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동이 <심판의 시간>

글_오판진(서울대 강사, 연극평론가)

 

극단 동이는 2025년 9월 25일부터 10월 4일까지 인천역 근처 P&F 소극장에서 연극 <BLIND 심판의 시간>을 공연하였다. 100분 동안 연행된 이 작품은 김병균 작, 연출이었다. 김병균 작가 겸 연출가는 인천에서 활동하는 베테랑 연극인으로, <나마스테>, <괭이부리말 아이들>, <고스트>, <최초의 만찬> 등 우리나라 현대사에 천착한 작품을 꾸준히 무대에 올리고 있다. 이번 작품인 <BLIND 심판의 시간>은 2025년 현재와 가장 가까운 시대를 다루었기에 더욱 많은 주목을 받았다.

 

범죄를 처벌해야만 하는 이유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프랑스 공화국은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의 정의를 좌절시키려는 자비를 거절할 것이다.”

 

이 글은 <이방인>을 쓴 작가로 알려진 알베르 까뮈가 신문에 기고한 내용 가운데 한 대목이다. 프랑스는 매국노들을 처벌할 때 자비를 베풀지 않았고, 범죄에 합당한 벌을 내림으로써 정의로운 사회의 초석을 놓았으며, 국민들이 단결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기 까지 많은 예술인과 정치인 등 프랑스 사회의 지성인이 노력하여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 프랑스와 같이 주권을 빼앗긴 경험이 있는 우리나라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한국은 프랑스의 현대사와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김병균 작가는 굴절된 대한민국의 현대사에 주목하면서 희곡을 집필하고, 연극을 만들고 있다. 그는 이런 연극 작품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미래를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에 관해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사진 제공: 극단 동이

 

단단한 희곡의 힘

 

이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탄탄한 구성과 정교한 대사로 이루어진 희곡을 바탕으로 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BLIND 심판의 시간> 희곡의 가장 큰 장점은 공연을 보지 않고,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큰 재미가 있다는 점이다. 2022년 ‘다인아트’에서 출판된 <김병균 희곡집. 1>에 <블라인드>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희곡을 읽으면 장면이 그려지고, 인물의 표정과 어조가 느껴지며, 다음에 어떤 대사가 나올지 기대가 되면서, 갈등이 어떻게 전개될지 상상하게 된다. 그러다가 독자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어떤 결말에 도달할지 조마조마하며 예측하게 되는 즐거움을 감각할 수 있다. 그렇게 흥미진진하게 희곡을 끝까지 읽다보면 재미만이 아닌 작가가 전하고자한 깊은 의미나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가슴 찡한 감동까지도 경험한다. 김병균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는 우리 사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자는 것으로 보인다. 즉, 2019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BLIND 심판의 시간>이지만, 2025년을 배경으로 하였다고 해도 자연스럽고 설득력이 있을 만큼 아주 동시대적인 작품이었다.

 

사진 제공: 극단 동이

 

한국현대사의 부끄러운 민낯

 

연극 <BLIND 심판의 시간>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밀폐된 공간에 여섯 명의 인물이 감금되어 있다. 이들은 묶이고, 종이봉지로 머리가 가려진 채 버둥거리고 있다. 영문도 모른 채 잡혀온 사람들은 기자, 연예기획사 대표, 전직 경찰, 유기견 보호단체 대표, 목사, 기업 3세 대표이다. 이곳에 감금된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다. 이들에게 휴대전화 문자가 전달되는데, 잡혀있는 사람 중에서 죄가 가장 가벼운 단 한 명만 빠져나갈 수 있고, 주어진 시간은 60분이라고 했다. 잡혀온 사람들은 살아날 수 있는 단 한 명을 선택하기 위해 스스로 검사와 변호사, 배심원이 되어 서로의 죄를 묻고, 변론한 후, 판결을 해 보라는 주문을 받다. 이들은 서로의 정체를 알아가며 격렬하게 논쟁하는 가운데 자신들은 무죄라는 주장과는 반대로 각자의 범죄 사실이 자연스럽고 확연하게 드러난다.

 

사진 제공: 극단 동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문제가 상당하다. 먼저 연예기획사 대표는 전직 아이돌 가수인데, 음주운전 뺑소니 사망 사건을 일으켰으며, 각종 탈법과 불법 사건 사고로 연예 기사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다. 연예인 성접대, 약물투약, 불법 동영상 배포 등의 어휘를 통해 2019년 자살한 장00 배우가 떠올랐다. 둘째, 목사는 교회 전도사 시절 교회 청년부 여성 관련한 그루밍 사건으로 대서특필된 인물이다. 미성년 신도들을 대상으로 그루밍 성폭력을 일삼은 사람이다. 셋째, 유기견 보호단체 대표는 구조 천사라는 별명과 달리 유기견 안락사 폭로사건을 통해 개백정으로 구설수에 오른 인물이다. 꼬리치며 달려드는 사랑스러운 강아지의 눈동자를 보면서 그 심장에 죽음의 주사를 꽂아놓았다고 폭로되었다. 넷째, 기자는 정론직필과는 관련이 없는 인물로 가짜뉴스를 쓰고, 퍼 나른 일을 한 사람이다. 거짓기사 한 줄로 유가족 가슴에 대못을 박고, 멀쩡한 사람을 투신자살하게 만들었다. 다섯째, 전직 경찰은 연예인 지망생 자살 사건을 단순 자살 사건으로 처리하려다 강남클럽 경찰 유착 비리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처벌을 받은 인물이다. 여섯째, 기업 3세 대표는 노동자의 안전을 신경 쓰지 않았고, 그로 인해 사망한 사원의 유가족에게 못할 짓까지 한 인물이다. 이 인물 가운데 과연 누가 살아남았을까? 공연의 결말은 독자 스스로 판단하게 하는 열린 결말로 구성되어 있었다.

<BLIND 심판의 시간>는 실제 일어난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후 연극적 상상력으로 가공하여 만들어낸 작품이다. 선진국 진입이니,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세계 몇 위에 해당한다느니 하는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남루한 우리의 현재 모습을 추리소설과 같은 구성을 활용하여 감각적으로 표현하였다. 한 공간에서 여러 인물들이 서로 갈등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기 때문에 특히, 연극이라는 장르로 표현하는 데 적절한 것 같았다. 누군가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런 납치극을 꾸밀 수도 있겠다 싶은 점도 있기에 공연을 보는 내내 실제 납치극을 목격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또는 ‘유검무죄 무검유죄’라는 말이 있다. 이 공연은 처벌해야만 하는 범죄가 단죄 받지 못하거나 솜방망이 처벌로 이어지는 현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 매우 집요하게 질문하고 있다. 우리 시대 많은 연극 작품 가운데 각별히 주목해야 하는 수작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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