)’) 다양한 캐릭터의 자의식을 들어내는(사유적 의미 생산) 작업을 통해 중층적으로 변이된 극으로 진화하고 있다. 하여 ‘시간의 썰물과 밀물 사이에서 생긴 주름의 골짜기에 갇힌’ 현대인의 삶과 꼭 닮아 있어 더욱 관객들에게 가깝게 다가와 연극인들은 지금도 재공연의 레일을 깔고 있다. 특히 이번 ‘테아뜨르 고도’의 <돼지와 오토바이>는 상처 입은 삶에 보내는 따스한 시선을 통해 아픔을 보듬는 한 사내와 ‘1인 9역’의 한 여자가 뿜어내는 연극적 열정이 무서운 더위를 몰아대듯 무대 앞의 관객에게 선선하고 상쾌한 가을바람을 선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권 연출은 한 사내의 “일그러지고 썩어 문드러진 삶”의 암담한 현실, 절망, 갈등과 번뇌 속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걸까? 굴려 올리고 또 올려도 구렁 속으로 자신을 몰락시킬 것인가 아니면 그 속에서도 가치 있는 삶의 의미를 찾을 것인가? 이는 얼마나 어려운 선택인가? 오토바이(자유로운 삶)를 탄 돼지(물질적인 삶)의 운명처럼 두 갈래 길의 삶,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 그 질곡에 얽혀 사는 삶.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 사내는 말한다. “혼란한 세상, 암담한 이 세상에서 살아있다는 그 자체가 소중한 것 아닙니까”라고. 그는 오토바이를 타기만 하면 즐거워하는 ‘돼지’이기를 거부한다.

도대체 돼지와 오토바이가 무슨 관계지? 무대 위의 대사 속에서 드러나듯이 돼지와 오토바이는 습관적 인식에 따라 관습적으로 이루어지는 삶, 낡은 인습에 얽매인 삶을 상징한다. “옛날에 돼지를 접붙이러 갈 때 오토바이에 쇠틀을 올리고 그 안에 돼지를 넣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이놈의 돼지가 오토바이만 탔다 하면 그 짓하러 가는 줄 알고 신나서 꽥꽥 거렸다. 결국 반복적인 일상, 틀에 박힌 삶을 의미한다. 혹 누가 아는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축병원으로 갈 수도 있고, 도살장으로 갈 수도 있고, 팔려갈 수도 있다. 그런데 돼지는 무조건 신나서 꽥꽥 거린다. 오토바이=그 짓 이라는 관습이 몸에 배어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숙의 반론은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새 출발하자는 권유이기도 하다. 이 때 작품 속 ‘돼지’이기를 거부하는 행위는 현대인의 ‘길들여져 습관화된 무사유적(無思惟的) 삶’에 대한 통렬한 풍자이자 비판으로 관객에게 다가온다.

 

사진 제공: 극단 떼아뜨르 고도

 

이 작품은 인간이 품고 있는 내재된 ‘자의식의 분열현상’을 연극적으로 표출시키기 위해 메타드라마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현재에서 과거로 다시 현재로 시공을 넘나들면서 주인공 황재규(문성필·권영국 분: 더블 캐스팅)가 박경숙(신현지 분:1인 9역)과의 결혼 문제를 놓고, 자신의 존재와 거취문제를 과거사(아내와의 이야기) 속에서 찾아내고 있는데, 그 방법을 독백(해설)과 방백처럼 관객에게 전달하거나 과거 속의 인물들을 현시점으로 끌어와서 처리하고 있다. 주인공 ‘황재규’는 몽타주 된 현재와 과거를 번갈아 혹은 동시에 살면서 삶의 플러스적 가치와 마이너스적 가치관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가를 고민한다. 극의 마지막에서 사내는 과거를 떨쳐버리고, ‘박경숙’이 표상하는 현재와 그것에 의해 선취되는 미래를 선택한다는 귀결이다

특히 이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일인 다역을 할 뿐 아니라 해설자(독백, 방백)로 등장해 서사에 균열을 만들며 자기 역할이나 극적 상황을 설명하는 희곡기법은 어떤 효과를 낼 수 있을까? 배우들은 1인 다역을 함으로써, 단지 자기 역할에 감정이입 없이 자신의 역할을 제시할 뿐이다. “제시한다는 것을 제시하라!‘고 요구하며 배우들이 연기하는 동안 ”연기하는 등장인물 뒤에서 여러분 자신이 보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브레히트가 서성거린다. 그러니까 자기 역할과 동일시하지 않고 다만 역할의 여러 가지 자세를 제시(pose)하는 배우가 되어 관객에게 극적인 사건 진행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가지게 한다. 이와 같은 변신 연기는 결과적으로 완결된 이야기를 파편화시켜 관객의 비판적 사유를 유도하고, 관객의 이입과 소외를 동시에 작동시켜 연극성을 강조한다. 그렇게 서사극과 마찬가지로 해설자가 있는 서사구조를 통해 다양한 연기의 틀을 관객과 공유함으로써 <돼지와 오토바이>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런 극적 효과를 충족시키고 있다.

 

사진 제공: 극단 떼아뜨르 고도

 

 

남 녀 두 사람만으로 진행되는 단조로운 무대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장면 전환이 많아 자칫 흐트러질 수 있는 무대가 팽팽한 긴장감을 잃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간 <돼지와 오토바이>. 이 극을 질박하고 꾸밈없는 공감의 마당으로 이끈 더블 황재균역의 문성필 배우, 이제는 나름의 ‘기준과 시선’으로 혼란스러운 무대 속 일상의 균열을 절도 있는 열정과 고른 호흡으로 무대를 채운 1인 9역의 신현지 배우, 물에 잉크가 번지듯 단정하고 사색의 연극으로 자리매김한 권영국 연출의 동행 그리고 무더운 더위를 물리쳐 가며 무대의 빈틈과 구멍을 메꾸어준 ‘극단 떼아뜨르 고도’의 연극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어지는 ‘한국 극작가 걸작 공연 시리즈 #2 『슬픈 연극』(10월), #3 『세익스피어 신상털기』(11월), #4 창작초연작품 『갈망』(12월)이 ’대박‘나기를 기대한다.

관극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쳐다 본 밤하늘엔 유난히 찰랑거리는 달빛 속에 지울 수 없는 슬픔 하나가 아파트 옥상에 걸려 울음 울고 있다. 아마도 제 4의 벽에 함께 한 이가 드문 연극에 대한 ’외로움‘ 탓 이거나, 공연 시작 전 저녁 7시 30분을 맞추기 위해 잠시 머무르며 ‘영혼의 휴식처(희곡집 읽기)’ 역할을 해준 30여년 전통의 향토서점 ‘계룡문고’가 영업을 종료한다는 안내 문자를 받은 탓 일게다.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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