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임야비(tristan-1@daum.net)
소설가, 연출가(총체극단 ‘여집합’), 클래식 연주회 기획가
파우스트의 음악화 대장정. 정상 목전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지난 산행에서 놓친 음악들을 주워담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 리스트, 라프 그리고 잊힌 파우스트 작곡가들을 정리한 후 ‘부록’ 캠프를 끝내고자 한다.
[1] 리스트의 작은 곡들
자신이 메피스토펠레스이자 파우스트라 생각했고, 더 나아가 괴테가 되고 싶었던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 장장 5년에 걸친 ‘음악으로 듣는 연극 – 파우스트 편’에 가장 많이 등장했음에도 아직 관련 작품이 남았다.
뛰어난 편곡가이기도 했던 리스트는 다른 작곡가의 음악은 물론, 자기 작품도 다양하게 편곡했다. 자신의 가곡 ‘툴레의 왕 (S.278/1)’을 성악 없이 피아노 연주곡으로 편곡한 ‘노래 책 1권(Buch der Lieder I)’의 제4곡 리스트 작품 번호 S.531/4도 그러한 예 중 하나다.
노래 부분을 피아노 선율로 옮겼기 때문에 어딘가 빈 느낌이 나지만, 무언가(無言歌)의 휑한 분위기가 전혀 다른 연극적 효과를 낸다. 가곡(S.278/1)이 무대 위 등장인물 그레트헨이 부르는 노래와 정서를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면, 피아노 연주곡(S.531/4)은 그레트헨의 방이라는 무대적 공간을 만들어낸다.
https://www.youtube.com/watch?v=o3xmU4m1-vc&list=RDo3xmU4m1-vc&start_radio=1
바단조 3/4박자가 부드럽게 바닥 공사를 하면 그 위로 부점이 강조되는 멜로디 라인이 얹힌다. 36마디 전조되는 부분에서 공간이 잠시 환하게 확장하지만, 다시 원조로 돌아와 무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후 조금씩 추락하는 공간은 기교적인 아르페지오를 지나 조명이 옅어지듯 점점 작아진다. 마지막 94마디에 이르러 그레트헨의 가난한 방은 그녀의 운명처럼 완전히 소멸한다.
4분 남짓한 음악은 뚜렷한 종지음 없이 끝나는데, 평생 낭만 가득한 삶을 산 리스트의 멋들어진 마무리다.
[2] 라프의 교향곡 8번 ‘봄의 소리’
요제프 요하임 라프(Joseph Joachim Raff; 1822~1882)는 스위스 태생의 독일의 작곡가이자 음악 교육학자다. 라프는 19세기 중엽 브람스, 바그너와 함께 매우 중요한 작곡가였다. 하지만 조용하고 온화한 성품 때문에 큰 욕심이 없었고, 후학 양성에 온 정열을 쏟아 붓는 바람에 다른 유명 작곡가들 만큼의 방점을 찍지는 못했다. 이런 성격이 반영된 작품 역시 자극적으로 돌출되는 부분이 부족하고, 전원적인 밋밋함이 주를 이뤘다. 그래서 라프의 음악은 빠르게 콘서트 홀에서 사라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MYGZp3FHhPM&list=RDMYGZp3FHhPM&start_radio=1
1876년, 라프가 작곡한 교향곡 8번 가장조 “봄의 소리(Frühlingsklänge)” op.205는 전통적인 4악장 구성으로 이 중 2악장의 제목이 “발푸르기스의 밤. 알레그로(In der Walpurgisnacht. Allegro)”다.
라프의 발푸르기스는 기괴함 또는 죽음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내림 마장조의 조성은 무척 밝고, 2/4박자 알레그로의 빠르기는 귀엽다. 라프의 마녀들은 봄의 생명력이 폭발하기 직전, 그 아슬아슬함을 즐기는 작은 요정들이다. 이런 정서는 라프의 선배이기도 한 멘델스존의 ‘현악 8중주 op.20의 3악장 Scherzo – 발푸르기스의 밤’과 일맥상통한다.
마녀와 괴물들의 기이한 움직임을 묘사한 현의 긁는 보잉에서도 섬뜩함보다는 설렘이 느껴지고, 연이은 셋잇단음표의 질주에서는 음흉한 음모보다는 장난기 넘치는 미소가 연상된다. 악독하고 천박한 마녀들의 너저분한 축제도 라프의 여유롭고 온화한 성품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 듯하다.
만약, ‘발푸르기스의 밤’을 밝고 푸근하게 연출하고 싶거나, 성적인 부분을 도려낸 연출을 해야 한다면 라프의 이 곡만 한 음악 연출이 없을 것이다.
[3] 잊힌 파우스트 작곡가들
1808년, 파우스트 비극 1부는 출판되자마자 독일어권으로 퍼져나갔고 영어, 프랑스어로 빠르게 번역되었다. (이중 공신력이 높은 번역본은 1821년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가 번역한 영문판과 1827년 제라르 드 네르발이 번역한 프랑스어판이다.)
파우스트의 전 유럽적 인기를 포착한 작곡가들이 발 빠르게 음악화 작업에 착수했고, 1859년에 초연한 샤를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가 가장 큰 성공과 명성을 차지했다. 하지만 1808년과 1859년 사이에도 수많은 파우스트 관련 음악이 있었다.
괴테의 친구인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하르트(1752~1814)는 비극 1부 정식 출판 전인 1806년에 파우스트 무대 음악을 작곡해, ‘파우스트 음악 작곡가’ 서열 1위를 차지한다.
마찬가지로 괴테의 친구이자 작곡가인 칼 에베르바인(1786~1868)은 1829년에 비극 1부, 1852년에 비극 2부를 위한 음악을 썼으며,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전기에 자주 등장하는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자 지휘자 이그나츠 폰 자이페르트(1776~1841)는 1820년에 파우스트 서곡을 작곡했고, 이어 1829년에는 공연을 위한 극 부수음악을 완성했다.
독일 오페라에 큰 공헌을 한 작곡가 루이스 슈포어(1784~1859)가 1816년 2막의 오페라 ‘파우스트 (WoO.51)’를 완성하지만, 괴테의 파우스트가 아닌 프리드리히 막시밀리안 클링거(1752~1831)의 파우스트 전설을 대본으로 택했기 때문에 대오에서 이탈한다. 1852년 슈포어는 극을 3막으로 확장하고 레치타티보를 추가한 개정판을 내놓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이 오페라에서 따와 고유의 작품 번호를 갖는 ‘파우스트 서곡 (op.60)’과 레치타티보와 아리아 ‘나는 지옥에서 축복을 빼앗으리라-Der Hölle selbst will ich segen entringen (WoO.77)’ 그리고 1810년에 완성한 6개의 독일 가곡 중 제3곡 ‘그레트헨 (op.25-3)’은 괴테 파우스트와 정서를 공유하고 있으며, 19세기 초반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던 파우스트의 원형을 상상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진정한 최초 파우스트 오페라는 1831년 프랑스에서 탄생한다. 여성 작곡가 루이즈 베르탱(1805~1877)이 비극 1부를 각색하여 음악을 붙인 ‘Fausto’다. 구석에 처박혀 있기에 아까운 이 작품이 최근 재조명되고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추후 연재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보겠다.
이후 파우스트 음악이 기악곡, 가곡, 극 부수음악, 오페라를 가리지 않고 전 유럽에서 쏟아져 나오고, 이러한 문화적 풍토가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 성공의 밑거름이 된다.
학자들에 따르면 18~19세기에 220명이 넘는 작가가 파우스트 음악화를 위한 대본을 썼고, 850곡 이상의 음악이 만들어졌으며, 100종이 넘는 파우스트 무대가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구노의 성공이 너무 컸는지, 이후에 나온 파우스트 관련 오페라들은 좀처럼 맥을 추지 못하고 빠르게 무대에서 사라졌다. TTIS 2024년 10월호에서 다뤘던 쥘 마스네, 외젠 디아즈, 에르베(2025년 2월호), 마이어 루츠(2025년 6월호)를 비롯해 수십 명의 작곡가가 파우스트와 함께 명멸했다.
이름 한 줄 겨우 남긴 작곡가부터 악보 한 장 보존하지 못하고 사라진 작곡가까지 파우스트라는 거대한 산의 일부가 되었다. 이들의 음악이 심산유곡에 영원히 메아리치길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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