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양세라
- 겹겹의 흰 프레임 구조물로 춤추듯 연기하는 배우들의 무대
극장에 들어서면, 푸르스름한 빛이 낮게 드리운 낮은 조도 속에서 4개의 정육면체의 겹으로 세워진 하얀 프레임의 구조물과 작은 하얀 프레임의 오브제들로 채워진 무대와 마주하게 된다. 이 구조물은 공연장의 무대이자 극 안에서 또 다른 무대처럼 거리를 두고 보도록 유도한 장치처럼 보이기도 했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이 구조물은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시공의 에피소드를 전개하기에 적합한 무대이기도 했다. 각 장면의 에피소드가 바뀔 때, 배우들이 마치 무용을 하듯이 직접 구조물을 옮겨 다음 장면을 만드는 전개와 공연의 수행 방식은 느린 듯 가벼웠다. 에피소드가 다섯 개이며, 각 에피소드는 독립적인 서사와 극적 상황이 존재한다. 각 에피소드의 분절이 여백을 주며 관객에게 여유를 준다. 여덟 명의 배우들이 음악과 조명에 맞추어 다음 장면을 위해 프레임을 움직이며 이동하는 모습은 마치 진공상태처럼 무거운 공기가 제거된 듯한 연출이어서 인상적이었다. 각 에피소드가 내포한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갈등을 격정적이거나 공포스럽게 표현하는 상투적인 정서가 없었다. 각 장면마다 다른 역할을 연기하고 서술자가 되어 연기한 배우들의 차분한 움직임이 유려했던 공연이었다.
극단 이와삼의 공연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는 1, 이타주의를 표현하는 인공지능 로봇 지니 이야기 2, 마인드 업로딩으로 재현된 엄마로봇과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는 수나 이야기 3, 인간처럼 연대의 기억을 공유한 침팬지 이야기와 대비되는 핵연료 기술을 연구하는 연구원 이야기 4, 동시대 극작가와 배우, OTT 드라마작가의 이야기 5, 가까운 미래에 반려 앵무새 ‘BA’와 둘만 남겨지게 된 이나 이야기로 시공(時空)을 달리하는 각각의 독립적인 다섯의 드라마로 구성되었다. 이 드라마들의 전개 순서는 각 장마다 개연성 있는 서사로 연결되기보다는 내재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연속되는 것으로 보아 이를 연결 포인트로 하는 것 같다. 필자는 사람은 좋지만, 인간이 싫다는 이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공연의 제목이 공연을 통해 이제는 인간에 대한 인식이 구조와 상호관계 안에서 유연하게 재인식될 필요가 있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는 로봇 4원칙(1985년 인류 안전 내용보완)을 인용하며, 사람보다 인간적인 로봇의 존재와 그 이후 우리의 삶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 원칙은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의 공상 과학 소설 「런어라운드(Runaround)」(1942)에서 처음 언급된 것이다. 그런데 공연을 본 뒤에 필자는 배우의 이 첫 대사를 마치 새로운 인권을 규정하는 다른 말처럼 되새기게 되었다.
유일한 무대장치인 프레임 무대의 이동과 연결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다른 공간을 만들어내지만 결국은 하나로 이어진 듯한 인상을 준다. 배우들은 프레임을 밀거나 열거나 연결하고 넘나들며 다른 시공간이나 다른 가치관을 연기한다. 이런 유연한 움직임은 이 공연이 반영한 내용과 주제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갑갑하지 않은 관객 사이의 거리를 둔 객석 배치와 최소한의 무대장치를 유연하게 활용하며 연행적인 무대를 연출하는 이 공연은 관객의 유연한 사고를 위해 계산하고 준비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관객에게 무대의 메시지를 강요하는 듯했던 강렬한 서사와 사건들의 폭주가 없는 배려의 분위기에서 연극을 따라가 보았다.
- 인공지능적 알고리즘 연상으로 연극을 보다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는 다섯 개의 각 에피소드에 주석처럼 카메라, 애니메이션, 유튜브 영상, 배우의 노래 등 각 장면에 배우의 프롤로그로 관객석을 향해 서술적으로 재현한다. 공연은 인공지능이 카메라로 표현된 장면1로 시작한다. 이 장에서 카메라인 지니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 시각적 인식은 무대 뒤 스크린에 투사된다. 지니의 시점이 무대 뒤에 재현되면, 관객은 무대 위 배우들의 뒷모습과 클로즈업된 정면 얼굴과 표정을 동시에 바라보게 된다. 극 상황에서는 지니를 관찰하는 관리자이자 감시자인 컨덕터가 존재한다. 마치 지니라는 인공지능을 만들어내는 사회를 상징하는 듯 컨덕터는 판옵티콘(panopticon) 위에 있는 듯 지위를 지닌 것으로 보였다. 이들은 이후 장면3에 등장하는 1구역과 연구원들, 그리고 컨덕터들로 연속 등장하여 관리와 통제에 유효한 구조인 판옵티콘을 상징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고루한 장치처럼 보인다.
오히려 장면1의 카메라인 지니의 시선이 즉각적으로 판옵티콘처럼 감시와 통제의 시스템처럼 인식되었다. 사실 이미 우리는 많은 상황에서 인공지능의 관찰과 기록의 대상이 되어 많은 정보를 인공지능에게 축적시키며 부지불식간에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지니의 시선으로 본 배우들의 표정과 얼굴을 무대 뒤 화면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연출된 무대는, 일상이 데이터가 되어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에 갇힌 우리를 카메라의 매커니즘으로 우화적으로 보여준다. 극장 안 객석에서 관객은 그러한 인공지능 실체의 무대화와 마주하게 되는 경험을 하는 것 같았다. 때문에 연극의 첫 장면, “지니는 카메라다”로 시작하는 이 연극은 인공지능을 통해 빠르게 변화하는 현실을 불안하게 인지하는 사람들의 정서와 인식을 서막이자 이 공연의 명제처럼 느껴졌다.
자의식을 습득하고 관리받는 상황에 답답함을 느끼는 지니와 에어인 사라가 나누는 대화는 현실에 대한 가치관 즉, 부류가 다른 두 사람의 대화처럼 보인다. 왜 사느냐고 묻자 행복하려고 산다는 이들의 대화는 마치 또 다른 인간의 종이 존재하는 장면처럼 보였다. 특히 배우들이 비슷한 옷을 입고 등장인물의 캐릭터에 충실한 재현적 연기보다는 역할극을 하듯 연행적인 연기를 보여주기에 이들의 대화는 우화나 동화 같은 인상을 준다. 이 공연의 구조와 주제 때문인지 인공지능 로봇에 대한 알고리즘적 사고가 작동되기 시작했다.
이 연극에서 다루는 인공지능 로봇 지니와 사라, 엄마 메텔을 대신 한, 에어의 존재는 현대사회에 대한 익숙한 문학적 알레고리를 내포한 듯하다. 카렐 차펙의 희곡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Rossum’s Unlversal Robots)」(1921)에서 이타주의를 소유한 로봇 헬레나는 지니와 유사하다. 물론 이 희곡은 인간을 위해 일할 목적으로 과학자들에 의해 개발되어 로슘 유니버셜 로봇이라는 회사에서 대량 생산되고 산업현장과 사무실, 가정용, 군사용으로 로봇이 보급되는 현실을 다루었다. 로봇이라는 용어가 “노예”를 뜻하며, 비유적으로 “고된 일”을 뜻하는 체코어 ‘로보타’라는 것은 이 희곡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다. 그것은 이 희곡이 산업화와 자동화로 인한 광범위한 실업에 대한 우려를 문학적 알레고리로 재현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 사실을 떠 올리게 된 것은 챠펙의 희곡에 재현된 로봇들의 선언에 인간에게 적대적으로 변한 로봇들의 반란으로, 극에서는 인간의 테러와 방어 장면을 통해, 산업화 시대 이후 노동현실과 삶에 대한 인간들의 두려움이 이 이 공연의 2장에서 연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 장면2는 ‘은하철도 999의 1편, 출발의 발라드’라는 타이틀과 자막 없는 일본어 애니메이션 영상으로 시작한다. 2장은 ‘엄마는 메텔’이라는 제목의 장면이다. 애니메이션 <은하철도999>는 주인공소년 호시노 데쓰로(한국판 이름 철이)가 기계인간의 죽지않는 몸을 얻기 위해 떠나는 여정의 마지막에 슬픔과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며, 다시 고향 지구로 떠나는 이야기다. 2장은 이렇게 애니메이션을 주석(註釋)으로 삼아 수나의 상황으로 유도한다. 지독한 알고리즘으로 연결된 수나와 에어인 엄마의 대화는 매우 진지하다. 노동과 삶의 목표, 인간에 대한 에어적인 개념 대립까지 수나가 에어인 엄마를 수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장면은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립과 갈등이 논쟁적으로 드러난 장면이다. “에어들이 들어와서 일이 줄었으니까 그 줄어든 일 정도는 해야되는 거 아냐. 일 자체가 삶의 의미라며. 근데 그 조그만한 일도 안하잖아. (중략) 왜 인간만 귀하다고 생각하지? 너희들도 DNA가 자기복제를 하기 위한 생존 기계일 뿐인데?”라는 에어 엄마가 수나에게 건네는 말은 매우 아프다. 떼를 쓰는 것처럼 보이는 수나보다 에어는 논리적이다. 이 장면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생겨난 로봇과 이로 인해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는 사람의 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수나와 에어인 엄마가 논쟁하는 장면은 짧지만 강렬했다. 인간처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안드로이드를 형상화한 인공지능 존재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지니가 삶의 목표, 사랑 등을 고민할 때, 인간이 개인의 욕망에 충실한 모습은 아시모프의 소설 「바이센테니얼 맨」(1976)에서 강력한 인간적인 인공지능 로봇의 존재론적 지위와 나아가 인간과 동일한 법적 권리를 인식하고 소유하려는 욕망과 같다. 여기까지 생각에 이르니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의 장면4 “옛날 연극을 보았다”가 문제적 장면으로 보였다. 과거형의 장면 제목은 인공지능의 시선에서 기억되고 재생되는 사람의 삶이 재현된 장면을 제시하는 것 같다. 관계를 통해 뒤엉키는 사람 사이의 욕망의 뒤엉킴을 재현한 이 장면은 지니나 에어의 열망이거나 기억 속의 영상처럼 표현된 장면이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르니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이 장면 마지막에 배우가 기타를 치며 부른 김창완의 <두사람>은 기존의 장면에 달린 주석과 다른 정서를 환기했다. 인간이라는 다양한 존재들이 공존하는 이 시대를 재현한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연극에서 그럼에도 사람 사이의 정서가 표출되었던 이 장면에서 두 인간의 존재를 확인한 것 같았다.
- 인공지능 지니의 시선으로 본 인간 꼴라쥬 극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는 매우 다른 에피소드의 무작위 병렬처럼 보이는 각 장면이 꼴라쥬되는 듯한 극적 전개를 통해, 일관된 선언을 한다.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다고. 이 선언은 과학과 기술의 진전은 영장류와 인간의 유사성만큼 로봇과 인간의 유사성, 혹은 새로운 인간종을 탄생시켰다는 인식을 불러온다. 그리고 공연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라는 친숙한 문학적 알레고리나 서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은하철도999>식의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존과 대립, 갈등이 테러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확장된 서사와 공연을 보며, 프레임 구조물 안에서 재현되는 에피소드를 통해 인공지능에게 이입을 하는 경험을 한다. 이 공연의 극적 주체는 자의식이 있는 인공적 존재이며, 이들이 폭력으로 통제되는 상황에 대한 거부를 표출하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에 의한 극적 전개를 한 것은 아닐까.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어는 매우 중의적이다. 3장에서 배우들이 아른험 집단의 침팬지를 유연한 몸동작으로 표현하는 장면은 즐겁다. 아른험의 보고서를 재현하는 장면에서 배우들은 하나둘씩 마마와 니키를, 이예룬과 라윗, 파위스트 등의 침팬지를 흉내낸다. 이어지는 티핑포인트 시기와 대비적으로 한 장면에서 재현되면서 과연 인간은 인간다운지를 강렬하게 반문하는 장면이다. 인간 스스로 반성적 자문을 불러오는 것으로 본 이 연극은 인공지능의 시선에서 연극을 전개한 것이 아닌가. 마치 아시모프의 소설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인공지능 로봇이 인공장기를 장착한 인간과 차이를 반문한 것처럼 말이다.
이 리뷰는 극단 이와삼으로부터 대본을 참고할 수 있는 도움을 받아 작성했다. 김대근·장우재 작, 연출 장우재,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 극단 이와삼, 씨어터 쿰,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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