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김충일(연극평론가)
한 시대를 풍미한 유행가 ‘대전 블루스’의 탄생 불꽃을 점화 시킨 장소(大田驛)는 하나의 시간이 머물고 있는 곳이 아니다. 장소는 무수한 시간의 주름을 품고 있다. 기억 너머의 형언 할 수 없는 시간은 말없음 표의 느낌표가 되어 캄캄한 침묵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적(汽笛)소리를 내며 달리던 증기기관차로 부터 여려터진 금속성 잔음(殘音)을 지닌 KTX로의 변화는 개발의 속도감으로 다가오면서, 시간의 입을 다물게 한다. 오고가는 이는 많아도 머무는 이 없는 대전역 주변을 서성거리며 시간의 뒤엉킴(시간의 흔적)을 경험한다. 역(驛)은 그렇게 삶의 굴곡을 만들며 ‘이별의 말도 없이’ 기억과 추억을 뒤섞는 무심한 장소가 되어 동시대에 머물며, 앞으로도 그렇게 있을게다.
올해 처음으로 ‘국내 통합 공연 예술작품의 유통을 통해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해외홍보의 발판을 마련하는 장’인 대한민국 공연예술 축제 ‘2024 대한민국은 공연 중’이 열린 공연으로 관객에게 다가왔다. 그 중 2023년부터 예술경연지원센터에서 선보인 지역의 우수한 창작 작품을 초청하는 ‘RE: BOUND(리: 바운드)프로젝트’에 대전 극단 홍시의 <이별의 말도 없이>(10월 26~27일)가 ‘또 한 번 빛나는-지역 대표 연극’으로 선정되어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 자유 소극장에서 서울 관객과 만났다.
1층 A블럭 7열 9번 석에서 내려다 본 무대 전면에는 기차 철길이 영상 속에 말도 없이, 움직임도 없이 떠있고, 무대 전면엔 눈물을 훔쳐 주기 좋은 만큼의 분별도 어려운 소제 상회와 그 앞엔 대야에 꽃과 푸성귀가 가꿔져 있다. 하수엔 살구나무와 그늘 밑으로 낡은 의자가 놓여 있다. 그 사이엔 산동네 위쪽으로 가는 가파른 계단이 있다. 무대는 마치 바람은 불어오는데 도 미동도 없이 촘촘하게 서걱이는 갈대처럼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객석의 100여명이 넘는 관객들은 부대끼기 좋은, 흐느끼는 사람 곁에서 가만히 외면하기 좋은 간격으로 앉아 무심히 오픈닝을 기대하고 있다.
연극 <이별의 말도 없이>(김인경 작, 신정임 연출)속 이야기의 품으로 들어가 보자, 역전할매와 점빵할매는 대전역 주변에서 청춘과 여생을 함께 보낸다. 파란만장한 세월의 풍상을 이겨내고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역전을 오가며 신산(辛酸)한 삶을 이어 나가고 있다. 가장 연장자인 역전할매는 강한 생활력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치매의 기미가 보여,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다. 역전할매의 소유였다가 지금은 누가 주인인 줄도 모른 채 빈집으로 허물어져 가는 살구나무집에 박달삼이 돌아온다. 그는 황목수에게 집수리를 맡기지만 점빵할매는 그의 출현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그 사이 케이블 TV 작가 겸 VJ 김피디를 통해 그들의 삶이 취재된다. 황목수가 박달삼의 부탁으로 점빰할매를 일주일간 딸에게 여행을 보낸 사이 역전할매와 박달삼은 추억의 기억 속에서 재회하며 못다 한 삶의 아름다움을 나누는데…도대체 살구나무가 품은 비밀은 무엇일까?
이 작품은 1959년 김부해 작곡, 최치수 작사의 대전역을 배경으로 이별을 그린 <대전블루스>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대전역 뒤편의 소제동(철도관사 주변) 산동네를 배경으로 20C초 대전역 주변의 옛 모습부터 시작하여, 그 곳에서 일제, 해방, 6.25, 근대화를 이겨낸 미시적 삶의 풍경을 그려내고, 그 내력을 검증하는 작품이며 속내를 들춰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상은 점점 더 빠른 속도가 지배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 속도에 맞춰서 살수는 없다. 모든 변화를 받아들이고 사방에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모여 살았으나 이제는 쇠락한 동네. 그 안에서 만남과 이별을 지속하며 자신만의 속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잔잔하게 그린다, 빠른 변화 속도와 기억과 추억을 담지(擔持)한 장소 그리고 이별과 만남의 길을 찾아서 상상력이란 연극적 지도와 나침판을 들이대어 무대를 형상화 하고 있다.
우선 신 연출가의 말을 들어보자 “<대전 부르스>의 노랫말처럼 이별의 실제 주인공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역전의 주변 현실 속에서 성공과 출세를 위해 뛰는 사람들의 활력의 도심과 늙은 사람의 등허리 마냥 쇠락해가는 도심 변두리 산비탈의 소외된 사람들이 삶이 대비된다. 주변으로부터 잊혀 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만남과 이별을 통해서, 우수의 그늘이 얼룩처럼 눈언저리에 머물고 있더라도 기다림이란 고통을 통해서 만남과 이별, 도심의 고층빌딩과 산비탈길 살구나무꽃에 기다림의 무지개다리를 만들고 싶다.” 해서 신 연출은 예술창작물로서의 본래의 의미를 살리고, 세월의 강 물결을 타고 영원의 바다로 흘러가는 일엽편주(一葉片舟)로서 이렇게 저렇게 부대끼면서도 중심을 놓지 않는 크로스 오버의 무대를 살아내기 위해 음악극 형식의 연극적 도구(전통 트로트)를 활용해 온고지신의 감흥 메아리로 울려 퍼지게 만든다.
해서 이 극은 음악극으로 변신한다. 어느 하늘 모롱이에서 무정하게 떠나간, 대전 발 0시 50분 열차의 <기적소리>와 <대전 블루스>는 극 전반에 중심 음으로 자리매김한다. 이어지는 삶의 굴곡이 뿜어내는 높낮이와 질량에 따라, 배우들의 음색과 노래 향은 극을 긴장과 이완의 무대로 뒤섞이게 만든다. 점빵할매(황점순 역-차정희 분)의 ‘누가 울어’, 박달삼(김홍섭 분)과 황목수(이종목 분)의 리듬감 있는 목소리와 경쾌한 발놀림이 압권이었던 뚜엣 ‘맨발의 청춘’, 역전할매(윤옥심 역-김선희 분)와 박달삼의 ‘청포도 사랑’, 황목수의 ‘대전블루스’, 끝부분에 이어진 박달삼의 ‘고향이 찾아와도’는 나이의 구분을 뛰어넘는 각기 다른 층위의 삶이 우려낸 맛깔스러운 해석의 장면을 ‘소리’로 무대를 감싸 안으면서 ‘새로운 대전 블루스’라는 엔들리스 로드(Endless Road)를 만들어 내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대전 연극을 지켜온 중·장년 배우들과 대전 연극의 현재와 미래인 젊은 배우들의 앙상블이 뿜어낸 재미와 위로, 감동을 선사한 레트로 연극으로 자리매김 하면서 지역성을 넘어서는 확장성 있는 작품으로 새롭게 탄생 되었다. 이 자리엔 ‘떠남과 돌아옴의 고뇌가 육화된 몸 연기’로 무대의 기둥을 잡으며 무대 밑의 실루엣에 불꽃을 지핀 김홍섭 배우, ‘적확한 무대동선을 지배하면서도 극의 긴장과 이완을 불편한 발걸음으로 승화시킨 이종목 배우, ‘신산한 삶의 고단함을 대야에 발을 담그고 바람에 떠는 문풍지’ 같은 대사를 단정하고 절도 있게 연기한 김선희 배우, ‘살구나무 속살 같은 삶을 바라며, 탱탱 부은 돼지 족발이 되어버린 아픔을 속도감 있는 대사와 상대배우와의 적절한 무대 각도’를 충실하게 유지한 차정희 배우, ‘소제동 안·밖의 세계를 빠른 대사와 탄력 있는 목소리’로 극에 생기를 불어넣은 송혜지 배우를 초대하여, 쫑파티에서 수고의 박수를 건네고 싶다.
관극을 마치고 필요한 연극적 작업은 무대에 올린 이 작품의 기획 연출 콘텐츠와 관련한 되새김이다. 재미는 머리로 느끼는 현상과 실제이고, 흥미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순간이다. 이 재미와 흥미를 위하여 기획자와 연출가들은 무대 장치 음향 의상 율동 조명 배치 등을 버무린다. 하지만 관객들의 영혼을 살찌우게 할 잔상(殘像)을 남기거나, 오래 가게 할 컨텐츠는 놓치지 말아야한다. 그것은 바로 의미(意味)를 부가할 요소인데, 바로 창작의 모멘텀이 된 요소들에 대한 스토리텔링이다. 그런데 이 작품 <이별에 말도 없이는>, 이를 충분히 내장하고 있는 예술적 콘텐츠임에 틀림이 없다. 하여 내년에도 이어질 ‘대전 0시 축제’의 아니 ‘극단 홍시의 브랜드 예술 작품’으로 거듭나,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재생산되기를 기대한다.
지금도 ‘대전 블루스’의 불꽃은 타고 있다. 장소(대전역)의 기억과 상상력은 시간의 착종(錯綜)을 실현한다. 장소는 덧없이 사라지지만 동시에 잔존한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곳은 시간의 그림자이다. 장소의 상상력은 기억 너머, 무대 위 <이별의 말도 없도 없이>로 풀어낸 배우들의 시간의 목소리로 남는다. 그렇게 장소의 시간 자체를 변화시킨다. 이제 증기기관차를 타고 떠났던 소제동 산비탈 살구나무집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별을 넘어서서 KTX를 타고 돌아와 기억의 흔적을 감싸 안고 따뜻한 칼국수가 끊고 있는 소제상회를 분별력 있게 대면하게 된다. 떠남은 돌아옴을 약속하는 그리움의 불쏘시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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