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김정숙(공연문화 비평가)
“환대는 인류에게 공동으로 귀속되는 지구의 표면에 대한 공통의 권리 (…)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일시적 체류의 권리이자 교제의 권리 ”이다.(칸트)
13회 서울이주민예술제에서 이루어진 퍼포먼스 <여기, 있다 Being, Here>(2024, 10월 20일, 서울 다리 소극장) 는 이주민들이 퍼포머이자 이야기의 주체이다.
오른쪽에 가수 한 명, 연주자 한 명이 앉아, 밴드음악을 동행하고 간간이 영사막이 내려와 무대를 확장할 뿐, 무대는 이주민 퍼포머 7명의 말, 몸 그리고 몸짓, 춤 그리고 노래, 음악으로 채워지는 다원적 퍼포먼스 형식이다. 등장인물들은 실제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며, 공연오디션에 와서 자기를 소개하고 표현하는 형식으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로 비밀을 말할 때는 한국어로만 했기에, 그 비밀을 알기 위해 한국어를 배웠다는 고려인 출신 최야나 Yana, 한국에서 12월 31일에도 야근을 강요당한다. 방글라데시 출신의 이주 노동자였으나 현재는 유학생인 니샤, 한국에서 같은 이주민이라도 여성이라 겪는 차별도 경험한다.
토고 출신의 난민 2세로 현재 대학생인 블레싱 Blessing, 한국에 3살 때부터 살기에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지만, 언제나 외국인으로 취급받는다.
방글라데시 출신의 이주노동자 3명, 라쉐드 Rashed, 너언 Narayan 그리고 한국어를 아직 잘하지 못하여, 친구들의 통역 도움을 받는 복띠아르 Boktiar, 이 세 명의 방글라데시 이주노동자는 우리가 뉴스에서 자주 보던 데로 창고 같은 방과 열악한 주거환경에 거처하며, 휴일이 없으나 연기하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으로 한국에서 버틴다.
마지막으로 한국인 남편 찬욱과 밴드 ‘파드마’에서 기타 치고 노래하는 일본인 미호도 이주민으로서 직면하는 불편함,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미래에 대한 존재적 불안과 희망을 <지구인의 노래>로 달랜다.
<여기, 있다 Being, Here>에는 한국 사회 이주민들의 희노애락과 적응기가 희망 가득찬 에너지로 나타나는데, 그 핵심에는 이주민들의 ‘예술을 할 권리’라는 주제가 있다. 퍼포머들은 모두 다양한 계기로 한국에 오게 되었고, 한국에서 다양한 어려움과 차별을 격지만 그 무엇보다 예술을 하고자 도전하는데, 일반 한국인과 다른 어려움이 많다. 가령 너언의 경우, 공연연습 중에 직장의 사장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 사장: 휴일이고 뭐고, 회사에서 오늘 근무해라 하면 근무해야지, 주말마다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녀. 회사가 바뻐 죽겠는데.
너언: 주말에는 내 마음대로 할 거예요!
사장: 뭐라고? 너 돈 벌러 온 거 아냐? 한국에 놀러왔냐? 다른 사람들 다 뼈 빠지게 참고 일하는데, 니가 뭐라고 (예술 한답시고) 주말에 나돌아다녀! 잔말 말고 어서 와서 일해! 이게 콧바람이 잔뜩 들어서는! 지금 안 오면 재계약이고 나발이고 국물도 없을 줄 알어!”
일요일도 일하기를 강요당하고 해고협박을 받는 이주노동자의 현실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퍼포머들은 자신들이 한국에서 예술행위를 하는 중에 덮쳐 오는 절망과 좌절,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토로하고, 격력하며 위기를 넘긴다: 가령, 니샤는 “그런 권리는 한국 사람한테만 있는 거에요. 우리 같은 이주민에게는 그런 권리 없어요!” 그러나 블레싱은 “저는… 예술을 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누구든 어디에 있든 예술을 원하면, 언제든지 마음껏 할 권리가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자 라쉐드는 우리에게도 그런 권리가 있다는 거, 우리도 있다는 거 사람들에게 보여줘야죠!”하고 힘을 북돋는다.
필자는 예술이라는 단어와 권리라는 단어가 조합될 수 있다는 인식과 경험을 이 공연을 통해, 그리고 2024년 <서울이주민예술제>를 통해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인생에 참으로 낯선 주제를 만난 것이다. 비이주민이라서요 하고 변명이 될까? 그러고 보니 이 축제의 주제이자 슬로건도 “예술의 자격 100%”이다. 개막식 때, 사회자 라쉐드와 윤안나가 좌중 참여자들에게 이 슬로건을 따라 큰소리로 합창하게 했을 때, 사실 필자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서울이주민예술제는 “국경, 종교, 인종을 넘어 예술로의 소통과 교류를 통해 새로운 창작 에너지를 만들어 가는 문화예술축제”라고 스스로를 표명하며, 올해 13회째에는 이주민의 예술활동에 대한 권리를 주제화한 것이다.
축제 측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이주민이 예술활동을 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는 노동환경과 네트워크 부족 등 여러 장벽이 있다. 예술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연장계약을 하지 않아 본국으로 가야 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전문적인 경우에도 비자문제 등의 문제가 있다. 한국국적 혹은 영주권, 결혼비자가 아니면 예술인으로 등록하기 조차 어렵다. 따라서 예술인 지원정책이나 공모사업에는 신청조차 하지 못한다. 한국에서 활동하여도 국내작품으로 인정받지도 못한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축제 측은 “누가 이주민의 예술인 자격을 정하고, 그 자격은 누가 부여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제시한다. 참으로 복잡하고 큰 질문이며, 정답은 아닐지라도 지혜로운 해답은 찾는 일은 중요하며, 천천히 서둘러야 할 일이다.
코로나 19 이후, 전지국적으로 기후위기의 시대, 이와 함께 가속화하는 제 4차 기술혁명의 시대에 직면해 있다. 이와 더불어 한국사회는 출생률 저하, 인구고령화 그리고 지역소멸, 가족소멸 등의 급변하는 상황에 당면하여, 안정된 삶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불안도가 높아 가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사회에도 날로 이민자, 이주 노동자, 외국인이 날로 늘어 날 것이고, 이에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연동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며, 그렇게 해야만 우리사회가 지속가능함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 우리가 배워야 할 새로운 문화코드는 필자의 의견으로는 바로 ‘환대’이다. 낯선 사람과 변화하는 낯선 상황 속에서 그리고 낯선 것들의 불화 속에서 축제와 예술은 상호 환대하고 연결하는 장소로 작동해야 할 것이다.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와 김현정의 “사람, 장소 그리고 환대”에서 환대 hospitalité는 그 어원상 주인과 손님이 동시에 존재하는 장소 hôte를 내포한다. 환대는 바로 어떤 장소를 주권적으로 사용할 권리이자 침해받지 않을 권리로, 결국 사회적 성원권에 대한 권리를 의미한다. 김현정은 특히 한 사회를 유지하며 살아 있게 하는 요소는 사람과 장소를 연결 짓는 환대의 행위, 축제와 같은 의례/퍼포먼스임을 주장한다. 즉 인간은 환대의 사회적이며 의례적 행위를 통해 사회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자신과 타자를 이해하고, 자신을 표현하며, 개인과 공동체는 그 정체성을 균형감 있게 구성할 수 있다.
인간이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만,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그 고유한 특성에 의해 이미 인간이지만,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 가야하고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김현정은 주장한다. 이런 측면에서 이주민과 이방인에 대한 환대는 자격의 문제며 권리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낯선 이방인이 타지에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되어가는 과정에는 자리가 필요하다. 자리를 내어 주며 그 성원권을 온전히 인정하고 선대 해주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축제와 공연예술의 퍼포먼스는 환대적 사회를 만드는 매개가 될 것이다.
<서울 이주민 예술제>의 예술의 자격 100프로라는 슬로건의 의미는 이주민에게 온전한 사회성원권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자리이다. 예술을 원하는 우리 이주민에게 축제와 예술을 통해 ‘자격’을 주고 자리를 온전히 내주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이주민들은 그 존재를, 그 존재의 있음을 인정받고, ‘여기- 있다’에 대한 인정을 투쟁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이 데리다가 말하는 도덕에 기초한 환대의 타자윤리학이라 할 수 있다. 조금만 넓게 보면, 이방인을 선대하라는 말이 성경에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고 <여기, 있다 Being, Here>가 퍼포먼스의 사회적 수행성, 즉 환대의 수행성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이 공연은 공연자들의 고뇌, 힘듦 그리고 신체적 고통까지도 발화한다. “다 때려치고 싶기도 하고, 일주일 밤낮으로 일해서 너무 힘들어, 아무것도 안 하고 싶지만 연기 너무 하고 싶어서 여기에 온 거에요.”라고 말하는 고려인 야나처럼, 모든 참가자에게 그들의 고통과 힘듦을 견디게 하는 것은 바로 공연이며, 이 모임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친밀한 관계성이다.
<여기, 있다 Being, Here>는 다문화와 이주민이 날로 늘어나는 한국사회에 다가올 여러 숙제들을 제시하고, 또 스스로 풀어가는 모습도 보여준다. 바로 그들의 어려움을 우정적이고 개인적 제스처로 다가가 서로 도우며 해결하는 것들이다. 환대의 장소에는 언어가 중요하지 않은가! 언어적 어려움을 가진 이주민을 일방향적 번역이 아니라, 먼저 당사자 스스로 모국어로 먼저 말하게 하고, 친구가 슬쩍 끼어들어 자기가 하고픈 ‘아픈’ 말을 슬쩍 섞어가며 통역하는 과정 그리고 이 오역의 과정을 수정하는 장면들은 매우 위트 있고 높은 정신성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다문화 사회에서 나타나는 언어의 충돌과 관계성에 대한 컨셉트가 연극적으로 재배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언어는 지금 여기 있는 몸을, 그들의 존재의 역학을 나타낸다. 그들의 ‘여기 있는 신체’가 세계 내 존재자로서 그 고유함을 포기하지 않고, 다양한 목소리로 존재하였다.
그렇다고 <여기, 있다 Being, Here>가 보편성이나 하모니를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사회의 여러 면모를 다시 보게 하고 안 보이는 것을 가시화한다. 가령, 타지에 온 청춘들의 고민을 보며, 예술을 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으나, 상황상 하지 못하는 사람도 공감할 수 있었다. 필자는 연극 그리고 예술을 한다는 행위에 주저하는 모든 한국 청춘들의 고민이 이 공연을 계기로 새롭게 해석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다시 바라보아야 함을 인식하였다.
그럼에도 필자는 <여기, 있다 Being, Here>에서 결국 이주민들이 예술의 자격을 결국 어떻게 풀어나가는가에 주목하였는데,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되어 한마디 하고자 한다.
마지막 장면에 예술의 신(god)이 나타나서 그들에게 영감을 주고, 예술가 증표를 수여하는 장면은 참으로 역설적인 해결방식이었다. 위트나 코믹이기도 하겠지만, 이 장면은 필자에게 오히려 애잔하게 밀려오는 돌을 던졌다. 예술을 매개로 사회적 성원권으로서 자격을 받고자 하는 소망이, 13회가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는 이 소망이 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즉, 이 땅에서 자리 잡기를 원하는 마음이 드러난 서사적 종결이었다. 그러나 축제의 슬로건인 ‘예술을 할 권리’에 대한 문제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이지, 초자연적 힘을 빌려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우스엑스 마키나 장치를 사용하여 해결할 문제는 아니다. 허약하고 쉬운 극적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13회 서울이주민예술제에서 이루어진 모든 프로그램과 퍼포먼스 <여기, 있다 Being, Here>를 통해, 그들의 예술할 권리에 대한 주장과 예술제를 통해 환대의 자리를 만든 아시아미디어컬쳐팩토리(AMC Factory)의 정소희 감독, 기획자님, 그리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주민 예술가들, 한국 활동가들 및 예술가들, 그리고 <여기, 있다>의 길서영 연출가님 및 이하 스텝에게도 감동하였음을 고백하고 싶다.
벌써 14회 서울이주민 예술제가 기다려진다. 이때는 좀 미리 와서 한반도에 터 잡고 사는 사람들, 어쩌면 같은 땅에 묻힐 사람들과도 연동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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