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현장 <수무바다 흰고무래>

글_이은경(연극평론가)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령이라.” 이는 국내 최초 인권운동인 ‘형평운동’의 핵심단체 형평사 창립문의 첫 문장이다. 갑오개혁(1894)으로 신분제가 공식 폐지되었지만, 조선시대 천민인 백정들에게는 여전한 사회적 차별과 억압이 지속되었다. 이에 1923년 백정 출신 지도자와 양반 출신 진보적 사회운동가들이 연대해 평등과 인권을 요구한 사회개혁운동을 벌였는데, 이것이 바로 형평운동이다. ‘저울처럼 공평한 사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 형평운동은 진주에서 시작되어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엄청나게 다른 세상에 살고 있고, 형평운동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조차 잊고 있다. 하지만 약자에 대한 소외·차별·혐오는 더 견고하게 뿌리내려 여전히 우리 사회에 균열을 일으키고, 갈등을 조장한다. 그렇기에 형평운동 소재로 우리 내부의 차별문제를 비판하는 진주 극단 현장의 <수무바다 흰고무래>(김인경 작/ 고능석 연출/ 2025.10.15.~19., 진주성 야외공연장)는 충분한 시의성을 담보하고 있다.

 

사진 제공: 극단 현장

 

백정 흰고무래의 실천적 성장기를 통해 차별·혐오의 시대 비판

<수무바다 흰고무래>는 액자식 구성의 마당극이다. 1974년 창단하여 50년이 넘는 역사를 다지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극단 현장은 정극에 매진해 온 단체이지만 최근 수년간 마당극 형식의 작품 <길 위에서><고추장사 서일록 씨의 잔혹한 하룻밤><수무바다 흰고무래> 등을 제작하면서 마당극 전문단체라 해도 좋을 수준의 역량을 갖추었다. 서구에서 이식된 우리 현대연극과 전통연희에서 출발한 마당극을 새롭게 융합하여 단체의 독창적인 메소드로 개발하고, 창작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제목에서 ‘수무바다’는 바다처럼 넓지만, 물이 없는 진주 남강 백사장을 일컫는 말이고, ‘고무래’는 곡식을 그러모아 펴거나, 밭의 흙을 평평하게 고르는데 쓰는 ‘丁’ 자 모양의 농기구이다. 그렇기에 제목은 진주라는 지역성과 형평운동의 핵심 메시지에 더해 작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작품은 형평사 창립대회 장소인 진주청년회관으로 가기 위해 수무바다에 모인 7명의 천민(노비, 승려, 갓바치, 광대, 기생, 무당, 대장장이)이 백정 흰고무래가 오기를 기다리며 그의 삶을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2대에 걸친 백정가족의 서사를 배경으로 주체적이며 선각적 인물로 변화하는 흰고무래의 성장담이 전개된다. 중심사건은 백정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고 차별·혐오하는 현실을 혁파하고,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려는 흰고무래의 실천적 노력의 과정이다. 특히 형평운동을 주도했던 실존인물 강상호(김헌근 분)와 허구의 인물 흰고무래(김영균 분) 간 계급을 초월한 이해와 연대가 중점적으로 그려지는데, 실제 역사와 허구적 상상력의 교직을 통해 극적 흥미를 높인다.

 

사진 제공: 극단 현장

 

흰고무래의 아버지 눌질덕이(이재선 분)는 백정의 삶이 세습되어 어쩔 수 없이 살생을 업으로 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인물이다. “백정으로 태어나느니 차라리 지옥을 떠돌란다.”고 고백할 만큼 백정이 된 것을 천형으로 여기는 그는 소 도축 전에 반드시 존엄한 죽음을 위한 해원의식을 진행하고, 소 외에는 어떤 생명도 살생하지 않겠다는 자신만의 윤리의식을 고집한다. 그렇기에 망나니 대신 대역죄인을 참수하라는 사또의 명령에 인간을 죽일 수 없다며 거부한다. 대노한 사또가 눌질덕이한테 사형을 명하고, 그 역시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그 순간 기적처럼 아들이 태어나는 바람에 목숨을 건진다. 그가 사또에게 “나으리의 공덕으로 세상을 살아갈낍니더. 나으리요, 은혜 베푸시는 김에 얼라 이름도 지어주시마 안되겠심미꺼?”라며 아들 이름을 지어달라 요청한다. 천민의 이름을 지어주기는 싫었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사또는 ‘자고로 백정의 이름에는 인, 의, 효, 충과 같은 고상한 글자를 넣을 수는 없다’며 마지못해 백정(白丁)이라는 욕된 이름을 지어준다. 그러자 눌질덕이는 한자어를 한글로 풀어 ‘땅을 평평하게 해 농사에 꼭 필요한 고무래’라는 긍정적인 의미의 ‘흰고무래’로 아들의 이름을 짓는다. 이처럼 자기 생각이 확실한 그도 백정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벗어날 수 없는 현실로 여기며 순응하고 있다.

청년이 된 흰고무래는 우연하게 강상호를 만나면서 변화한다. 신분제도가 이미 철폐되었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더 이상 백정이라고 위축될 필요가 없는 세상이 왔다고 생각한다. 씨름판이 벌어진 날, 아버지에게 자신이 사온 두루마기를 입히고, 함께 씨름 구경을 나가 해방의 기쁨을 즐기려 했다. 하지만 백정을 혐오하는 군중의 집단린치로 아버지가 어이없게 죽음에 이른다. 의복이 계급을 표상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집단광기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사진 제공: 극단 현장

 

아버지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절망감으로 좌절한 그에게 강상호가 백정도 배우면 번듯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격려한다. 자신의 딸 덕이가 백정이 아닌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악착같이 돈을 벌어 새 학교건립에 거액을 기부하고, 노역에도 적극 참여한다. 하지만 딸의 학교 입학을 약속했던 교장이 학부형들의 압력으로 약속을 어기자 분노하고, 결국 강상호의 조력으로 어렵게 덕이는 학교에 입학한다. 일련의 수난 과정을 겪으며 그가 깨달은 것은 혼자의 힘으로는 견고한 차별의 벽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평등의 문제를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형평사를 창단하고, 형평운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백정이 양반의 복식인 두루마기를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폭행당해 죽고, 이러한 폭력이 묵인되는 부조리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시대가 바뀌는데도 이를 제대로 이해·인식하지 못하고, 관습·편견에 매몰된 우매한 지식인과 민중에 의한 집단광기에 맞서기 위해서는 강상호처럼 시대의 의미와 가치를 일깨우는 선각자가 중요하다. 흰고무래의 정신적 성장을 견인하고, 행동을 추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견고한 현실의 벽에 균열을 내기 위해 행동하는 흰고무래와 같은 실천가들의 연대이다. 첫 장면에서 조선시대 8천으로 차별되었던 인물들이 모이고, 이들 모두 형평사 창립대회에 가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이러한 주제의식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진 제공: 극단 현장

 

역할놀이에 노래··오브제가 더해져 유희성 강화

이 작품은 진주의 대표 축제인 ‘진주남강유등축제’ 기간에 진주성 야외공연장에서 공연되었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찾은 진주성·남강 곳곳에서는 현란한 드론쇼, 불꽃놀이, 미디어파사드에 엄청난 수의 빛 전시물들의 퍼포먼스가 전개된다. 그렇기에 완전 아날로그인 연극공연이 동일 공간 내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질적일 정도다. 진주성 깊은 안쪽에 옴팍하게 위치한 야외공연장은 주변의 무성한 나무들로 에워싸여 열린 공간이지만 외부의 시선에서 비껴난 느낌이다. 계단형 좌석인데, 오전에 내린 비로 축축해진 바닥 위에 간이의자를 놓아서 관객의 눈높이가 자연스럽게 무대 높이와 맞춰진다. 계단참에 앉아서 무대를 보려면 시선을 높여야 했는데,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무대와 시선이 수평으로 맞춰지니 ‘평등’이란 주제의식에 적합한 좌석배치로 느껴졌다.

형식적 특징은 역할놀이 콘셉트의 마당극이다. 핵심인물인 흰고무래와 강상호를 제외하고 배우들이 모든 인물·동물·코러스 역할을 넘나들며 풍자성과 유희성을 강화한다. 공연은 해설자가 등장하여 형평운동의 의미를 미리 설명하면서 시작되고, 형평사 창단모임에 가는 사람들의 한바탕 난장으로 마무리된다. 배우들이 무대에 존재하며 역할전환의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서사극적 연출로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전통연희에 기반한 노래와 춤에 라이브 연주가 어우러지며, 풍자와 해학으로 인해 관객과의 적극적인 소통이 이루어진다. 지역 역사를 현재로 복원하여 지역민의 자긍심을 제고하는 지역콘텐츠이며, 차별·혐오를 극복하고 함께 공존하자는 문화다양성인식을 강조하는 공연이었다.

 

사진 제공: 극단 현장

 

이 극단의 가장 분명한 자산은 가족처럼 오랜 시간 함께 해 온 배우들의 연기앙상블이다. 특히 이 작품을 5년 동안 레퍼토리로 발전시키면서 배우들의 앙상블은 더 단단해졌을 것이다. 배우들 각각의 연기역량도 우수하다. 꼭두쇠 역의 최동석 배우는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도하는 인간·동물의 멀티연기로 존재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특히 희극적 타이밍과 호흡을 감각적으로 포착하여 관객의 정서를 쥐락펴락하는데, 이러한 역량은 연습만으로는 수행하기 어려운 타고난 재능이다. 지모산이 역의 황윤희 배우의 구음도 극의 리듬감을 조성하는데 효과적이다. 격렬한 움직임과 과장된 연기를 보여주다가 한순간 움직임 없는 정적인 상태에서 구음으로 분위기를 전환시켜 이완과 긴장의 텐션을 만든다. 외면적 에너지를 순식간에 내면적 에너지로 환치시키는 분명한 내공을 보여준다. 깁스한 상태로 부상 투혼을 불사한 배우의 존재도 천민들의 저항의식에 리얼리티를 더한다.

5명으로 구성된 전통악기 연주단의 라이브 연주에 극적 분위기를 제고하는 합창 중심의 창작곡, 움직임이 크고 시원시원한 탈춤 사위를 변형한 안무가 더해져 우리 민족의 정체성인 신명이 강화된다. 시장 장면에서 보여주는 악사의 수준급 버나돌리기 퍼포먼스는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낸다. 흥겨운 연주에 배우들의 찰떡같은 리액션이 더해지니 객석이 들썩인다. 현장성으로 인한 집단체험의 경험은 ‘나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 감각을 강화한다. 열린 야외공간이 주는 해방감도 이러한 감각에 일조한다.

각 장면에 숨겨진 서브텍스트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크다. 예를 들어 학교건립을 위한 터다지기 퍼포먼스는 단순히 노동장면을 시각화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끈으로 연결된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공동체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소 도축 전 축원의식과 소가 죽은 아버지를 인도하는 장례의식은 소와 인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생명체로서의 공존을 시각화한다는 점에서 포스트휴먼의 의미를 일깨운다.

 

사진 제공: 극단 현장

 

신명의 에너지는 강화하되 계몽성은 약화시킬 필요

보완되었으면 하는 지점도 분명하다. 먼저 강상호와 흰고무래의 관계를 상호보완적 관계로 그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로는 강상호의 주도하에 흰고무래의 변화와 성장이 견인되기에 둘의 관계가 결코 평등해 보이지 않는다. 서로의 변화를 추동하는 평등한 관계로 나아가야 주제의식이 더 강조될 것이다.

과거의 사건에 머문 것도 아쉽다. 과거의 사건을 소환하여 현재를 이야기하려는 의도는 알지만 흰고무래의 딸 덕이를 통해 현재·미래와의 연계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강상호의 도움으로 학교에 입학하면서 덕이는 무대에서 사라지는데, 개인적으로 덕이가 어떠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흰고무래가 실천가가 된 핵심 동기이자 과거가 아닌 미래를 표상하는 딸의 존재감이 무대에서 제대로 드러나야 한다.

흰고무래의 마지막 대사는 노래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계몽적 주제가 내재화된 작품이지만 너무 직설적으로 주제를 설명해서 관객 스스로 생각할 여백이 없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 흰고무래의 주장에 호응하는 사람들의 합창 <저울처럼 공평하게>가 이어지기에 작위성은 약화하고, 의미전달은 강화하기 위해서 흰고무래와 천민들이 노래로 대화하는 것으로 연출하는 것이 좋겠다.

야외무대의 효과적 활용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 먼저 무대 뒷면 전체에 수묵화처럼 검은 붓칠로 그려진 대형 호랑이가 관객을 바라보며 존재한다. 우리 신화와 민속적 전통에서 호랑이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산신의 수호자, 자연의 지배자, 벽사(辟邪)의 신성한 존재로 인식되며, 한국인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이번 작품과의 긴밀한 연관성은 부족해서 극적 의미가 모호하다. 현재로는 외부의 번잡함을 가리는 차단막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만약 공연 마지막에 뒷막을 열어서 무대 밖의 풍경을 그대로 노출할 수 있다면 현재성을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야외무대에서 진행되는 공연인 만큼 공간성을 극적 요소로 수용하면 좋겠다. 나무들, 축제의 오브제들, 열린 객석 등 주변의 지형지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야외공간의 매력이 배가될 것이다.

이외에도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깨뜨려 관객과 직접 소통하는 장면연출을 강화하고, 합창만으로 진행된 노래에 중심인물(흰고무래, 눌질덕이, 강상호)의 테마송을 더해서 음악적 다양성을 갖추면 좋겠다. 흰고무래와 강상호는 유형적 인물이 아니라 변화하는 인물이기에 좀 더 유연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사진 제공: 극단 현장

 

<수무바다 흰고무래>는 잊혀진 역사에 주목하여 현재를 되새기고, 지역콘텐츠를 발굴하며, 전통연희의 현재화를 시도하고, 열린 공간에서 관객과의 소통을 강화하려는 실험을 보여준 공연이었다.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키울 수 있는 역사교육콘텐츠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기에 지역 학교를 찾아가는 공연으로 재창작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 화려한 스펙타클이 오감을 자극하는 진주남강유등축제의 화려함 속에서도 아날로그의 소박한 공연 <수무바다 흰고무래>에 300명 이상의 관객이 참여하여 함께 호흡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이것이 바로 연극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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